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이 꼭 일주일 후로 다가왔다. 100주년의 의미가 부여되면서 올해는 자연스레 이날을 맞이하는 마음가짐이 새롭다. 모든 국민이 그럴 것이다. 본지는 적어도 앞으로 일주일간의 시간만큼은 경건하고 숙연한 마음자세로 이날을 맞이해야 함을 자각하고 싶다.
일제에 나라를 강탈 당한 36년간 온갖 수모를 겪어내며 비참한 삶을 이어온 선조들의 모습을 우리는 떠올려보아야 하며, 자주독립국을 세우기 위해 목숨을 내놓고 항거한 애국지사들의 숭고한 뜻을 가슴에 되새겨야 한다. 그날 떨쳐 일어난 선조들의 정신은 4.19와 5.18과 6.10으로 이어졌고 지지난해 겨울의 촛불이 된 것처럼 우리의 피 속에 면면히 도도히 살아 흐르고 있음을 자각하자. 

그 반면 수탈자에게 빌붙어 동족의 가슴에 온갖 못질을 해대고 그들의 앞잡이 노릇을 했던 자들의 못난 삶도, 그러한 삶으로 축적한 부를 대대로 이어오면서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떵떵거리며 사는 그들의 후손들은 어떤 세력인지 또한 구분해보자.   
설천면 문항마을에는 남해 3.1운동 발상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남해 3.1운동의 주도세력이었던 천도교인들은 3.1운동 기념일마다 이 기념비 앞에 모여 참배를 하며 3.1운동 정신을 기려왔다. 지난해에는 이 기념비 앞에서 남양마을까지 행진하면서 그날의 만세운동을 재현하기도 했다. 

100주년인 올해는 남해군이 기념행사를 주도한다. 3월 1일 오전 9시 30분부터 남해실내체육관에서 치를 100주년 기념행사는 군민참여 동영상 상영과 남해 3.1운동 자료전시, 재현극 공연, 남해군민선언문 낭독, 실내체육관에서 유림오거리까지의 만세운동 재현 등 어느 해보다 정성을 다한다. 
올해 기념식에는 600명이 넘는 군민들이 참여할 것으로 보인다. 천도교인들은 이날 남해읍에서의 공식행사에 참여한 뒤 3.1운동 발상 기념비 앞으로 가서 참배를 한다. 옳은 결정이다. 
남해 3.1운동 발상 기념비에는 다음과 같이 남해 3.1운동을 짧게 압축해 기록하고 있다. 명문이다. 
“설천 사람들은 이를 겁내지 않고 이 고을에서 맨 먼저 애국의 횃불을 들었다”라는 대목에 힘주어 읽으며 애국지사들의 이름을 한번이라도 더 불러보는 3월 1일을 맞자. 

“우리가 일제에게 국권을 강탈당하고 그 포학무도한 압정에 시달리던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은 순식간에 거족적인 항일투쟁으로 발전되었다. 그때 총성은 천지를 울렸고 강산은 피로 물들어 갔건만 설천 사람들은 이를 겁내지 않고 이 고을에서 맨 먼저 애국의 횃불을 들었다. 그해 4월 2일 이예모의 선도로 정갑린 정상기 하준천의 권면으로 하준호 정순조 정홍조 정임춘 류찬숙 윤주순 정학순 정익주 정재모 정몽호 이찬덕 윤희도 양재문 류봉승 문환조 정두기 정남섭 등 많은 설천면민이 남양 금음 문항 노상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불렀다. 4월 4일에는 남해읍 장터로 가서 김희조 박경수 강한문 정용교 하상근 원복상 장학순 등과 합세하여 태극기를 들고 천여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른 뒤 군청 경찰관주재소 외 각 기관을 점거하고 자주독립을 외쳤다. 이로 인해 일제 통치는 빛을 잃었고 고을에서는 연달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통분하게도 이 중 23명은 일경에 붙잡혀 가서 1년 내지 3년간의 모진 옥고를 치렀고 마침내 정학순은 순국까지 하였다. 장하다. 그 충절. 조국으로 되찾고자 죽음으로 항거한 그 공로를 우리 어찌 잊으랴. 그로부터 67년 나라의 사업으로 여기에 비를 세우는 뜻은 님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이 강토를 길이 지키자 함이니 다시는 남의 침략을 받지 않도록 우리 모두 굳게 뭉쳐 힘을 기르자” 

1985년 12월 일
문신수가 글을 짓고
이성숙이 글씨를 쓰다
남해군수 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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