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윤(고려대장경판각성지보존회 부회장)특별기고

 

나무와 종이로 만든 대장경

산닥나무꽃
산닥나무꽃

팔만대장경은 나무로 만들었다. 그 경판을 인쇄하는 종이도 또한 나무로 만든다. 81,258장의 인쇄용 목판과 교정과 편집, 판각용 경전쓰기, 인쇄와 제본에 드는 수십만 장의 종이를 만들기 위해서 수많은 시간과 노력 그리고 막대한 비용과 재료가 소요되었을 것이다. 고려 고종과 최씨무인정권이 최우선의 국책사업으로 16년 동안 매달려 이룩한 대업적이다. 원래 있던 대장경을 몽골이 불태워 버렸다. 정부는 몽골을 물리치고자 대장경을 다시 만든다고 했다.

그러나 몽골이 물러가기는커녕 고려는 원나라의 속국이 되고 말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고려가 멸망한 것이 아니고 국체를 보전할 수 있었다. 당시 몽골이 침략한 거의 모든 나라는 망했다. 세계 최강의 기마군단에 맞서 30여년을 항쟁했다고 하나 몽골은 작심만하면 일거에 끝장내고도 남았을 터인데 이상하리만큼 고려에 관대했다. 몽골이 고려를 멸망시키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고려의 다이내믹한 외교정책에 대장경의 원력이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몽골사람들은 ‘솔롱고스’(무지개의 나라)라고 부르며 코리아를 좋아한다.

대장경판의 재료인 원목의 수를 추정해보면 10,000본에서 15,000본의 나무를 벌목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산속에서 적당한 나무를 찾고 벌목해 운반하기 위해서는 많은 인원과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대장경을 만들 때 당연히 나무가 많이 들었을 것이고 그 다음으로 많이 필요했던 재료가 바로 종이다. 종이를 만드는 지소(紙所)와 각종 연장과 조각칼, 못, 금속판을 만드는 대장간 등 각종 공방들이 들어섰을 것이다. 종이는 닥나무와 산닥나무로 만들었다.

화방사 산닥나무 자생지

화방사에는 1962년 천연기념물 제152호로 지정된 산닥나무 자생지가 있다. 산닥나무와 닥나무는 어떻게 다를까? 둘 다 종이를 만들지만 아예 다른 종류의 나무다. 닥나무는 뽕나무과의 낙엽활엽 관목으로 산기슭 양지쪽이나 밭둑에 자란다. 나뭇가지를 분지르면 '딱'하고 소리가 나서 닥나무라고 부른다고 하는데 한지의 주원료인 '저(楮,닥나무)'의 음이 닥으로 읽혀지던 시기에 종이가 들어와서 닥나무라 부른다고도 한다. 껍질을 종이재료로 쓰는데 부드럽고 질겨서 한지는 거의 닥나무로 만들었다. 닥나무 열매는 양기부족과 수종의 치료제로 쓰고 어린잎은 먹기도 한다.

산닥나무는 팥꽃나무과의 낙엽활엽 관목으로 계곡과 산록의 나무아래에서 자라며 질기고 질 좋은 종이를 만드는데 사용되었다. 산닥나무의 껍질로 만든 안피지(雁皮紙)는 지질이 매우 얇고 투명하며 질긴 고급종이였다.

산닥나무를 왜저(倭楮)라고 하였는데 『조선왕조실록』 세종 29년(1447년)에 전라, 충청, 경상감사에게 왜저의 종자를 수입하여 널리 심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반계수록』에 우리나라 재래종 닥나무보다는 왜저가 종이의 질을 좋게 하므로 인조 때에 일본으로부터 종묘가 수입되어 남해안 지방에서 재배되었다고 하며, 『문헌비고』에도 남쪽 섬과 해안에 왜저가 많다고 하였다.

현재 화방사 인근 이외의 망운산 일부지역에서도 산닥나무가 자생하고 있으며 인위적인 훼손과 자연 식생경쟁에 밀려 보호관리가 시급한 실정에 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화방사 산닥나무 자생지를 포함한 망운산 계곡지역의 식생을 조사하여 산닥나무 자생지를 찾고 확인된 자생지를 보호구역으로 지정 관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묘포장을 만들어 채종과 육묘로 유전형질이 동일한 후계목을 육성해서 자생지를 확대시켜 나가고 대량재배의 기반을 만들어야 한다. 산닥나무 재배는 생육조건이 까다로워 많은 어려움이 따를 것이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 만큼 희소성이 있어 대장경 판각지와 함께 남해군의 미래자원으로 부상할 가능성도 높다.

