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윤고려대장경판각성지보존회 부회장
김봉윤고려대장경판각성지보존회 부회장

탑동에 있는 석탑의 이름은 무엇인가?

고현면 탑동 5일장이 섰던 시장통 나들목에 커다란 자연석을 기단으로 삼은 무뚝뚝한 돌탑이 서 있다. 탑이 있어 마을의 이름을 탑동이라 부르게 되었지만 정작 자신의 이름은 제대로 찾지 못하고 있다. 근자에 들어 본래의 마을마저 둘로 갈려 이제 탑동에는 탑이 없고 지금은 분동된 중앙마을에 소속되어 있다. 이 탑의 이름으로 ‘정지석탑’, ‘정지장군승첩탑’, ‘탑동리4층석탑’, ‘망덕사지석탑’ 등 의견이 분분하나 흔히 ‘정지석탑’과 ‘탑동리석탑’으로 불리고 있다.
보통 석탑은 ‘월정사8각9층석탑’처럼 이름만 들어도 ‘월정사에 있는 8면으로 된 9층의 돌탑’이라고 그 탑의 내력을 단번에 알 수가 있다. 폐사지의 탑은 옛 절의 이름을 따서 ‘월남사지3층석탑’ 등으로 불리며, 절의 연원을 정확히 알 수가 없으면 ‘안성죽산리5층석탑’과 같이 탑이 있는 동네의 이름을 붙여서 부른다.
그런데 이 탑은 사람의 이름인 ‘정지돌탑’과 자신의 이름을 딴 ‘탑마을 돌탑’이라는 희한한 작명을 하였다. 분명 처음 만들었던 사연이 있었을 터인데 이 탑에 관한 이력은 짧기만 하다.

불탑인가? 전승탑인가?

이 탑에 관한 기록들을 들춰보자.

석탑(石塔)
고을 북쪽 20리 관당 길가에 높이 10여자로 고현 때에 처음 설치하여 그곳에 쌓았다. 탑 아래 1리에 해구가 있으니 일러 관음포라 한다. 고려말 원사 정지장군이 왜적을 섬멸하고 조선 선조 때 통제사 이순신장군이 왜선을 대파했다. 지금도 간혹 모래에서 철극이 나온다.
(縣北二十里 官當路邊 而高十餘尺 盖初設古縣時所築也 塔之下一里許 有一海口 名曰觀音浦 麗末元師鄭地 殲倭干此 本朝 宣廟祖 統制使李舜臣 大破倭船干此 況沙鐵戟 至今或存焉)
-『남해읍지(南海邑誌)』(1899년, 서울대 규장각 소장)

탑의 위치가 남해읍 북쪽으로 20리 거리의 관당로변에 있으며 1리 아래 관음포가 있다고 한다. 20리는 8km이고 1리는 400m다. 남해읍에서 북쪽으로 8km는 탑동일대임이 분명하나 관당로변이라고 한 점과 관음포만이 매립되기 이전인 당시의 바다에서 400m 거리라는 점에서 탑이 다른 곳에서 현 위치로 옮겨온 것으로 보기도 한다.

▶탑동석탑
▶탑동석탑

「남해읍지」의 앞장에 그려진 남해지도를 보면 당시의 도로는 남해읍성에서 심천고개를 넘어 이어삼거리(읍, 선소, 고현방향), 도마고개, 성산삼거리, 가청곡을 거쳐 농공단지에서 관당마을 앞을 지나 고현초등학교 쪽을 향한다. 남해읍성에서 이 길을 따라 8km를 가면 지금의 탑이 나온다.
그리고 고현 때에 쌓았다(古縣時所築也)는 부분의 ‘때 시(時)’자를 ‘고개 치(峙)’자로 읽어 처음에 ‘고현고개(古縣峙)’에 세운 탑을 옮긴 근거로 내세워 『남해군지』와 『고현면지』를 비롯한 근래 대부분의 자료에도 그렇게 설명하고 있다.
급기야 문화재청에서 발간한 『경남·부산·울산 문화유산이야기 여행』에 나오는 「남해사람들이 정지장군의 전승을 기려 전공탑을 쌓다」는 글에서는 ‘고을 북편 20리 관당로변에 있으며, 당초 고현사(古縣寺)에 설축(設築)한 바’라며 절 사(寺)자로 쓰고 있다. 시(時)에서 치(峙)로 가더니 이제 사(寺)로 가버렸다. 당연히 해석은 크게 달라진다. 해(日)가 산(山)을 넘어가 사라지니 어둠속에 절(寺)만 남아있는 격이다.

