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 / 명상디자인학교 교장
박철 / 명상디자인학교 교장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립니다. 아니 어쩌면 봄은 이미 우리의 어깨너머에 와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때가 되면 누구나 만나게 될 생명의 신비스러움에 가슴이 설레기도 합니다. 춘삼월의 상징으로 귀결될 새 생명이기에 더욱더 그렇습니다. 이미 태동할 생명의 뿌리는 겨우 네 얼어붙었던 차가운 대지를 뚫고 비상할 준비를 마쳤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들 생명을 맞이할 우리들은 어떤 마음가짐을 지녀야 할까요. 만약 우리들의 일상적 습관을 그대로 유지한 채 맞이하려 한다면 그들의 예민한 촉수는 아주 민감하게 반응할 것입니다. 언어로 담아낼 수 없는 생명의 신비는 인간의 육감으로도 헤아릴 수 없는 영특함이  있습니다. 이를 일러 신성(神性)과 순수함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또는 내재한 본성 차원의 실체적 진실이라 칭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생명의 신비가 아무리 아름답다 하여도 욕망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감지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새 생명을 맞이하는 우리는 더더욱 마음가짐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지불견(視之不見)이요, 청지불문(聽之不聞)이라 했습니다. 시각적 육감적으로 보이는 현상적인 요소가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생명의 소리마저도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각으로 그들 세계를 바라보기에는 한계가 있는 듯해도 누구나 마음을 고요히 하기만 하면 느낄 수 있는 이미지입니다. 그래서 명상 수행이 필요합니다. 일언(一言)과 일행(一行), 일심(一心)을 한 치의 부끄러움 없이 일순간에 두는 것입니다. 한순간 맞이하는 경험, 생사(生死)의 갈림길에서 어쩌면 처음이자 최후가 될 비상한 현존이라는 점에서 귀추가 주목됩니다. 이것을 범속한 세상인심으로서가 아닌 전혀 새로운 감각으로 맞이해야 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새 생명을 만나기 위해서는 사람 역시 새로워져야 한다.”라는 외침이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닐지라도 새로움은 언제나 지금부터라는 점에서 충분히 공감할 사유입니다. 적어도 생명에 순응할 품격을 갖춘 사람이나 하심(下心)으로 회심(回心)할 용기를 지닌 사람이라면 더욱 가능하리라는 것이 중론입니다, 그만큼 새 생명을 맞이하는 각오가 남달라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른 아침, 이름 모를 새들의 아름다운 음률이 대자연의 숨결을 고르게 합니다. 밤새 고요하기만 하던 숲속 친구들도 이제 막 들려온 새들의 청아한 목소리에 반색하며 귀를 기울입니다. 산천초목의 생명이 눈을 비비며 아침 햇살을 맞을 때 은은하게 들려오는 그들의 목소리는 새로움을 여는 실마리가 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이에 반응하는 만물(萬物)의 인상 또한 조화와 상생의 기류가 넘쳐나고 귀를 열어 들을 소리는 미물의 숨결까지 세세하게 감지합니다. 지기(至氣) 입자의 파동은 온유한 생명력을 잇게 하고 육감(六感)이 아닌 칠감(七感)으로 느껴질 감성은 생명 전체의 성장을 한결 부드럽게 하고 있습니다. 어떤 판단도, 어떠한 흑백논리도 존재하지 않을, 하등의 번뇌도 없을 것 같은 이들의 대화를 막아설 장벽 같은 것은 아무 데도 없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순간에 터득할 감회란 다름 아닌 “그 너머에 있는 것을 바라볼 수 있다”는 여유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봄과 함께 찾아들 생명의 소리를 직감하는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내면으로 다져질 유기체로서의 생명은 상호 관심사인 천연의 본성을 잇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의 선명성에서 한 생각을 바꾸기만 하면 신비와 경이로움을 만날 길은 항시 존재해 있습니다. 어떠한 기류로 만나든 그들과의 교감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은 내 안에서 잠자고 있는 순수영혼을 일으켜 깨워야 한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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