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윤고려대장경판각성지보존회 부회장
김봉윤고려대장경판각성지보존회 부회장

고려국 분사남해대장도감(高麗國 分司南海大藏都監)

대장경을 만든 국가기구는 ‘고려국 대장도감’과 ‘고려국 분사대장도감’이다. 경판에 그렇게 새겨져 있다. 임시기구이며 일종의 특별팀이다.
고려재조대장경을 ‘강화경판(江華京板)고려대장경’이라고 한다. 몽골의 침입으로 고려의 수도를 개성에서 강화도로 옮겼으며, 대장도감은 왕이 있던 강화도에 설치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고려사』에 ‘왕이 판각을 마치고 서문 밖 대장경판당에서 기념식을 했다’는 기록과 『동문선』의 ‘강화판당에서 대장경을 인쇄하여 가져오라’는 기록, 『조선왕조실록』 태조7년 ‘임금이 한강에서 강화도 선원사로부터 대장경판을 가져오는 것을 보았다’는 기록 등으로 볼 때 대장경은 조선 태조 시까지 강화도에 보관되어 왔고 따라서 당연히 강화도에서 새긴 것으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집중적인 발굴조사를 벌였던 강화 선원사도 판각이 한창인 1245년에 최우가 창건한 사찰이며 강화 판각설은 명확한 근거를 찾을 수 없었다.
남해가 판각지로 부상한 것은 해인사에 보관된 경판에 남해에서 판각했다고 새겨져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부터이다. 그 뒤로 여러 차례 이어진 백련암지와 선원사지, 관당성지 등의 유적조사에서 고려시대 명문기와와 자기, 숫돌 등의 유물이 출토되어 정부와 학계로부터 대장경 판각관련 유적지로 인정받게 되었다.

『종경록(宗鏡錄)』 권제27, 부함(富函), 제17장에 ‘정미세 고려국 분사남해대장도감 개판(丁未歲 高麗國 分司南海大藏都監 開板)’이라고 행정구역 명칭인 ‘남해’의 지명이 새겨져 있다.
남해 지명이 나오는 종경록 27권의 장수는 총 17장이다. 이 17장의 경판 중에 판각한 각수(刻手)의 이름이 새겨진 장은 5장으로 최동(崔同)이 3장(2, 5, 7번째 장), 윤기(尹基)가 2장(15, 16번째 장)을 새겼다. 17번째 장을 포함한 12장에는 각수의 이름이 없다. 17번째 장에는 각수의 이름대신 분사도감의 지명인 ‘남해’를 새겼다. 100권으로 구성된 종경록 전체 중 각수명이 있는 판을 보면 윤기씨가 28장, 최동씨가 12장을 새겼다.

경판은 한 개의 판목에 양면으로 새겼으며 앞면을 새긴 각수가 그 뒷면도 새겼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1-2장이 한판이고 15-16장이 한판일 때 17번째 한 면이 남는다. 한 각수가 순서대로 새긴 것은 아니지만 27권의 17번째 장은 15-16번째 장을 판각한 윤기씨가 새겼을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점쳐 본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81,258판의 양면인 16만 2천여 면 중 오직 한 면에만 지명인 ‘남해’를 새겨 놓았을까?(이 면에는 지명은 새겨놓고 자신의 이름은 남기지 않았다.)

종경록 27권(대장경문화학교 안준영대표 복각)
종경록 27권(대장경문화학교 안준영대표 복각)

종경록 판각 당시 고려정세

종경록은 1246년에서 1248년 사이에 판각되었는데 ‘남해’가 들어있는  27권을 새길 당시인 정미년(丁未年)은 고려 고종 34년인 1247년으로 남해군의 행정명칭이 진주목(晉州牧) 산하의 남해현이었다.

남해에서 종경록을 판각하던 1247년에 몽골의 4차 침략이 있었다.  아모간이 이끈 몽골군은 경기도를 공략한 뒤 충청도를 거쳐 전라도와 경상도로 남하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은 이듬해 초 고려의 사신파견 약속을 받고 몽골황제 구유크칸(정종)이 죽자 철수하였다.
국내정치 상황으로는 최우의 아들로 진각국사 혜심 문하에 출가시켜 산청 단속사와 화순 쌍봉사의 주지로 있던 만종(萬宗)과 만전(萬全)의 무리가 백성들의 재산을 약탈하여 남도에 원성이 들끓자 곡식을 풀고 몇 놈을 잡아 가두어 민심을 수습한 후 만전을 환속시켜 이름을 ‘최항’으로 바꾸고 호부상서에 임명했다.