규장각에 있는 원본문서를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고서속의 남해사료』(2004년, 남해문화원)에 나오는 「남해읍지」에는 시(時)자로 보인다. 이 책의 해설부분을 비롯해 『남해의 얼』(1983년, 남해군)과 『남해도』(1976, 이청기)에서도 시(時)로 읽는다.
규장각에 있는 「남해읍지」는 1899년에 편찬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고서속의 남해사료』에 나오는 「남해읍지」의 끝에 ‘세재을축맹춘(歲在乙丑孟春) 남해군수 이소영(南海郡守 李韶榮)’이라 적혀있어 이 자료는 일제강점기 이소영 군수의 재임기간(1924년 12월∼1927년 3월) 중인 을축년(1925년) 초봄에 필사된 것이 확실해 보인다.

정지장군 승첩석탑(鄭地將軍 勝捷石塔)
정지장군 승첩탑은 현재 고현면 대사리 탑동에 보존되고 있다. 탑신높이 2.25m인 이 석탑은 여말의 해도원수 정지장군이 우왕 9년 서기 1383년 5월 이곳 앞바다인 관음포에서 왜구를 최종적으로 대격파하여 남해를 구제한 은공과 승첩을 축송하고 또한 길이 후세에 빛내기 위해 현인들이 손수 돌을 깎고 다듬어서 만들어 세운 것이다.
-『남해도』(1976, 이청기)

『고려사』 「지리지」 권57에 남해가 ‘공민왕 7년(1358년) 왜에 땅을 잃고 지금의 하동군 북천 지역인 진주의 대야천부곡에 임시로 거처하였다(恭愍王7年 因倭失土 僑寓晉州 任內大也川部曲)’고 나온다. 이렇게 남해를 떠난 지 25년 후인 1383년(고려 우왕 9년) 5월 해도원수 정지장군이 관음포에서 왜구를 대파하고 남해를 구해주어서 그 고마움의 표시로 지역주민들이 돌을 깎아 탑을 세웠다는 말이다. 이청기 선생은 이를 ‘흔모(欣慕)와 보은(報恩)의 구름다리’라고 말하고 있다.

현재 탑 앞에 행정기관의 안내판은 사라지고 두 개의 비석이 나란히 서 있다. 지역주민들이 세운 비석으로 탑의 은공과 보호의 다짐 그리고 그 유래를 새겨 놓았다. 탑 옆에 살고 있는 임종욱(한문학자, 소설가) 선배에게 한시로 된 비문의 번역을 부탁했다.

뜬 구름 같은 천 년 세월 동안(浮雲千載)
들판 탑은 이지러지지 않았네(野塔不騫)
산과 내는 기운을 담고 있고(山川鍾氣)
비와 바람은 하늘을 기웠네(風雨補天)
공덕으로 보면 금빛 부처님을 만들겠고(功造金佛)
자취로 보면 골짜기 신선을 넘어섰네(跡過洞仙)
우리를 기르시고 우리를 지켰으니(樹我墻我)
사랑하면서 길이 보호하리라(愛之護焉)
단기 4281년(1948년) 2월 일(檀紀 四二八一年 二月 日) 
탑동청년단 세우다(塔洞靑年團 立)
- 주민들이 세운 비석 ① (임종욱 번역)

해방이후 지역주민들이 자연석을 다듬어 세운 비로 긴 세월 마을을 지켜온 석탑의 공덕을 기리고 사랑하며 보호할 것이라는 탑동 청년들의 다짐을 새겨 놓았다.

▶1872년 군현지도(석탑부분)
▶1872년 군현지도(석탑부분)

탑의 유래
지금으로부터 1,290년 전 신라 신무왕 5년 전야산군(전야산군은 남해군의 전신) 당시 녹두산 남록에 서당골이 있었으며 현 고현국민학교 뒷산 종지등에 종각이 있었다고 한다. 그 후 신라 제33대 경덕왕(景德王) 때 현 대사에 승전법사(勝銓法師)란 분이 오셔서 망덕사(望德寺)란 절을 창건함과 동시에 현 이 자리에 탑을 세우고 그 때 이 탑은 망덕사의 입구이었다고 한다. 그 후 약 3백년간 존속하다가 망덕사는 화재로 인하여 없어지고 현 탑만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으며 그로 인하여 본 동명을 탑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1971년 5월 20일

▶1872년 군현지도(석탑부분)
▶1872년 군현지도(석탑부분)

- 주민들이 세운 비석 ➁

‘탑의 유래’라고 한글로 새겨진 이 비문을 보면 승전법사가 창건한 망덕사의 불탑이라고 자세한 내력을 밝히고 있다. 신무왕 5년에 서당골과 종각이 있었다고 했는데 신무왕은 신라 45대 왕으로 서기 839년(당시 군명은 남해군이었다.)에 수개월간 잠시 왕좌에 올라 5년은 있을 수 없으며, 신무왕을 신문왕의 오기라고 보아도 신문왕 5년(685년)은 전야산군 설치되기 전이다. 비석을 세운 때(1971년)로부터 1,290년 전도 신문왕 1년(681년)으로 전야산군을 설치하기 9년 전이다. 또 신라 경덕왕은 35대(33대는 성덕왕)로 구전된 것이라 그런지 년대가 전혀 맞지 않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승전법사가 대사에 망덕사를 창건했고 이 탑이 망덕사의 불탑이었다는 이야기다.

