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천면 문의리에 살고 있는 김복동‧하정자 부부는 지난해에 한광호 농업연구인상을 수상한 김외연(경상대 농화학식품공학과 교수)며느리를 칭찬한 적이 있다. 그 기쁨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인 지난 3월 둘째 아들인 김민갑 씨가 경상대학교 약학대학 학장으로 임용되는 기쁨이 또 한 번 찾아왔다. 며느리와 아들이 삶의 원천이 되어 늘 행복하다는 김복동‧하정자 부부를 만나 김민갑 학장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들어 보았다. 역시 ‘올바른 부모 밑에 올바른 자식 난다’는 선인들의 진리의 말씀을 처음부터 끝까지 떠올리며 ‘세상에 이런 일도 있구나’로 감동이 되었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애틋함과 부모에 대한 자식의 공경심이 너무나 보배롭게 다가와 듣는 내내 부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다.     -편집자 주

김민갑 학장은 1969년 설천면 문의리에서 출생하여 설천초‧설천중‧진주고‧경상대 생화학과 졸업‧경상대학원 생화학과 석사 졸업‧2006년 미국 오하이오주립대학 박사로 졸업하였다. 그 후 2011년 경상대학교 교수로 임용되어 2017년부터 2019년 2월까지 약학과 학과장을 재직했고, 올 3월부터 2021년 2월까지 경상대학교 약학대학 학장에 임용되었다.  
사진으로 처음 그의 얼굴을 대면했을 때 근심걱정이라고는 한 톨도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활짝 웃고 있는 모습에 밝은 기운이 역력하여 부정적인 단어는 떠올릴 수 없었다. 어릴 때부터 부모에게 마음을 쓰이게 한 적도, 형제끼리 싸움 한 번 한 적도 없었다는 말들이 자연스럽게 연관 지어졌고, 대인관계도 둥글둥글하여 언제나 주변에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말에도 믿음이 갔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이었던 교감 선생님은 “민갑이는 교수나 과학자를 시켰으면 좋겠다”는 말을 전했다. “그때 담임선생님이 어떻게 우리 아들을 그렇게 정확하게 봤는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 그 선생님은 지금은 돌아가시고 안 계시지만 우리 아들이 박사된 것을 보고 무척 기뻐해 주었다”고 하면서 “사실 우리 민갑이가 생화학과에 다니던 중 건축학과로 전과를 하고 싶어 했을 때 “나는 작업복 입고 일하는 아들을 키우기 위해 진주로 학교를 보낸 게 아니다”라며 일언지하에 거절하여 그대로 그 과를 무사히 마칠 수 있게 했다. 

생각이 많고 남을 즐겁게 하는 힘이 다분한 김 학장이 중학교 시절에 써 놓은 수첩에는 “인간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동물보다도 연약하고, 시기심 많고 옹졸하고 또한 사악하다” 또 다른 메모에는 “우리의 인생은 너무나 짧고 보잘 것 없다. 더구나 우리가 이 사회에서 일하고 노력하는 때는 너무나 짧은 세월이다. 이러한 세월 우리의 인생을 보람차게 보내려면 매일 최선을 다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올지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라는 인용글귀들이 있었다. 자신의 마음에서 진정으로 우러난 내용을 써놓은 메모에는 “평생을 자식들을 위해서 살아오신 분들 아침부터 저녁까지 뼈 빠지게 고생하시고 자식들을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마다하지 않으시는 분들, 이분들이 없이는 지금의 내가 없고 편안한 삶도 누릴 수 없는 것이다”라는 속 깊은 내용도 볼 수 있었다. 

위에 누나 둘 형이 한 명 아래로 여동생이 있는 그는 2살 터울인 형과 함께 노는 일들이 많았다. 썰매를 타거나 구슬치기 등을 하면서 보냈는데 중학교 입학식을 하던 날, 형이 입학생들에게 학생 대표로 환영사를 했고, 동생인 그가 입학사를 했다. 그의 어머니는 두 아들이 설천중학교에 다니면서 그런 향긋하고 영광스런 추억을 안겨주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고 했다. 다섯 명의 자녀들이 초중고를 다닐 때 모두 12년 개근을 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김 학장이 진주고에서 졸업을 할 때는 부모님이 개근상을 받으러 직접 학교로 가기도 했다. 부모님의 세심한 뒷바라지가 없었다면 이런 출석 성적은 낼 수 없었을 것이다. 한 번도 꾸중한 적 없고 싸운 적도 없는 자식들이 대견한 부모님은 어릴 때 자녀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연신 행복해했다. 특히 둘째 아들을 보면서 “뭐 저런 게 다 있을까”라는 말을 자주 되뇌었다고 한다. 

