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윤고려대장경판각성지보존회 부회장
김봉윤고려대장경판각성지보존회 부회장

몇 층 석탑일까?

석탑의 구조는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로 나눈다. 기단부는 지대석, 면석, 갑석으로 되어 있으며 2층 기단, 1층 기단과 함께 자연석을 기단으로 삼는 경우도 있다. 탑신부는 탑신석과 옥개석으로, 상륜부는 노반, 복발, 앙화, 보개, 보륜, 수연, 용차, 보주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탑동석탑을 구성하고 있는 돌의 개수를 세어보면 지석묘로 추정된다는 맨 아래의 대형 자연석을 빼고 총 10개로, 기단부는 자연석위에 갑석 1개를 바쳐놓고 탑신부는 탑신석 4개와 옥개석 4개를 쌓았고, 그 위의 상륜부로 工자 모양의 돌이 올려져있다.
석탑의 층수는 원래 3, 5, 7, 9의 홀수가 원칙이다. 짝수 탑은 10층을 제외하고는 없다. 현재 이 탑은 4층탑이다. 집도 벽과 지붕이 한 세트로 1층이듯 몸돌 1개와 지붕돌 1개가 합쳐 1층이 된다. 커다란 자연석과 맨 아래의 받침돌이 기초이고 그 위로 4층을 올렸고 맨 꼭대기에 절구통 모양의 장식돌이 있다. 본래는 3층탑이었는데 다른 탑의 부재로 1층을 더 쌓았을 수가 있으며, 5층 이상의 탑이었는데 나머지가 유실되고 4층만 남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탑의 두드러진 특징은 工자 모양의 상륜부 장식과 지붕돌이 얇고 지붕의 물매가 거의 없이 평평한 모양이라는 점이다. 상륜부의 장식 돌은 유래를 찾기가 힘들 정도로 특이한 경우이며, 옥개석의 두께가 얇으며 지붕의 각도가 완만하고 추녀 끝이 날렵하게 반전되어 있어 다층탑으로 추정하는 근거로 삼기도 한다. 또한 몸돌이 지붕돌과 재질이 달라 뒤에 다른 석재로 복원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것들을 종합해 볼 때 이 탑은 애초에 5층 이상의 다층탑으로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할 것이다.

▶당항리3층석탑
▶당항리3층석탑

탑이 이사를 갔다고?

석탑의 현 주소지인 중앙마을에 살고 있는 박규훈(73세)씨에 의하면  이 석탑은 탑을 받치고 있는 커다란 자연석(3.5m × 2.6m)과 함께 3∼4m 안쪽(도로에서 시장방향)으로 이사를 했다고 한다. 1970년대 초 도로를 확장하면서 불도저로 바위를 밀고 탑을 해체해 옮겨 복원했다는 것이다. 경남문화재자료 제42호로 지정(1983년)되기 이전의 일이였다. 당초 탑이 있었던 곳에는 향나무와 느티나무가 서 있었으며, 탑을 현재의 위치로 옮긴 뒤에는 양쪽에 단풍나무가 있었으나 지금은 베어내고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보리암전3층석탑
▶보리암전3층석탑

