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이런 삶을 참아낼 수 있었을까. 피맺힌 삶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인터뷰를 할 때도 마친 후에도 억울한 일을 당하고 힘들게 살아온 할머니의 삶이 계속 상기되어 가슴이 아리고 쓰렸다. 억대의 채무를 만들어준 사람과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3개월 동안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해 일시적으로 시력도 잃은 채 두문불출하며 지냈던 할머니가 너무나 가여웠던 탓이다. 

기구한 운명을 살아낸 이봉선 할머니를 만나게 된 것은 지난 11일 이웃 문신수 선생의 추모식자리에서였다. 82년의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세상만사 모든 일을 묵묵히 견뎌왔다는 것을 말해주듯 갓 피어난 꽃봉오리처럼 입술을 아주 작게 여닫았다. 얼마나 많은 하소연을 세상에 뱉지 못하고 속으로 삼켰는지를 입모양에서 깊이 읽을 수 있었다. 할머니가 이날 여기에 온 이유는 이미 고인이 된 남편이 이웃 문신수 선생과 6촌이었기에 친척의 입장으로 참석을 한 것이었다. 추모식을 마치고 모두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을 때 이봉선 할머니가 마침 필자의 옆에 앉게 되었다. 얼굴이 곱다는 인사를 건넸더니 “지금까지 고생만 하고 살아왔는데 곱다고 하니 고맙다”고 했다. 그리고 연이어 나온 말이 “32년 동안 빚을 다 갚아 지금은 너무나 홀가분하다. 빚 갚은 지 이제 2년 됐다”며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들으면서 필자가 연상한 것은 조금 전 추모누리에서 보았던 엉겅퀴였다. 엉겅퀴는 보라색 꽃을 탐스럽게 피우지만 잎에 가시가 있다. ‘80세까지 빚을 다 갚고 죽어야 한다고 자신을 찌른 것은 엉겅퀴가시였고, 주변에 어려운 사람이나 아픈 사람에게 죽과 국을 끓여 음식봉사를 하게 만든 것은 엉겅퀴꽃향기였다. 엉겅퀴가 가시와 향기 나는 꽃을 동시에 지닌 것처럼 할머니도 상반된 두 감정을 품고 지금까지 살아왔기에 서로 연관이 지어졌다.

할머니는 맏딸로 태어나 11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자연히 어머니의 가사노동을 함께 분담하며 지냈다. 바느질 솜씨가 좋았던 친정어머니는 할머니에게 바느질을 하게도 했고, 집안일을 거들게도 했다. 똑똑했던 할머니는 초등학교를 졸업 후 15세에 경찰서 전화교환원으로 입사하여 7년의 직장생활을 한 후 22세에 대학을 나온 할아버지와 결혼을 하여, 2남3녀를 기르게 되었다. 손재주가 있었던 할머니는 전화교환원 일을 하면서도 뜨개질을 하여 번 돈을 살림살이에 보탰다. 2교대로 근무하던 업무특성상 밤에는 잠과의 전쟁을 치러야했는데 책임감이 강한 할머니는 상사의 “여러분이 중요한 전화를 놓치게 된다면 밤에 간첩이 내려왔다는 연락도 못 받을 수 있으니 절대 잠을 자서는 안 된다”는 말을 새겨듣고 뜨개질로 잠을 이겨내며 당직을 섰다. 항상 잠을 자지 않고 성실하게 근무하는 모습에 감동한 경찰서에서는 할머니에게 표창패를 수여하며 칭송을 했다. 

결혼생활 25년 동안 할머니는 잠시도 편안하게 보내지 않았다. 애를 낳아 젖을 물리는 시간에도 다리 밑에 방석을 고운 채 뜨개질을 했다. 처음으로 완성시킨 뜨개 옷은 검은 원피스에 녹색 조끼였다. 그 옷이 마음에 든 사람들은 너도나도 주문을 하여 1년에 30벌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뜨개 솜씨를 인정받아 항상 바빴던 할머니는 뜨개바늘을 잠시도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시어머니에게 자켓을 만들어 드렸을 때도 사람들이 그것을 주문하여 또 몇 개를 만들어야했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뜨개질만 할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한 번도 싸우는 일 없이 잘 지내던 남편이 어느 날 업무 스트레스로 인해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47세에 남편을 잃은 할머니는 그 후부터 남보다 몇 배의 일을 하며 다섯 자녀를 길러내야 했다. 하지만 고등학교 졸업 후 직장생활을 했던 딸이 한 푼도 낭비하지 않고 모은 돈, 3억 원을 친구에게 고스란히 사업자금으로 빌려주게 되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집을 담보로 부득불 또 사업자금을 빌려주는 일이 생기고 말았다. 결국 그 돈을 돌려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은 딸은 시름시름 앓다 이 세상과 이별을 했고, 할머니는 49세부터 빚을 갚기 위해 온갖 일을 했다.