혜심은 최우가 권력의 정점에 있을 때 편지를 보내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확인할 것이니 부디 노력하시고 〈나를 좋다하는 이는 내 도적이요, 나를 밉다하는 이는 내 스승이다〉며 정 때문에 다소 주제넘게 말했지만 허물하지는 마라’고 했다. 좋은 말만 듣지 말고 싫은 소리를 자주 들으라는 말이다.
이렇게 군부정권의 최고 권력자에게 ‘초심을 잃지 말라며 단디 하는지 확인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던 혜심이 떠난 지 15년이 흘러 종경록 판각이 끝나고 일연이 남해 정림사 주지로 오는 1249년에 30년 동안 집권했던 최우가 죽고 아들 최항이 그 뒤를 잇는다.

전야산과 남해

종경록 27권 판각 당시인 1247년 우리군의 이름이 남해현이었다고 했다. 그동안 남해의 공식 행정명칭은 ‘전야산, 남해, 하남, 해양, 곤남’이었고 별칭으로 ‘전산, 윤산, 화전’으로 불렀으며 요즘은 통합브랜드 명인 ‘보물섬’으로도 부르고 있다.

남해군의 행정명칭으로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신문왕 10년(690년)에 전야산군(轉也山郡)을 설치했다는 기록이다. 
경덕왕 16년(757년)에 행정구역을 재편하면서 남해군으로 개명하고 고려 현종 9년(1018년) 진주목 산하의 남해현으로 개칭되었다가 고려 공민왕 7년(1358년) 왜구가 들끓자 지금의 하동군 북천 지역인 진주의 대야천부곡(大也川部曲)에 임시로 거처를 옮겼다.

그 후 왕조가 바뀌고 조선 태종 4년(1404년) 46년 만에 남해현을 복구하고 1414년(태종 14년) 하동현과 합쳐 하남현(河南縣)으로, 1415년 하동현과 분리되고 금양부곡(金陽部曲)과 합해 해양현(海陽縣), 1417년 다시 독립되어 남해현, 1419년(세종 1년) 곤명과 합하여 곤남군(昆南郡), 1437년 다시 남해현으로, 1895년(고종32년) 남해군으로 바뀌어 1906년 지금의 창선인 흥선현(興善縣)을 병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요약해보면 통일신라 때인 690년부터 67년 동안 전야산군이라 불러오다가 조선 태종과 세종 때 20년간 인근지역과의 통폐합 시기를 제외하곤 757년 개명 후 지금까지 줄곧 1,242년을 남해라 칭했다.

그리고 행정명칭이 아닌 별칭으로 전산(轉山), 윤산(輪山), 화전(花田)으로 불렸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1권 경상도 남해현 편에 ‘군명 전야산, 해양, 전산, 화전, 윤산’이라고 나온다.
이름들을 보면서 좀 특이하다싶은 점은 1415년부터 2년간 잠시 썼던 해양이 튼튼히 뿌리를 내려 603년이 지난 지금도 해양초등학교를 비롯해 널리 사용되고 있다는 것과 비공식 명칭인 화전이 선풍적인 빅히트를 쳤다는 사실이다.
다른 지역과 통합하면서 불린 지명이야 양쪽 지명을 한 글자씩 짜깁기로 했지만 최초의 명칭인 ‘전야산’과 1,262년 전에 지은 ‘남해’ 그리고 별칭들의 의미를 한 번 살펴보자.

남쪽바다, 수레바퀴산, 꽃밭, 보물섬

남해 최초의 행정명칭인 전야산(轉也山)의 정확한 의미는 알 수가 없었다. 전야산에 관한 자료를 뒤져보았지만 짧은 식견으로는 이렇다 할 내용을 찾지 못하고 『남해도』의 증보개정판인 『사향록(이청기, 1984년)』에 ‘전야산이란 행운과 길사(吉事)가 산야에 넘쳐 굴러다닌다는 뜻으로 알려지고 있다’는 구절을 만났지만 머릿속이 확 맑아지지는 않았다.
경덕왕 16년(757년)에 지방통제력 강화를 위해 삼국통일 이전의 옛 지명을 대대적으로 정비하면서 ‘남해’라 했다. 
남쪽바다 한가운데에 있는 섬 이름을 그대로 ‘남쪽바다’라고 지었다. ‘꽃밭’만큼이나 멋진 작명이다.

