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백수의 과로사’가 더러 회자되곤 합니다. 그냥 우스갯소리 같지만, 뚜렷한 계획 없이 퇴직한 후 지나치게 자유를 누리면서 다소 방황하고 있는, 그러면서 무척 바쁜 저 같은 사람에게 일침을 주는 말입니다. 저는 가장 중요한 청소년 시절에도 제법 긴 허송세월을 경험했는데, 역사에 가정이 없음을 깨닫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무척 애먹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이 기간을 되도록 단축시킬 생각입니다. 
저는 1951년 남해군 창선면 율도리에서 고(故) 정금옥·박영여 부부의 1녀5남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저희 누님과 동생들은 엄격하면서 자상한 초등학교 선생님이신 아버지의 평소 언행에서 ‘바르고 떳떳하게, 그리고 베풀며 사는 법’을, 또 어머니로부터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선하게 사는 법’을 액자 가훈 없이도 실천 가훈으로 삼아 성장하면서 어른 공경과 겸손, 합리적 사고, 따뜻한 리더십과 배려 등을 몸에 익힐 수 있었습니다. 저는 영·유아기, 학업, 군복무, 구직까지 생후 약 33.5년짜리 인생 첫 토막을 보내고, 1985년 3월 인천교대(현 경인교육대학교)에 교수로 취직하여 약 33.5년간 근무하고 작년 8월말에 정년퇴직함으로써 둘째 토막을 마감했습니다. 

이제 마지막 셋째 토막에 접어들었는데, 이마저도 33.5년이 되지는 않겠지요. 첫 토막의 기간에 있었던 세 차례의 좌절을 다행히도 모두 극복하고 일어서면서 늘 최선 다음에는 차선(次善)이 있음을 깨달았고, 이는 그 후에도 살아오면서 일희일비(一喜一悲)에 빠져들지 않고 긍정적인 생각으로 중요한 일을 해내는 동력이 되었습니다. 
대부분 그러하겠지만, 저의 경우 둘째 토막은 특히 중요했으며, 그 정점은 국립경인교육대학교 총장 재임 시 인덕에 힘입어 이룬 여러 업적들입니다. 그 첫째가 수천 억 재산을 확보하여 국립대학다운 면모와 대학발전의 기초를 마련한 것입니다. 2009년 3월 총장 임기를 시작할 당시 경인교대는 타 교대의 2배가 넘는 최대 규모와 최고 수준의 대학이었지만, 경기도의 오랜 숙원으로 조성된 경기캠퍼스(안양시 소재)가 경기도 재산이라는 이유로 국립대학 운영 주체인 국가로부터 재정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국가 지원으로 발전해가야 하는 국립대학이 관련법에 가로막혀 그 자격과 기능을 사실상 반쯤 상실해버렸던 셈입니다. 

워낙 엄청난 규모의 재산이라 달리 해결할 방법이 없어 고민과 궁리 끝에 컨트롤타워로 청와대를 내세워 2011년 11월 11일 청와대 면담이 성사되면서 해결의 실마리를 풀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은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이 켜켜이 쌓인 드라마였으며, 몇 번이고 포기하고 싶었는데 ‘정말 최선을 다했는가?’를 자문하면서 일희일비를 삼가고 최선을 다하여 모든 재산을 우리 대학으로 등기 완료하였고, 이에 따라 대학발전의 날갯짓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외부 인사와 대학 구성원이 합심 노력하여 얻은, 그리고 신뢰와 진정성이 이룬 쾌거이며 또 이를 입증한 것도 값진 수확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당시 이를 두고 ‘제2의 개교’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둘째는 교육대학 최초의 박사과정 신설입니다. 1996년 대학원 개원 때부터 16년간 박사과정 설치를 목표로 노력해왔으나, 국회와 정부의 벽에 부닥쳐 번번이 무산되었습니다. 유아교육과 중등교육 박사과정은 이미 오래 전부터 여러 대학에서 운영해왔으나 유독 초등교육 분야의 박사과정 설치는 허용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불합리성과 설치 필요성을 부각시켜 교과부를 설득하고, 당시 불어 닥친 국립대학 구조개혁 압력을 역이용하여 경인교대에 초등교육 전문 박사과정을 전국 최초로 신설하였습니다. 이로써 경인교대가 초등교육 분야의 고급 전문 인력 양성뿐 아니라, 연구대학으로서의 기능과 자격을 갖추어 우리나라 초등교육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더욱 잘 수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음은 대형 기숙사 신축으로 학생 주거복지를 대폭 향상시켰습니다. 경기캠퍼스 재산 문제가 해결됨에 따라 기본적인 교육시설 확충비율이 전국 국립대학 중 거의 최고 수준이 되었으며, 국가재정으로 각종 시설의 신·증축도 가능해졌습니다. 기존 시설과 이에 더한 400명 수용 규모의 기숙사 완공으로 경기캠퍼스 학생 55%가 최고의 주거복지를 누리고 있는데, 수도권 대학에서 이런 유례는 찾을 수 없습니다. 