농사철이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노동력을 제공했고, 콩나물장사‧목욕탕때밀이‧가사도우미‧아이돌보미‧떡방아찧기‧빵집허드렛일 등 안 해본 일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몇 년 전에는 ‘남해장어’라는 간판을 달고 4년 정도 장사를 했지만 손이 큰 할머니는 장사에서 많은 재미를 못 보고 그만두게 되었다. 지금은 5년 전부터 노인 일자리사업 중의 하나인 야쿠르트 배달을 하며 지내고 있다. 할머니는 걸어서 30분 정도 걸리는 인근 광포마을로 주3회 야쿠르트 배달을 하다 어느 날부터는 야쿠르트만 들고 가는 게 미안해 장어국과 검은깨죽 같은 것을 직접 끓여함께 전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죽과 국을 끓여 아픈 사람과 힘든 사람을 돕게 된 것은 순전히 친정어머니 영향 때문이었다. 할머니가 어렸을 때부터 “아픈 사람에게 죽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다”고 하여 그것을 신조로 삼고, 죽 예찬론자로 살아오셨다. 할머니는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부터 그 일을 무려 42년째 이어오고 있다. 할머니가 남산아래에 모여 있는 어른들께 죽을 써서 가져가면 “봉선이가 엄마 닮아서 이렇게 맛있게 요리를 잘한다”며 고마워하고 칭찬도 했다. 할머니는 이제 연세가 많아 죽과 국을 안 끓이겠다고 다짐을 했지만 얼마 전 친구가 감기에 걸려 아프다고 하여 다시 죽을 끓이게 되었다. 지금 집에 남아있는 죽 재료는 검은깨‧흰콩‧흰깨 서너 되씩이다.

할머니는 검은 깨가 다 소진될 때까지만 죽을 끓이고 이제 접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또 누군가가 힘이 없어 보이거나 아프다는 말이 들리면 다시 맛난 죽을 끓이기 위해 깨와 콩을 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주택2층에 거주하는 할머니는 요즘 계단을 오르내릴 때 다리가 좀 불편하다고 했고 오른쪽 팔에 6년 전, 심어놓은 철심을 아직 빼내지 못해 약간 불편하지만 참을 수 있다고 했다. 자신을 위해 돈 쓰는 걸 최대한으로 자제하는 할머니는 지금껏 기초화장품을 한 번도 사 본 적이 없었고, 사치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일까 병원비 지출이 아까워 시큰거리는 팔의 통증을 지금껏 참아내고 있는 듯했다. 이것 정도야 얼마든지 참아낼 수 있다고 하면서도 눈가가 촉촉해지는 것을 보고 시선을 바로 들 수 없었다. 그동안 적은 생활비로 요령껏 살림을 하면서도 남을 위해 국과 죽을 끓여온 할머니는 사람들에게 선의를 베풀 때마다 자신의 마음이 가득 차는 듯한 기분을 가지게 된다고 했다.  

겨울이면 팔이 더욱 시리고 아프지만 손수 젓갈 고추장 된장 간장을 담아 가족의 건강을 챙기고, 친구들과 놀러갈 때도 직접 만든 것이 좋다는 생각으로 밥도 하고 반찬도 해서 가져간다. 유일하게 노래교실에 다니고 있는 할머니는 영양밥도 한 번씩 하고 반찬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베푼다. 남해초등학교 37회 동창회장을 맡았을 때는 너무나 봉사를 많이 하고 남다른 모습을 보여 그 당시 전무후무했던 감사패를 1993년 유일하게 혼자 받았다. 요즘은 회장을 하고 나면 의례적으로 감사패를 주게 되지만 그때는 누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처우가 달랐다.

할머니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두 번 상패를 받았는데 전화교환원 때 받은 것은 이미 분실하여 없고 감사패 하나만 남아있다. 주위사람들은 “음식도 제일 맛있게 하고‧우는 아기도 제일 잘 보고‧뜨개 옷도 잘 만들고‧남을 먼저 챙기는 마음씨 착한 사람”이라는 말로 할머니를 칭찬하기 바쁘다. 49세부터 80세까지 32년 동안 온갖 일을 하며 그 많은 빚을 갚은 할머니, 생각만 해도 그 정신과 노력이 놀랍기 그지없다. 할머니 넷째손가락에는 결혼 후, 한 번도 빼지 않았다는 1300원짜리 루비반지가 끼워져 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바로 사람의 도리를 저버리지 않겠다는 자신만의 신념을 하루도 잊지 않았다는 뜻이 담겨 있을 것이다. 죽기 전에 모든 빚을 다 갚아야한다는 정신력은 그 무엇도 자신을 흔들 수 없었다. 요즘은 빚 탕감을 받으며 사는 세상이지만 그녀는 인간의 책무를 끝까지 다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이 할머니께 해 드려야 할까. 필자는 처음으로 현자(賢者)들에게 진정으로 묻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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