이번 기회에 잘 알려진 화전에 비해 우리들이 통 모르고 지냈던 남해의 또 다른 별명인 전산과 윤산에 대해서도 알아보자. 윤(輪)은 수레바퀴를 말하며 전(轉) 또한 ‘구르다’의 뜻이다. 전이나 윤이나 다 굴린다는 의미로 불법을 전파하는 것을 ‘법륜을 굴린다(轉法輪)’고 한다. 전산은 전야산에서 왔을 가능성이 크며, 당시 불교국가인 통일신라와 고려에서 남해를 전산, 윤산이라 별칭 했을 가능성도 높아 보인다.(대장경 판각을 마친 후인 1256년에 일연이 그의 책 서문에서 남해를 윤산이라 칭했다.)

화전은 꽃밭을 말한다. 1519년(조선 중종 14년)∼1531년(중종 26년)까지 남해에서 유배생활을 한 자암 김구가 지은 화전별곡과 1530년(중종 25년)에 만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화전이 남해의 군명이라고 적힌 것을 보면 500여 년 전부터 남해를 화전이라 불러온 것 같다.
지금도 화전문화제, 화전도서관을 비롯한 온갖 명칭에 화전을 쓰고 있으며, 최근 남해군의 지역화폐 이름도 화전(花錢)으로 확정해서 발행했다. 남해의 공식 명칭도 아닌 화전이 수백년이 지나도록 이처럼 사랑받는 이유는 자암선생의 시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꽃밭’이라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이름 때문일 것이다. 이제라도 화전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멋진 꽃밭을 일구었으면 좋겠다.

남해의 별명이 고려시대에 ‘윤산’(일연의 『중편조동오위』)이었고 조선시대에 ‘화전’(김구의 『화전별곡』)이었다면 21세기 들어 ‘보물섬’으로 불리고 있다. 보물섬은 2004년 특허청에 등록한 남해군의 통합브랜드로 남해군의 사람들과 자연경관, 산물, 역사문화를 비롯한 유무형의 자산들이 모두 보물이며 이를 잘 가꾸고 다듬어 더욱 풍요롭고 아름다운 남해를 만들겠다는 의지가 담긴 별명이다.
이렇게 이름들의 의미를 새겨보니 남해, 전야산, 전산, 윤산, 화전이라는 이름자체가 그야말로 진짜 보물인 것 같다. 옛 이름들을 우리말로 풀어보면 아주 흥미롭다. ‘수레바퀴산과 꽃밭이 펼쳐진 남쪽바다의 보물섬’이다. 수레바퀴는 구원과 치유를 상징한다. 남해가 품은 보물의 보따리를 풀어 남해를 구원과 치유의 꽃밭이 펼쳐진 남쪽바다의 아름다운 보물섬으로 가꿔나가자.

누가 분사남해대장도감을 주도했을까?

먼저, 정안이다. 정안(鄭晏, 미상 ~ 1251년)의 본관은 하동이고 일암거사(逸庵居士)라 불렸으며, 형부상서 정세유의 손자이며 평장사 정숙첨의 아들로 지문하성사, 참지정사를 역임했다.
고려 무인정권의 집권자 최우의 처남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남해로 와서 대장경의 간행을 주도 했다. 최항이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 것을 비판하다가 백령도에 유배당한 후 대장경판각이 마무리 되는 1251년에 최항에게 처형당했다.

『고려사』 열전에도 정안이 하동과 남해지역에 퇴거하여 대장경 조성에 막대한 경비를 시납하고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고 한다. 정안은 분사대장도감에서 1236년부터 사간판 판각을 진행했으며, 정림사를 창건하고 일연을 주지로 초청하는 등 분사남해대장도감의 판각을 주도한 것으로 보고 있다.
다음으로, 전광재다. 전광재(全光宰, 생몰미상)는 진주목부사와 경상도안찰부사를 역임한 고려후기의 문신으로 분사대장도감판 『남명천화상송증도가사실(南明泉和尙頌證道歌事實)』의 발문을 쓰고 『동국이상국집』 발미에 실무책임자로 이름이 올라있다.

1251년 분사대장도감에서 판각한 『동국이상국집』 발미에 나오는 분사도감의 실무조직은 사(使)-부사(副使)-녹사(錄事)-교감(校勘)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는 경상도안찰사가 겸직한 것으로 보며 최고책임자는 진주목부사인 전광재가 맡았다. 
역시 분사대장도감에서 1248년 판각한 『남명천화상송증도가사실』발문에서 전광재가 경상도안찰부사로 분사도감직을 겸임하고 있음이 확인되기에 전광재가 분사대장도감의 행정책임자를 역임한 것으로 보고 있다.

