이번 참배에는 재경 27회 배호길 회장, 이해복 재경동창회장과 회원 5명, 부산 27회 김헌섭 회장이 먼 길에도 참석하여 더욱 뜻깊은 추모행사가 되었다. 꽃다운 나이에 조국을 위해 산화한 세 친구의 면면은 다음과 같다.
먼저 창선면 상신 출신인 강수문 군은 창선중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당시 명문인 진주고와 금오공고에 동시 합격하였으나, 구미에 소재한 학비 숙식 전액 국비 지원인 금오공고를 선택했다. 5년간 공군 의무 복무기간의 마지막 해인 1984년 11월 대구에서 대입학력고사를 치른 후 숙소에서 잠을 자던 중 순직했다. 아까운 인재가 너무 일찍 우리 곁을 떠났다는 안타까움을 지금도 금할 수가 없다.

다음으로 박석열 군은 냉천 출생으로 중학교 졸업 후 1983년 경북 영천에서 육군 일병으로 근무하던 중 생을 마감했다. “학창시절 쾌활하고, 노래 잘 부르고, 우스개소리 잘 하던 다방면에서 재주가 많았다”고 어린시절을 같이 보낸 곽영렬 친구가 전했다. 둘은 죽마고우이면서 사돈지간이라 했다. 최근 그의 어머님께서 별세하셨는데, 모자가 천상에서 눈물과 웃음으로 재회 했으리라.

마지막으로 단항 출신인 박창희 군은 창선고를 졸업하고 1984년 진해에서 해군으로 복무하던 중 제대 한 달 정도를 남겨 두고 사고사로 순직하여 주변의 안타까움을 더했다. 재학 시 선망의 대상이던 자전거로 통학을 했던 행운아였다. 장포와 단항을 오가며 우정을 쌓았다는 헌섭이는 “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모자를 삐딱하게 쓴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고 회고했다.

이번에는 제수(祭需)를 전직 여성 총무인 박수업, 이덕숙 두 친구가 정성껏 준비했다. 귀한 두릅을 낀 삼색꼬치와 노릇노릇 구운 명태전-호박전, 방아‧땡초‧홍합을 넣은 부침개를 많이도 준비했다. '까도녀'들의 작은 손과는 달리 너무나 넉넉한 손이었다. 또한 배호길 회장이 쫄깃하게 삶은 문어 세 마리와 절편-약밥-술빵, 배-사과-참외 등의 과일을 가져왔다. 광민이는 세 친구들에게 시원한 술을 따라 줄 거라고 얼음 채운 아이스박스에 소주를 가득 쟁여 왔다. 하여 제수가 아주 풍성했던 바, 그것이 지하의 친구들을 위한 것인지, 지상의 자기들 좋자(?)고 마련한 것인지 좀처럼 분간하기 어려웠다. 

제수용품, 교통비를 포함하여 배 회장이 장형자 총무에게 카톡으로 청구한 소요경비는 제사 음식처럼 삼삼했던 333,000원이었다. 수문-창희-석열이 순으로, 또한 예년과 마찬가지로 예의 비석(碑石)을 닦고, 조화(弔花)를 꽂고, 진설(陳設)을 하고, 절을 올리고, 술을 뿌리고, 음복(飮福)을 하였다. 그리고는 퍼질러 앉아 학창시절의 친구들을 떠올리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국립묘지를 둘러 싼 산은 녹음이 짙었는데, 앞산에 우뚝 솟은 쌍봉(雙峯)이 명당임을 짐작케 한다고 덕현이가 말하였다. 토종인 듯한 잔디는 파랗고 생기 있고 끈질겨 보였다. 그 사이로 장일남 작곡의 <비목>과 박인희가 부른 <얼굴>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오뉴월 땡볕도 생과 사의 우리들 사이를 갈라놓지는 못했다. 제례를 마치고 메타세콰이어 그늘 아래로 옮겨서는 자식 세대들과의 갈등과, 그런 부모 소시민들이 나라의 안위를 염려했다. 지난 4월 동창회 때 수문이 모친께서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 27회 동기회에 목돈 50만원을 선뜻 주셨다고 밴드의 정산서를 통해 알게 되었다. 염치가 없기도, 고맙기도 하였다. 

이번에도 광민이가 베스트 드라이버의 수고를 했음은 물론이다. 거의 매년 빠짐없이 동행했던 창권이와 형윤이는 업무상 바쁜 일정 때문에, 인주는 회복 중인 관계로 불참했지만 마음만은 다들 여기 '콩밭'에 와 있었을 것이다.

약 보름 전 재경향우회 체육대회 준비 모임에서 남해신문 서울 주재 기자인 윤혜원 선생님( 1973~75년에 부군이신 천창근 선생님께서는 창선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시고, 윤 기자님은 창선초등학교에서 훈장 노릇을 하셨다.)을 뵈었다. 올해도 현충일 특집기사로 27회 추모행사를 기획하고 있으니 원고를 달라고 청탁(?)을 넣으셨다. 재작년 남해신문에다 이와 관련된 '참배기'를 올렸기에 이번에는 육하원칙에 의거한 간단한 기사를 보내려던 참이었다. 

앞의 만남에서 창선초 개교 100주년 기념행사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던 중, 구하기를 시도했지만 끝내 구하지 못한, <이동초 100년사>를 등기 우편으로 건네받고는 마음을 달리 먹었다. ‘이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고, 간략한 몇 줄의 기사 대신, 어쭙잖지만 르포 형식으로 바꿔서 원고를 올리는 까닭이거니와 윤기자님의 의도에도 부합했으면 좋겠다. 참배 하루 전, 진해에서 열린 청해부대의 입항 환영식 도중 정박용 홋줄(밧줄)이 끊어진 사고로 유명(幽命)을 달리하고 부상을 입은 군인들에게 깊은 애도와 쾌유를 기원한다. 또 현장에 함께 있었던 그 가족들에게도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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