이밖에도 경인교대가 전국 최초 유일의 해외교원양성대학(GTU사업)으로 지정되어 현재까지도 이를 줄곧 선도하고 있으며, 유수의 해외 대학들과 함께 글로벌 교육인재 양성의 터전을 마련하는 등 실로 많은 업적을 쌓았습니다. 
10여 년 전 총장 임기 시작 시기에 남해신문 인터뷰 기사가 실린 적이 있습니다. 그 때는 앞으로 대학 운영 계획이나 포부, 교육 문제의 해결 등을 질문 받았는데, 이번에는 총장 임기를 마치고 좀 늦긴 하지만 어떤 일들을 어떻게 했는지 보고 드리는 형식이 되다보니 개인의 자랑 같은 내용이 포함될 수밖에 없어 다소 쑥스럽기도 합니다. 
저는 정말 인복이 많아 힘들 때마다 저를 믿어주고 도와주는 주변의 많은 사람들 덕분에 잘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내 삶의 절반을 좋은 직장 경인교대에서 좋은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 왔음은 자긍이요 축복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태어날 당시에도 이장님이 막걸리를 좋아하셨던 덕분(?)에 출생신고가 지연되었고, 결국 정년이 2년 늦춰진 고마움을 표하고자 해도 이미 땅속에 계시니 어쩔 수가 없군요. 

호적이 늦어서인지 결혼도 늦어졌습니다. 서른네 살의 끝 무렵 어느 선생님의 소개로 진주에서 당시 국어교사였던 김현진(현재 아내)씨와 첫 만남이 있은 며칠 뒤, 소개해주신 그 선생님을 따라 방문한 집(처가)에서 원로 교장선생님(장인)을 뵙게 되었고 장모님이 담그신 매실주를 네 주전자까지 흐트러짐 없이 잘 마셨습니다. “자네 왜 결혼 안 하고 있는가?” 장인어른의 이 질문에 “저는 결혼하기 힘든 조건만 골고루 갖추고 있어서 아직 결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날까지 아버지를 존경하면서 떳떳이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자마자 장인께서 “자네 됐네. 아버지 존경하는 사람치고 나쁜 놈 없어” 하시더군요. 그래서 포근한 심정으로 불과 몇 십 초 만에 결혼을 약속하고, 그 27일 후 결혼했습니다.
저희 자녀로는 딸과 아들 한 명씩인데, 딸은 대학 졸업 후 중소업체에 근무하고 있으며, 아들은 연세대 경제학과를 나와 한국수출입은행에 1년 근무하더니 그만두고 고려대 로스쿨을 거쳐 지금은 로펌에서 초보 변호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아버지로부터 전혀 간섭받지 않고 자라서인지 자녀들에게 간섭하기를 꺼리다보니 아직 둘 다 미혼 상태라 때로는 나서야겠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내가 남해에서 태어났음을 부정적으로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 남해는 천혜의 자연환경과 어족자원, 남해 사람들의 근검 의식과 자긍심, 그리고 후덕한 배려와 강한 생활력… 이 모두를 갖춘 보물섬입니다. 가끔 다른 지인들과 함께 남해로 여행을 떠납니다. 수도권에서 제법 멀긴 하지만 남해의 명소 곳곳을 둘러보고 향토 음식을 먹으면서 사람들은 피로도 잊은 채 즐거워합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여러 번 다녀온 사람들도 더러 있는데 오래토록 우리 남해를 칭찬합니다. 

그런데 이제 점점 쓸쓸하고 움츠려든 남해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아이 울음소리와 개구쟁이들 다투는 모습이 사라진 것은 오래 전이고, 남해에서 두 번째 큰 창선초등학교 전교생이 100명도 되지 않습니다. 집 지키고 사시던 독거노인이 돌아가시면 그 집은 빈 채로 방치되다 보니 골목을 다녀 봐도 사람 만나기가 어려운 정도이며, 멀리서 보면 제법 큰 동네 같은데 마을 안에 들어서면 온기가 별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다시 가보고 싶고 떠나고 싶지 않고 그래서 눌러앉아 살고 싶은 남해로 만들어가야 할 책무는 군민과 향우를 포함한 남해사람 모두가 함께 짊어져야 하지 않을까요? 양질의 일자리와 자녀교육 등을 앞세워 젊은이들을 모셔올 유인책은 정말 없는 걸까요? 

흔히 통영을 ‘한국의 나폴리’라고들 하지요. 하지만 우리 모두의 노력으로 남해를 고품격 관광 휴양도시로 꾸미는데 성공한다면, 언젠가는 나폴리를 찾은 많은 사람들이 여기는 ‘유럽의 남해’, ‘이태리의 남해’라고 말하겠지요. 현재 남해에서 성장하고 있는 젊은이들, 또 외지로 진출한 남해 출신 후배들이여! 이제 당신이 남해를 자랑만 할 것이 아니라, 남해가 그대를 자랑하도록 하기 위해 멋있는 꿈과 희망을 만들고 그를 향해 성실히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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