마지막으로,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스님(一然, 1206년 ~ 1289년)이다. 인각사보각국사비(麟角寺寶覺國師碑)에 ‘정안이 남해의 사재를 희사해 정림사(定林社)라 하고 일연을 주지로 초대했다’고 새겨져 있다. 일연은 1249년 남해 정림사에 와서 1261년 강화 선월사(禪月寺)로 가기까지 12년간 남해 정림사와 길상암(吉祥庵)에 머물면서 대장경 판각을 마무리하고 『중편조동오위(重編曹洞五位)』를 편찬했다. 중편조동오위는 보각국사 비문에 쓰인 100여권의 저서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책이다. 『삼국유사』는 비문의 저서목록에 나오지 않는다.
일연은 그의 저서 『중편조동오위』 서문에 ‘병진년(1256년) 여름 윤산 길상암에 머물면서 썼다’며 길상암의 위치를 윤산이라고 밝히고 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윤산은 남해의 별칭이다.
분사남해대장도감에서 지방세도가인 정안과 진주목부사인 전광재, 불교계의 일연스님을 중심으로 모두가 힘을 모아 판각작업을 진행했을 것이다. 
작금의 분사도감을 복원하는 문제도 이와 다를 바가 조금도 없을 것이다. 민간단체와 행정기관, 불교계가 앞장서고 향우와 군민들이 뜻을 모은다면 잠자고 있는 남해의 큰 보물이 찬란하게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이다.

최첨단 출판인쇄단지 남해

대장경의 판각과정으로 벌목과 치목, 제지, 교정과 편집, 필경, 판각, 인경, 제본 등의 공정을 거쳤을 것으로 보고 있다. 벌목은 벌목부(伐木夫)가, 치목은 목수(木手), 제지는 지장(紙匠), 필경은 필생(筆生), 판각은 각수(刻手)들을 모집하여 교육과 훈련을 통해 작업을 진행했을 것이다.
경판을 만드는데 부품으로 드는 금속판과 조각도와 연장을 만드는 대장간은 야장(冶匠)이, 옻칠은 칠장(漆匠)이 하였을 것이다. 대규모 국책사업을 진행하는 대공사이기에 이에 부가되는 일들도 많았을 것으로 탑을 만들고 성과 축대를 쌓는 석공은 석수(石手)가, 도예는 도공(陶工), 직조는 직조장(織造匠), 염색은 염색장(染色匠), 재봉은 침선장(針線匠) 등 많은 전문가들이 분사남해대장도감으로 몰려들었을 것이다. 세계 최대이며 최고의 출판인쇄단지였던 것이다. 당시 남해에는 일자리도 넘쳤을 것이고 장사도 아마 대박 났을 것이다.

대한민국 분사남해대장도감(大韓民國 分司南海大藏都監)

지금 남해군에서 대장경 판각지 성역화사업을 추진 중에 있으며, 고현면에서도 대장경을 테마로 한 면소재지 거점개발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사업들이 옛날 고려시대의 대장경 판각과정을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물론 과거의 역사도 보여줘야겠지만 살아있는 현재의 모습 그리고 미래의 희망까지 담고 있어야 한다.
위대한 과거의 역사와 전통이 현재의 우리에게 계승되어 일자리가 되고 탐방객들이 몰려와 소득과 연결되는 지역의 전략사업으로 키워나가야 한다.
해인사의 대장경을 오래도록 잘 보관해야 하겠지만 나무로 만든 것이라 영구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대장경을 동판으로도 만들어 놓고 전산화하여 디지털대장경도 있지만 원형을 간직한 목판대장경은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대장경은 만든 이후 꾸준히 보충하여 판각해 왔다. 팔만대장경 자체가 초조대장경이 불타 없어져 다시 만든 재조대장경이며, 판각이 마무리된 1251년 이후에도 분사대장도감에서 많은 경판을 보판했고 훼손되거나 유실되면 다시 만들었다. 일제강점기인 1915년 대장경을 인쇄하면서 없어진 18매와 오탈자를 수정해 다시 새겨서 인쇄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그리고 현재 해인사에 가보면 경판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보물 중의 보물인지라 만져보기는커녕 제대로 볼 수도 없다. 멀찍이 창문 틈새 구멍으로 살짝 보고 해설사의 설명만 왕창 듣고 온다. 해인사의 대장경은 관리 보존해야할 인류의 문화유산이다. 원래의 인쇄용 목판으로서의 기능은 1963부터 1968년까지 5년에 걸쳐 13부를 찍은 것이 마지막이다. 이제는 경배의 대상이자 그림속의 떡인 것이다.

