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철명상디자인학교 교장
박 철명상디자인학교 교장

‘삼세번 마음 바라보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세 번까지 인내하거나 절제된 감각을 유지한다면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행동으로 치면 아무리 화나는 일이라도 세 번까지 마음을 다스려 보자는 의미일 것이고 시비지심이 일 경우 좀 더 관용의 의지를 보이자는 뜻이기도 합니다. 더군다나 문명과 기술의 발달 속도가 빠른 시대에 하루 세 번, 자신을 바라볼 여유를 지닌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과학 문명이나 기술 발달이 인간의 마음이나 영혼을 동시에 진화시킨다면 다행이겠으나 현상적으로 보면 정반대의 양상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궁극적으로 하루 세 번 자신을 바라본다는 것은 양비론이나 흑백 논리에 지배당할 습생을 넘어 인간애(人間愛)의 귀감이 될 온유한 품성을 기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품성을 온화하게 하는 데는 무엇보다도 일련의 숙련된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세상의 논리로 평가되는 언어유희가 아니라 순수 마음의 의지로서 묻고 답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서 끊임없이 자신을 바라보며 묻고 답할 때 순수 영혼에 내재된 품성은 더욱 빛을 발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루에 마음을 세 번 보라, 만약 세 번을 보면서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다면 오늘이야말로 내 인생에서 가장 멋진 날이 될 것이다.”라는 격언을 상기한다면 기쁨은 배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늘 보는 일상의 물건도 그렇고 사람이나 자연의 생명 현상 또한 그렇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우리가 늘 보아오던 물형(物形)이라도 바라보는 순간 거기에는 평소 느끼지 못한 신비로움이 깃들어져 있음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순간을 보라, 이 순간에 절정’을 이룰 성심신(性心身)이면 마음으로 감지할 감동은 더욱더 넓고 깊게 각인 될 것입니다. 

본다는 것은 전혀 새로운 경험입니다. 기존의 관점으로 대상을 해석하는 것이 아닌 지금 여기에서 또 하나의 새로운 경험으로 맞이하는 것입니다. 보는 것, 먹는 것, 만지는 것, 느끼는 것, 말하는 것, 듣는 것 모두가 마찬가지입니다. 가히 때(時)에 순응할 인생 최초의 경험이라 할 수 있습니다. 관점의 차이는 있어도 순간 속에서 절정의 감각을 이룰 바라봄이야말로 내가 나됨의 의식을 양(養)할 밑바탕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체 행위를 절정에 이르게 할 지금 여기는 사실 시간과 공간에 예속되지 않는 생애 유일의 순간입니다. 만약 이때 생각이나 감정이 다른 곳에 가 있다면 그는 진정으로 지금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재빨리 이 순간 속으로 돌아올 다짐을 하는 것은 인생의 흐름마저 전환할 수 있는 대단한 용기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전체 질서가 이 순간 나와 함께 하고 있다는 동기에서 모든 이치가 세상의 중심인 나에게로 귀결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마치 자연 생명 전체가 그물망처럼 연결된 에너지로 개체 생명과 통하고 있는 이치와 같은 맥락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상과 내가 둘이 아니요 하나인 까닭에 가고 오는 것이 다름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우주 전체가 같이 움직이고 있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우리의 하루 일상이란 늘 반복되는 일의 연속입니다. 이미 익숙해진 경험, 늘 같은 패턴으로 전개되는 일의 속성에서 새로운 기운을 감지한다는 것은 한계가 있을 수 있습니다. 특히 반복적 생활 속에서 고루한 편견으로 자신을 부정 시 할 경우 더욱 요원한 일 일수도 있습니다. 감정의 양단에서 대상을 향한 판단이 한쪽(과거)으로 치우쳐 질 경우 판단의식이 흐려질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이를 때 자신의 마음을 세 번 바라보며 각오를 다져본다면 좀 더 새로운 분기점을 맞이할 것입니다. 마음을 고요히 하면서 “이 순간은 내 인생의 처음이요 새로운 시작이요, 나를 본다는 것은 본래의 나를 찾아가는 길”이라는 데 의의를 두면서 말입니다. 어느 관점에서든 기존의 감정이나 관점이 아닌 전혀 새로운 길을 열 방편에서 명상이 부각되는 것도 이러한 사유에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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