화방사의 중요한 임무, 지역(紙役)과 충렬사 수호

조선시대 1686년(조선 숙종 12년)부터 1895년(조선 고종 32년) 사이의 화방사 사찰운영에 관한 문서인 『화방사 완문절목(花芳寺 完文節目)』에 종이공장인 지소(紙所)의 닥나무 가공과 한지 생산에 대한 내용을 주요하게 다루고 있다.

1686년의 기록인 「사중 각항절목(寺中 各項節目)」의 〈대법당(大法堂)〉부분에 ‘신관(新官)의 지장(持莊)으로 정저(淨楮) 15근씩, 혹 1년에 두세 번 교체되면 매번 15근을 지급한다. 매년 참빗을 진상할 때 곡호지(曲好紙) 2장, 백호지(白好紙) 2장을 사대동(寺大同)에서 비급한다’며 신관사또의 부임 선물로 깨끗하게 표백된 닥껍질인 정저 15근을 지급하고 참빗 진상시의 종이는 절의 공금인 대동에서 지급한다는 기록과 ‘지장을 57세까지 하다가 58세면 거론하지 말라’고 하여 종이를 뜨는 장인인 지장의 정년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지대동절목(紙大同節目) 유사(有司) 조목〉에 ‘동지사(冬至使) 진상에 매년 떠내기 때문에 닥 45근을 계급(計給)한다. 춘추향사에 장지 1속, 후백지 6속을 떠내는 닥 15근을 계급한다. 영장(營將)사또 후백지 6속을 떠낼 때 닥 5근을 지급한다. 백급(白給)의 정저(淨楮) 100근을 계급한다. 지소 도배하는 데 매년 단저 15근을 계급한다’며 종이를 만드는 재료인 닥의 공급에 관해 기록하고 있으며, 〈지대동절목(紙大同節目) 장무조(掌務條)〉항에도 ‘피저(皮楮)를 사들이고 거피(去皮)하여 정저를 거두어 올리는 일, 저초(楮草)를 거두는 일은 일일이 기록하여 지장(紙匠)과 더불어 서로 살펴보도록 할 것’ 등 지소의 업무와 운영에 대해 세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각항 진상지 본전에 관한 순영방 등서(各項 進上紙 本錢 巡營房 謄書)」에 ‘장지(壯紙) 매권(每卷) 값 벼 8말, 백지(白紙) 매권 값 벼 4말, 밀지(蜜紙) 매권 값 벼 7말, 명지(名紙) 매권 값 벼 10말, 선자백색지(扇子白色紙) 매권 값 벼 15말, 정초지(淨草紙) 매장(每丈) 값 벼 4말, 설화지(雪花紙) 매권 값 벼 2섬 12말, 청화지(靑花紙) 매권 값 벼 2섬, 옥색지(玉色紙) 매권 값 벼 1섬 10말, 도화지(桃花紙) 매권 값 벼 1섬 9말, 계본지(啓本紙) 매권 값 벼 1섬 5말, 황국지(黃菊紙) 매권 값 벼 1섬 4말, 운람지(雲灠紙) 매권 값 벼 1섬 4말’ 등 31종의 진상지 종류에 따라 정한 값이 기록되어 있다.

이 종이들의 이름을 살펴보면 염색한 색지도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청화지는 달개비꽃으로 파란색을 냈으며 도화지는 홍화로 복숭아꽃 같은 붉은색을 들였고, 황국지는 치자로 노란국화 같은 색을 들였다.

1788년(조선 정조 12년)의 「화방사 지역혁파 완문(花芳寺 紙役革罷 完文)」에 ‘지역은 본디 무겁고 고통스러운 것으로 백성들이 담당하던 것인데 백성의 힘을 들어주기 위하여 스님들에게 담당하게 하였다. 당초에는 용문사에서 전담하도록 하였다가 이로 인하여 패망하게 되자 화방사로 옮겨 시행하게 한 것이나 화방사 또한 지탱하기 어려워 망할 지경에 이르렀다. 충렬사에 전심을 기울려 수호할 수 있도록 지역을 혁파한다’며 화방사의 지역을 면해준다.