남해정지석탑

남해읍지 지도
남해읍지 지도

정지 장군의 관음포대첩을 기념하기 위한 탑
구전에 의하면 정지장군이 관음포에서 왜구를 격파하여 전쟁에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탑으로, 남해지역 주민들이 손수 돌을 깎고 다듬은 것이라고 한다. 기단부가 결실된 채 큰 자연석을 받침 삼아 그 위에 탑신을 올렸다. 탑신은 사각형 4개, 조그만 원형 1개의 몸돌과 지붕돌 5개로 번갈아 층층이 쌓아 올렸다. 탑의 규모는 높이가 2.25m로 탑신은 4개로 하단부 1,2단은 정사각형인 마제석으로 되어 있다. 
남해군청 홈페이지(문화관광〉역사문화체육〉문화재〉문화재자료)

남해군청 홈페이지의 소개에는 꼭대기의 원형 장식을 몸돌로 설명하고 있으며 지붕돌도 4개를 5개로, 탑신의 하단부 1단이 직사각형인데 정사각형으로 잘못 설명하고 있다.
『남해군지』에 나오는 ‘옥개는 4개이고 하단부 1, 2단은 직사각형이고 나머지는 정사각형인 마제석으로 되어 있다’는 옥개석에 대한 설명을  탑신이라 하면서 직사각형을 정사각형으로 바꿔 잘못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재로 줄자로 재어보니 탑신과 옥개석의 1단이 직사각형이고 나머지 2, 3, 4단은 정사각형에 가깝다. 군지와 홈페이지의 설명이 둘 다 잘못되어 있다. 그리고 홈페이지에서는 탑신을, 군지에서는 옥개석을 마제석이라고 하는데 이도 헷갈리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필자는 마제석이 무슨 돌인지 모른다.
정리해보면 ‘탑은 높이가 2.25m로 기단부 없이 큰 자연석 위에 1개의 받침돌을 놓고 탑신부를 올렸다. 몸돌 4개와 지붕돌 4개, 상륜부의 둥근 절구형의 돌 1개를 번갈아 층층이 쌓아 올렸다. 몸돌과 지붕돌 모두 1단은 직사각형이고 나머지는 정사각형이며, 상륜부는 절구형의 아주 특이한 형태로 되어 있다’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기록들을 찬찬히 살펴보면 각종문헌과 행정안내는 ‘전승탑’으로 주민들이 세운 비석은 ‘불탑’으로 몰아가고 있다. 공식적인 자료에는 정지석탑으로 소개하고 있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꼬리를 문다.

석탑과 비석
석탑과 비석

‘장량상마애동정비’와 ‘대당평백제국비’

남해읍 선소리 바닷가에 대형 자연석 바위에 명나라 군대가 만든 임진왜란 승전을 자랑질하는 전승기념비가 있다.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 노량해전이 끝난 지 1년이 다되어가던 1599년 10월에 명나라 유격장군 장량상의 이름으로 동정시(東征詩) 두 편을 새겨 놓아 ‘장량상동정마애비’라 부른다.
일반적으로 옛날에는 전승기념물로 ‘장량상동정마애비’처럼 비문을 새겼으며, 근래에 와서 세우는 전승기념탑에도 명문을 새긴다. 탑동석탑이 승첩기념탑이라면 정지장군이나 관음포대첩에 관한 글자를 새겼을 법 한데 명문이 전혀 없으며, 투박한 모양새이긴 하지만 전형적인 불탑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전승을 기록한 명문이 새겨진 불탑이 하나 있다. 바로 그 유명한 부여 ‘정림사지5층석탑’이다. 이 탑의 1층 탑신에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이라는 명문이 있다. 한 때 이 명문을 내세워 당나라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키고 전승기념으로 이 탑을 건립했다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이 명문은 백제가 항복한 서기 660년 7월에서 겨우 한 달 남짓 지난 660년 8월에 새겼다는 기록이 있어 탑을 만들어 세우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임이 판명 나고 말았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키고 수도 한복판의 백제를 상징하던 정림사탑에 자신의 전공을 새겼다는 것이다. 원래 있던 불탑에 전쟁에 승리한 점령군이 승전을 기념해 명문을 새긴 것을 승첩기념탑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저작권자 © 남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