김민갑 학장은 월급날이 되면 매달 부모님에게 적잖은 용돈을 보내드린다. 한 달도 거르지 않고 그렇게 해 왔을 뿐 아니라, 매일 안부 전화를 하며 부모님을 챙긴다. 먼 곳에 출장을 가거나 행사가 있을 때는 미리 전화를 드려 일정을 보고하고 전화를 기다리지 않도록 양해를 구한다. 아침저녁으로 전화를 드리면서 항상 잊지 않고 하는 말은 “엄마, 아부지, 감사합니다”였다. 농사철에는 자녀들과 함께 부모님 댁을 방문하여 농사일도 거들고 많은 이야기도 나눈다. 집을 들어설 때는 먼저 ‘엄마’를 부르며 안아주고, 뒤이어 ‘아부지’를 부르며 또 포근히 안아준다. 본가에서 잠을 잘 때는 부모님 사이에 쏙 들어가서 두 손을 꼭 잡고 안아주기도 하면서 꿀잠을 잔다. 집으로 돌아갈 때도 부모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득 담아 포옹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 옛날 60살이 된 황희 정승이 80살 된 어머니 앞에서 늘 때때옷을 입고 재롱을 피웠다는 내용과는 겉모습이 다르지만 부모님을 기쁘게 해 주기 위한 몸짓은 동일하다고 본다. 

부모와의 관계가 이렇게 잘 형성된 것은 서로에 대한 신뢰와 올바른 삶의 모습이 바탕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부모님이 어느 날 이웃집에서 사각모자를 쓴 자식들의 사진을 보고 “우리도 저렇게 키울 것”이라고 다짐했고 또 어느 집 창고에 나락가마니가 잔뜩 쌓여있는 것을 보고 “우리도 저만큼 쌓아두며 살 것”이라는 다짐을 수없이 했다. 그리고 자식들에게는 “사람으로 태어나서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절대 더럽혀선 안 되고, 남에게 욕먹지 말고 살아야 한다. 남을 헐뜯지 말고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하는 너그러움을 가져야 한다. 불우이웃 돕기 할 때는 남이 300원 내거든 너거는 500원을 내거라. 때가 되면 무엇이든 다 된다. 너무 욕심 내지 마라”는 말로 훈육하곤 했다.  

그가 부모님 생각을 놓지 않고 항상 본가에 마음을 두고 있는 것을 아는 자녀들은 할머니 할아버지를 생각하는 마음이 무척 컸다. 어느 날 방송국에서 유치원에 촬영을 나왔을 때 손녀가 했던 말을 보면 정말 기특하지 않을 수 없다. “남해 할아버지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하면서 “제 이름 김남경을 지어주셔서 감사하고 반찬을 정성껏 만들어줘서 제가 건강하다”며 진심으로 감사함을 전했다고 한다. 부모님이 그렇게 할아버지 할머니와 유대관계가 좋으니 자연적으로 자녀들도 그렇게 마음이 흘러가는 것 같았다. 

지난3일에는 할머니가 사 준 교복을 입고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손자가 인사를 하러 왔다고 한다. 새 교복을 입고 인사를 하러 온 손자를 할머니 할아버지는 어떤 마음으로 대했을지 직접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일심동체로 살아가는 부모는 들판에서 일을 할 때마다 아들이 전해준 말들을 떠올리며 힘을 내고, 내조를 잘하는 며느리, 똑똑한 손자손녀를 생각하며 환한 미소를 짓는다. 아들인 김민갑 학장도 일터에서 부모님을 생각하며 더욱 힘을 낸다. 
장한어버이상 장한어머니상을 받은 부모를 보고 자란 자녀들의 행복한 얼굴이 거실에 걸린 사진 속에서 매일 따뜻한 호흡을 하고 있다. 필자는 그 사진을 보면서 “좋은 부모 밑에 좋은 자녀 난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되새기며 많은 생각에 잠겼다. 오늘 같은 날 사친시思親詩라도 한 편 읊조려봄이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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