우리는 이 완문에서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 수가 있다. 화방사가 노량 충렬사를 수호하는 사찰로 지정되어 충렬사 관리를 맡아 왔다는 것과 당초 용문사에 지소가 설치되었다는 사실이다. 언제부터 충렬사를 관리했는지는 자세히 알 수가 없지만 완문의 「사중 각항절목」에도 서울에 있는 이순신장군의 후손 댁에도 2년마다 문안을 했으며, 문상과 병문안까지 챙겼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1981년 보광전 화재시 함께 불탄 「이충무공비문목판」이 화방사에 있었던 이유가 이제 명확해지는 것이다.

종이공장인 지소(紙所)는 용문사에 있다가 과다한 지역으로 용문사가 망할 지경에 이르자 화방사로 옮겼으며 다시 화방사가 힘들어지자 노량 충렬사 관리에 집중하라며 지역을 면해 준다.

그 뒤로 58년이 지난 1846년(조선 헌종 12년) 『화방사 완문절목』의 「지회절목(紙灰節目)」에 닥껍질을 삶을 때 표백제로 넣는 재의 수급에 관한 규정이 명시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지역은 면했지만 지소는 운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현면 대계마을 지새골, 지시골, 지소(紙所)골

화방사가 있는 고현면 대계마을에 지새골이 있다. 종이공장인 지소가 있어 지소골이라 했는데 주민들은 지시골, 지새골, 지시모, 지심목이라 불러왔다. 조선시대 화방사에서 운영했던 지소가 있던 곳으로 계곡을 끼고 15가구 정도가 살았다고 한다. 찬바람이 탱탱 불던 한낮에 지새골을 찾았다. 수려한 계곡 옆 대숲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조금 오르니 온통 대밭천지로 변한 마을 터에 축대와 담장만이 버티듯이 남아 있었다.

대계마을 지새골 집터
대계마을 지새골 집터

지새골에 살았던 이선우씨(57세, 부산향우)에게 전화하였더니 70년대 초까지 5가구가 살다가 1973∼4년도에 마을이 비게 되었다고 했다. 초등학교 시절 닥나무를 직접 재배하고 집 앞 계곡의 선녀탕과 엉덩이바위에서 놀던 추억을 얘기하며 마을의 안부를 물었다. 종이 뜨는 대발을 만들었던 대나무에 온 마을이 점령당했다는 말에 나직한 한숨을 내뱉었다.

계곡을 살펴보니 닥돌(닥방망이로 두들길 때 닥껍질을 올려놓는 돌)로 씀직한 반듯하고 커다란 돌들이 더러 보였다. 대를 말끔히 베어내고 다시 종이를 만드는 상상을 무심히 흐르는 계곡물에 띄운다. 이렇게 흘러간 생각들이 하나씩 하나씩 바다에서 재회하리라.

지새골을 안내했던 대계마을 김정재씨(57세)에 의하면 지새골 인근에서는 1970년대까지 종이를 만들었다고 했다. 대계마을에는 산닥나무 자생지와 마을 뒤 망운산 자락에 닥나무를 심었던 따빠골(닥밭골)이 있다.

우리의 삶과 함께해온 한지

한지는 우리 삶과 밀접하게 닿아 있었다. 아이가 태어나면 금줄을 치는데 노란 왼 새끼줄에 검은 숯, 빨간 고추, 파란 솔가지와 함께 하얀 한지를 꽂았다. 여기에 오방색이 모두 있다. 백일잔치 때 떡시루에 한지를 깔아 백설기를 찌고, 커서 서당에 가면 한지로 된 책과 공책으로 공부하고 종이연을 만들어 날리고 닥줄로 팽이를 치며 놀았다.

결혼할 때 한지로 사주단지를 써서 보내고, 집을 지으면 도배지, 장판지, 창호지로 쓰고, 지혜(종이로 만든 신발)도 만들고 부채나 함 등 규방가구와 공예품의 재료로도 쓰였다. 군인들의 군모인 전립과 방한복, 갑옷을 만들 때도 한지를 사용했다. 초상이 나면 한지로 염을 하고 수의와 만장도 만들고 저승길 노잣돈인 지전을 넣어준다. 그리고 제사 때마다 한지로 지방을 쓴다. 삶과 죽음의 중요한 순간을 한지와 함께해왔다.

