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의 남아 있는 시간을 이처럼 우아하게 준비하는 사람이 있을까? 이동면 고모마을의 올해 95세인 김석원 할아버지와 94세인 박금엽 할머니의 스토리다.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김석원 옹은 오늘도 읍내 다방에 나다닐 정도고, 박 할머니는 나들이까지는 힘들어도 손수 끼니를 지을 정도로 노부부는 아직 건강하다.
김 옹은 지난 5일 이웃들을 집에 초대해서 조촐한 행사를 치렀다. 창고로 쓰던 가택 아래채를 수리해 ‘소암정사(素庵靜舍)’라는 현판을 거는 이벤트를 마련한 것이다. 소암은 남해로타리클럽 회원으로 활동을 했던 당시 스스로 지은 자신의 아호다. 이날 이벤트는 ‘내가 왜 소암정사를 짓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사람들은 마을주민들과 정현태 전 남해군수 등 가까이 지냈던 지인들, 그리고 자신이 문장인 경주김씨남해군종친회 김 희 회장을 포함한 임원들까지 약 50여명에 달했다.  

소암정사 안은 그가 왕성하게 사회활동을 하는 동안 받았던 각종 감사패와 공로패, 상장과 사진, 붓글씨액자, 경주김씨 족보, 어머니와 자신의 장롱 등 자신의 삶의 궤적을 알 수 있는 각종 기록물들로 가득했다. 액자 하나는 1938년 이동공민학교를 졸업할 당시 앨범에 수록된 자신의 사진이 담아 놓은 것이다. 가장 많은 것은 1984년부터 1997년까지 13년간 부산 남부민1동에 살면서 통장으로, 새마을금고 이사장으로, 부산시 의료보험조합 이사로, 민주정의당 동책임자로 활동할 당시 받았던 각종 공로패와 감사패들이었다. 소암정사를 한 마디로 설명하자면 개인사기록관이다. 
“내가 죽고 나면 자손들이 저것들을 간수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지 않도록 조치를 취한 것이라 보면 된다. 선조를 잊지 않는 삶의 자세를 가져야 난간을 만났을 때 해쳐나갈 수 있는 올바른 삶의 자세를 가질 수 있다. 후세에게 그걸 말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옹의 말씀 중에 가장 우아하게 다가왔던 내용은 “자녀들(2남2녀)에게 이 애비가 죽으면 병원에도 영안실에도 가지 말고 곧장 조관에 입관하여 화장 납골하고 문중납골묘에 안치하라고 일렀다”는 것과 또한 “조문객들로부터 일절 조의금을 받지도 말고 일체의 음식도 제공하지 말라고 일렀다”는 내용이다. 
예전의 장례는 상여를 매고 묘지 일손을 먹여야하는 일이 컸지만 화장납골로 바뀐 요즘에는 그럴 필요가 전혀 없으므로 이를 자신의 장례에 적용하라고 자녀들에게 일렀다는 말이다. 자녀들이 이에 따를 것인지는 모르지만 자신의 장례로 이웃에게 부담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지론을 사회적 메시지로 던지고 싶다는 것이 김 옹의 뜻이었다.
김 옹이 이러한 철학을 확립하게 된 배경에는 김두관 군수가 엄청난 결심으로 밀어붙였던  장묘문화개혁정책(매장봉분에서 화장납골로)을 가장 먼저 받아들인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군이 장려하는 문중납골묘정책은 이런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김 옹은 앞장서 실천하려고 했다. 김 옹은 조상들의 묘 360여기를 수습한 경주김씨 서호문중 초음문중납골묘로 기자를 안내해 보여주기도 했다.
“오늘 불려가도 좋다고 생각할 만큼 원도 한도 남기지 않았다”고 말하는 김 옹. 개인사기록관을 만든 김 옹의 이야기를 들으며 ‘아 사람은 자신의 삶을 이렇게 아름답게, 우아하게 만들 수 있구나’ 하는 큰 울림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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