남해의 고려시대 석탑

고려시대로 들어오면서 불탑의 조성에 지방 세력과 일반백성들이 대거 참여하였다고 한다. 보물 제53호로 지정된 개심사지오층석탑(開心寺址五層石塔)을 비롯한 여러 기록을 통해 지방민의 발원으로 많은 석탑이 건립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으며, 이는 고려석탑이 다양성이라는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중앙권력의 체계적인 틀에서 벗어나 지방의 토착 세력과 백성들이 불탑조성에 참여함에 따라 나름대로의 지역적 특성과 자유분방하고 다양한 형태의 변화가 나타나게 된다. ‘월정사8각9층석탑’과 ‘경천사지10층석탑’ 등 신라시대에는 볼 수가 없었던 특이한 형태의 탑들이 등장하고, 기하학적인 문양과 둥근모양의 탑을 비롯한 파격적인 형태의 화순 운주사석탑이 조성되는 등 고려시대의 다이내믹한 역동성이 불탑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남해에 고려시대로 추정되는 탑으로 보리암전3층석탑과 남면 당항리3층석탑, 이동 다정리3층석탑이 있다. 가락국 허왕후(김수로왕의 왕비) 전설을 담고 있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74호로 지정된 ‘보리암전3층석탑’은 키가 1.8m로 작지만 당당한 모습으로 해수관음상 앞에서 금산을 지키고 서 있다.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리고 지붕돌의 처마는 끝으로 갈수록 두꺼워지면서 위로 향해 들려있으며, 상륜부는 보주만 남아 있다. 
남면 당항리 마을회관 앞에 있는 당항리3층석탑은 근처 신흥사(新興寺) 터에 있었는데 폐사지에 마을이 들어서면서 탑을 이곳으로 옮겼다. 경상남도의 문화재자료 제43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탑은 기단이 없어지고 탑신부와 상륜부만 남아있지만 상륜부의 장식이 조금 과해 보인다. 혹 부도탑의 상륜부가 섞여 있지는 않은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1층의 탑신에 새겨진 자물통의 문양이 거꾸로 된 것으로 보아 탑신의 위아래가 뒤바뀐 것으로 보인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73호로 지정된 다정리3층석탑은 이동면 다정리 다천마을 뒤쪽 탑골에 있다. 다천사(茶川寺)에 세웠던 탑으로 절이 용문사에 편입되면서 절터에 홀로 남게 되었다고 한다. 몸돌 2개와 지붕돌 2개, 3개의 보륜(寶輪)만 남아있다. 안내서에는 이 보륜을 자꾸 보주(寶珠)라고 우기고 있다. 바퀴와 구슬은 확연히 차이가 나는데도 말이다. 이 탑들을 만날 때마다 탑을 아끼는 마을 주민들의 애틋함이 탑신에 베여 있음을 느낀다.
보리암전3층석탑은 절도 남아있고 명산인 금산 정상부근에 있어 찾는 사람도 많고 형태도 비교적 온전한 편에 속하지만 나머지 석탑들은 깨어지고, 매몰되고, 뒤집어지고, 뒤섞인 체 수백 년의 세월을 버티고 서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마을회관 앞에서, 저자거리에서, 들판 모퉁이에서 묵묵히 민초들의 애달픈 사연들을 여태껏 다 들어주며 언제나 우리들과 함께 해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남해에서 가장 오래된 탑으로 남해고탑(南海古塔)이라 불리던 삼동 봉화리3층석탑은 사라져 버렸다. 천년의 세월을 지켜오다가 1982년 어느 그믐날 밤 남해를 떠났다. 봉화리3층석탑은 분실한 것이 아니고 도난당한 것이다. 분실은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거나 어디선가 잃어버린 것을 말하지만 도난은 누군가가 몰래 훔쳐간 것을 말한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중에 삼동면 봉화마을 느티나무 아래에 있던 남해고탑(봉화리3층석탑)의 1982년 이전의 사진이 있다면 남해신문에 알려주기를 바란다.

▶다정리3층석탑
▶다정리3층석탑

이명산 석불사의 고려석탑

남해와 지척인 하동 진교면사무소에 있는 진교리3층석탑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29호로 지정된 고려시대 석탑으로 원래 이명산 석불사 옛 절터에 있던 것을 1960년 진교면사무소로 옮겨온 것이다. 
2층 기단에 3층의 탑신을 올린 탑으로 상륜부는 보주형의 돌이 올려져있다. 몸돌에 비해 지붕돌의 높이가 낮아 높고 날렵한 느낌을 주며, 구조가 간략해 단아한 느낌을 준다고 한다.
이명산은 산 이름이 남해의 옛 이름과 똑 같은 전야산, 해양전산, 윤산, 화전산으로 불렸다. 산정에 오르면 비바람에 닳아가는 마애불이 남해에서 왔냐며 반갑게 마중을 나온다. 이 이명산을 넘으면 지금의 하동 북천인 대야천이다. 고려 말 남해현을 폐하고 남해사람들이 대야천부곡으로 이주했던 뼈저린 역사의 현장인 이명산에 있던 석탑이라서 바라보는 심정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진교를 지나는 길에 면사무소에 들러 이 탑을 한 번 만나보기를 바란다.