우리 조상들은 한지를 문과 창을 바르는 <창호지>, 그림과 글씨를 쓰는 <화선지>, 등에 바르는 <지등지>, 도배용으로 쓰는 <도배지>, 군인들의 옷 속에 넣는 <갑의지>, 무덤 속 벽에 바르는 <도광지>, 죽은 사람의 이름을 가리는 <면지>, 부채와 연을 만드는 <선지>, 신에게 태워 올리는 <소지>, 염할 때 쓰는 <염습지>, 비올 때 쓰는 기름종이 <유둔지>, 경전을 만드는 광택이 나고 두꺼운 <장경지>, 온돌바닥에 바르는 <장판지> 등 용도와 재료에 따라 다르게 불렀다.

신현세 한지장인
신현세 한지장인

세계최고의 산닥나무 종이 남해지(南海紙)를 만들자

한지는 가볍고 튼튼하며 항균, 통풍, 탈취작용도하며 언제든지 재활용이 가능한 친환경 재료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 단순히 공예품이나 화선지, 창호지가 아닌 옷, 양말, 침구 등 기능성 섬유나 종이가구, 보습과 통풍을 요하는 최고급 포장지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천 년 전의 목적대로인 경전과 중요한 문서의 인쇄용지로 다시 그 진가를 인정받고 있다.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705년에 만들었다. 지금으로부터 1,314년 전으로 천년이 훨씬 넘었다. 요즘 펄프로 만든 종이로는 어림없는 얘기다.

미세 먼지를 막아주는 마스크, 각종 필터, 주방용 기름종이, 식품 포장재, 의료용 반창고, 기저귀, 여성용품, 절연지, 나노섬유, 한지스크린, 바이오센서, 한지 반도체, 인공피부 등 많은 분야에 이미 한지가 사용되고 있다. 한지는 고성능 의류제품 뿐만 아니라 인테리어 분야, 의료분야, 실버분야, 스포츠 분야, 산업용 분야 등 다양한 분야로 개발되고 있으며, 품질과 기능성이 중국의 선지와 일본의 화지보다 우수하다는 것을 인정받아 세계 최고로 평가되고 있다.

지난해 12월에 이탈리아의 국립기록유산보존복원중앙연구소가 오늘날 비행기, 헬리콥터, 낙하산의 기원이 되었다고 하는 다빈치의 연구노트와 드로잉 원고를 묶은 ‘새의 비행에 관한 코덱스(토리노 왕립도서관에 보관)’의 복원에 한지를 쓰기로 했다고 밝혔다. 한지를 선택한 이유가 ‘일반 종이보다 훨씬 질기고 튼튼한 한지의 특성이 고려되었다’고 했다. 500년 전의 연구노트에 인체를 비롯한 비행기, 전차, 잠수함, 증기기관, 로봇 등 3천점의 도형이 그려져 있다. 다빈치는 이 노트에 “어떤 사물을 완전하게 보기를 원한다면 그것을 다른 각도를 통해 보아야 한다. 위에서 그리고 양측면에서 또 뒤집어 보면서 본래의 형태를 보아야 한다”고 관찰하는 방법을 적어 놓았다. 깊이 새겨야 할 말씀이다.

다빈치-새의 비행에 관한 코덱스
다빈치-새의 비행에 관한 코덱스

세계적인 거장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 복원에 한지가 사용된다는 뉴스를 접하고 한지에 관심이 많은 남해군청의 모과장과 함께 복원에 쓰일 한지를 만드는 경남 의령군에 있는 신현세 한지장인을 찾았다. 시골 촌구석에서 세계 최고를 만들어 내는 장인의 집념과 자부심이 오롯하게 전해져 왔다. 유럽과 미국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주요기관에 납품하고 있었다.

장인도 산닥나무로 만든 안피지가 최상급 종이라고 했다. 다만 산닥나무의 생산 경제성이 떨어지니 닥나무에 산닥나무 섬유를 첨가하면 질 좋은 한지를 만들 수 있다고 했다. 전국에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산닥나무 자생지는 오직 남해뿐이다. 산닥나무와 닥나무를 심어 남해종이를 만들어 보자. 한지산업이 장밋빛으로만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대장경판각지성역화사업과 연계해서 제지공장(지소)을 복원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임이 분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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