남해분사도감을 복원하여 썩고 벌래먹어 훼손된 경판을 보판하고, 복각을 통해 만져보고 찍어볼 수 있는 살아있는 대장경을 만들어야 한다. 
분사남해대장도감은 대장경 목판본을 인쇄하여 보급하고 유배문학작품, 난중일기를 비롯한 고문서와 주요 목판본을 복각하는 현대판 목판인쇄소의 기능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여기서 『종경록』과 『중편조동오위』를 복각해내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역할을 하는 분사남해대장도감의 부설로 판각전시관, 판각체험관, 판각교육관, 목판인쇄연구소를 운영하고 남해와 인연이 깊은 고려시대 고승인 혜심과 일연을 통한 스타마케팅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첨단시스템을 갖춘 재미있는 판각놀이광장과 판각당시 남해 백성들의 입장에서 보는 대장경 제작을 ‘강제동원-고난과 역경-인식의 변화-자발적 참여-헌신과 희생-대장경 완성’의 과정으로 엮은 대장경 판각스토리공원을 조성해 보는 것은 어떤가?

 

목재문화체험장을 조성하자

요즘 뜨는 핫한 취미활동이 있다. 바로 목공이다. 친환경 자재인 나무로 생활가구와 간단한 인테리어를 직접 하는 목공매니아들도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대장경 판각지에 목공체험장을 만들어 대장경 판각의 연결고리로 삼자. 어차피 판각과정을 추려보면 벌목과 치목, 서각이 주요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게 바로 목공 아닌가?
대장경이라는 어렵고 딱딱한 문제를 재미난 놀이와 실용적인 활동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유도하면 될 것이다. 대장경 판각, 거북선과 판옥선의 건조, 한지 제조가 다 목재로부터 출발한다. 학생들의 자율학기제, 자율학년제 시행에 따른 체험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일반 관광객들도 목공체험을 할 수 있는 ‘목재문화체험장’을 조성하여 대장경을 쉽고 재미있게 만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현재 경남지역의 창원, 김해, 진주, 거제, 거창, 함양, 합천, 하동에서 목재문화체험관이 운영되거나 조성되고 있으며, 인근 전남지역의 광양, 구례, 고흥, 장흥, 화순, 영암, 해남, 목포에서도 목재문화체험관이 운영되고 있고 순천시도 추진 중에 있다. 우리 남해는 대장경과 이순신(거북선, 판옥선)을 테마로 하면 공모사업에 선정될 가능성이 더욱 높을 것이다.

대장경 판각지에서 다시 대장경을 새겨야

그간 대장경 판각의 미스터리를 풀기위해 많은 노력을 기우려 왔지만 아직도 밝혀야할 사연들이 무수하다. 그러나 대장경 판각지로 밝혀진 곳은 남해뿐이다. 남해군이 먼저 조각도의 날을 세우고 대장경이 보관된 합천 해인사와 판각지인 남해를 포괄하고 있는 경상남도에 도차원의 연계사업도 요구해야할 것이다. 또한 경남도립 남해대학에 판각전문학과를 개설해 각수를 교육시켜 목판인쇄소를 운영할 인적자원을 양성해야 할 것이다.

현재 전주 완판본문화관과 함양 이산책판박물관에서는 대장경을 판각하고 있다. 각수를 양성하고 불교계와 지자체의 발주로 경판 판각과 목판본 복원활동을 왕성하게 이어가고 있으며, 그 과정을 전시하고 관람과 체험으로 연계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우리도 하루빨리 ‘분사남해대장도감’을 복원해서 대장경을 판각한 역사의 현장인 남해에서 남해사람들이 참여한 현재의 대장경 그리고 미래의 대장경을 새길 수 있기를 바란다.
800여년 전 대장경을 판각하면서 ‘이제 재상과 문무백관 등과 함께 큰 서원을 발하여 대장경을 만든다(『대장각판군신기고문』)’고 했듯이 지금 다시 우리가 큰 서원을 세워 ‘대한민국 분사남해대장도감’을 복원하자.
 

 

저작권자 © 남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