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건한 기상(氣像)과 넉넉한 마음으로 어떠한 역경과 고난에도 굴(屈)하지 않고, 무엇이든 헤쳐 나갈 수 있다는 당찬 메시지로, 젊은이들의 이상(理想)과 꿈을 일컫는 말이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선생의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심여만고청산 행여만리장강(心如萬古靑山 行如萬里長江)". 즉, '마음은 수많은 세월을 여전히 푸르름을 간직한 채 서 있는 저 산처럼 유지하고, 움직임은 만리(萬里)나 길게 뻗어 흘러가는 저 강물처럼 꾸준하고 여유로움을 유지하자'라는 도산서원(陶山書院)의 훌륭한 걸작(傑作)이다. 
이 문장을 줄이면 '기산심해'라고 할 수 있으며, '기개(氣槪:용기)는 산처럼 흔들림이 없고, 마음은 바다처럼 더 넓히라', '기운이 산과 같고, 마음 씀이 바다와 같이'라는 뜻이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의 선비이며 가장 저술(著述)을 많이 남긴 학자인 퇴계의 고향이면서 생전에 그가 세운 학교가 바로 도산서원이다.
 조선시대 도산서원은 건축물 구성면과 형식으로 보면, 크게 도산서당(陶山書堂)과 이를 아우르는 도산서원으로 구분된다.
 도산서당은 퇴계선생이 몸소 거처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으로, 1561년(명종明宗16)에 설립되었는데, 퇴계선생이 선조(宣祖)의 벼슬 권유를 뿌리치고 낙향한 후 학문연구와 후진 양성을 위해 지었으며, 서원 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직접 설계했다고 전해진다.
 도산서원은 1570년 퇴계선생이 돌아가자 1572년에 위패를 봉안하였으며, 추증(追贈)된 사당(祠堂)과 서원으로, 전교당(典敎堂)과 동·서재(東·西齎)를 지어, 6년 뒤인 1576년에 완공되었다.
 한석봉(韓石峯)이 쓴 도산서원의 편액(扁額)을 하사(下賜) 받음으로써, 영남유학(嶺南儒學)의 총본산(總本山)이 되었다.
 1969년 서원을 중심으로 논 밭 임야 등이 사적(史蹟)170호로 지정되어, 그 후 보수․증축사업을 하는 등, 우리나라 유학사상(儒學思想)의 정신적 고향으로 성역화(聖域化) 되었다.
퇴계 이황은 워낙 학문에 심취되어 세상 속으로 나가는 것을 싫어하였다. 
선조가 끈질기게 국사(國史)를 청(請)하지만, 열 번의 어명(御命) 가운데 한 번 정도 한양(漢陽)으로 올라가는 정도였으니까 짐작이 간다.
 하지만 매관매직(賣官賣職) 당파싸움 등, 무능한 조정(朝廷)의 형태에 환멸을 느껴, 병(病)을 핑계로 고향에서 완전 칩거(蟄居)를 한다.
 그 대신 조선팔도(朝鮮八道)의 뛰어난 인재를 불러 모아 학문을 가르치는데 전력을 쏟았다. 
 전국의 수 많은 인재들이 먹을 양식(糧食)을 짊어지고 퇴계의 문하(門下)로 들어와 학문에 매진하는 등, 벌써 당시 수리(數理) 천문학까지 수학(修學)할 정도이니까 탄성을 금할 수 없다.
 좁은 땅에서 너무 많은 사람들이 부딪치며 살아가다 보니,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옹색해지고 왜소해지고 초라해  버리지는 않았는지?
 산과 바다 자연을 벗 삼아 '기산심해'로 우리들의 삶을 새롭게 단장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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