탑동다층석탑(정지석탑)

불탑은 원래 인도의 무덤으로부터 파생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사리탑은 그대로 무덤의 역할을 하고 있다. 탑이라는 말자체가 무덤을 뜻하는 인도의 언어인 빨리어 ‘투파(thūpa)’를 음역한 탑파(塔婆)를 줄여 탑(塔)이라고 하였다. 붓다의 사리를 봉안한 탑을 만들어 세우다가 차츰 그 속에 사리나 불상, 경전을 안치하여 신앙의 대상으로 삼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렇게 무덤의 용도에서 비롯된 불탑이라 다른 용도의 기념탑으로 건립하지 않았던 것이다. 요즘에 많이 설치되는 전적지의 승전기념탑이나 3.1운동 기념탑, 참전용사기념탑의 형식은 불탑의 이미지와는 완전히 다른 큰 글씨로 명문을 새긴 조형물이다.
탑동석탑은 몸돌의 규격이 위로 갈수록 작아지는 보통의 석탑과는 달리 1, 2, 3층이 28∼31cm로 비슷하며 몸돌과 지붕돌의 재질이 확연히 차이가나는 것으로 볼 때 당초 한 몸으로 조성된 것이 아니고 따로 만든 것을 한데모아 조립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석탑의 조성 년대를 고려시대 말로 추정하는데 팔만대장경의 판각시기와 비슷하다. 물론 관음포대첩도 고려 말의 사건이다. 탑의 외양은 거칠고 투박하지만 탑이 주는 느낌은 언제 봐도 든든하고 의연하다.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삼았고 이 탑 역시 불탑의 모습을 하고 있다.
탑의 확실한 근원이 밝혀져 본명을 찾을 때까지 ‘탑동다층석탑(정지석탑)’이라고 표기하기를 제안한다. 탑동리석탑이라는 말에는 같은 뜻의 동(洞)과 리(里)가 겹치니 동을 취하고 3층, 4층, 5층이 헷갈리니 여러 층이라는 다층(多層)을 선택하고, 정지장군의 아름다운 전설이 담겼으니 괄호 속에 정지석탑이라고 하면 다소 비겁한 느낌은 들지만 나름 합리적인 작명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불탑에서 정지탑으로?

▶하동 진교리3층석탑
▶하동 진교리3층석탑

저물녘 찬바람을 맞으며 돌탑을 바라본다. 어쩌면 대야천부곡의 피난에서 돌아와 남해를 구해준 그 고마움을 잊지 않고자 어느 절에 서 있다가 무너져 흩어진 불탑을 한데모아 복구해서 ‘정지석탑’이라 불렀는지도 모른다.
망덕사의 불탑 이였다는 구전(口傳)과 정지장군의 관음포대첩 전승탑의 전설(傳說)을 함께 절충한 새로운 스토리를 만드는 것은 역사를 왜곡할 수 있는 위험한 발상일까?
고현면 대사리의 전 망덕사지는 팔만대장경 판각과 관련한 유적지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여 1994년 경북대학교박물관, 2000년 경남문화재연구원, 2012년 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의 지표조사와 2015년 극동문화재연구원에서 실시한 시굴조사를 통해 고려시대 건물축대와 기와편들이 확인되어 고려시대의 유적임이 확인된 바 있다. 이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가 하루빨리 이루어져 망덕사지의 비밀이 밝혀지기를 기대한다.
탑의 근원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호국의 정신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는 서로 일맥상통하고 있다. 팔만대장경과 이순신장군의 노량해전과 더불어 정지장군의 관음포대첩을 포괄하는 관음포야말로 진정한 호국의 성지이다. 관음포의 호국정신을 상징하는 랜드마크로 이 탑의 위상이 정립되었으면 좋겠다.
현재 고현면 소재지에서 진행 중인 ‘고현면 권역단위 거점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석탑 주변을 고려대장경 문화마당으로 조성하고 있다. 기존의 탑동공설시장과 도로변의 노후주택을 철거하고 쉼터와 휴게시설, 광장, 조형물, 주차장 등을 설치해 석탑과 함께하는 열린 문화광장을 만드는 이 사업에 대장경과 정지장군의 호국 얼을 제대로 담아내기를 바란다.
정지장군은 하동정씨로 팔만대장경을 판각한 분사남해대장도감의 주역인 정안(鄭晏)의 후손이다. 정안은 남해에서 대장경을 만들었고 정지(鄭地)는 왜구를 무찔러 남해를 구했다. 우리는 결코 그 고마움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제라도 우리 남해군민의 이름으로 ‘정안의 공적비’를 세우고 제대로 된 ‘관음포대첩 승첩기념탑’도 건립해야 되지 않겠는가?

▶탑동다층석탑(정지석탑)
▶탑동다층석탑(정지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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