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민소통위원회 보건복지분과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서상길 위원을 며칠 전 청사신축과 부지검토 토론장에서 처음으로 뵙게 되었다. 남해토박이인 것처럼 남해를 해박하게 잘 알고 자신의 의견을 조심스럽게 내놓는 모습이 보기 좋아 먼저 마음의 문이 열렸다. 그런데 뒤늦게 알고 보니 그는 올해로 귀촌 6년째이고 섬호마을에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그가 남해에 정착하게 된 계기는 5년 전 결혼기념일이었던 6월 22일, 남해 관광을 와서 지인을 만나고 남해에 반한 영향이 컸다.

그는 부산에서 60년 넘게 살면서 많은 기억과 추억 인맥이 있어 쉬이 떠날 수 없었을 텐데도 지인이 소개해준 집이 마음에 들어 점심을 먹던 식당에서 용지 대신 냅킨에다 가계약서를 서둘러 써 버렸다. 남해가 얼마나 좋았으면 14년이나 비워 있던 집을, 앞뒤 재보지도 않고 덜컥 결정을 하게 됐을까. 정말 그와 남해는 궁합이 잘 맞는 곳인 게 확실했다. 어쩌다 부산을 한 번씩 가면 많은 인파, 차량정체, 주차전쟁에 시달리는 것도 싫었지만, 나쁜 공기들을 들이키는 순간 목이 컬컬하고 머리가 띵해 고향인데도 몸과 마음이 편치 않아 빨리 남해로 내려와야 했다. ‘자신을 그렇게 오랫동안 품어주었던 고향이 정말 싫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이곳에 오길 정말 잘했다는 말을 듣고는 백퍼센트 믿어졌다. 부산에도 불 켜진 대교들이 많지만 삼천포 연육교를 만나면 그렇게 행복했다고 한다.

마을에서 제일 넓은 마당을 가진 그는 아름다운 정원을 꾸밀 생각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동안 집안을 꾸미는 데도 5년이나 걸렸고 앞으로도 3년을 계획하고 있으니 마당을 정원으로 조성하는 것은 그것보다 좀 더 시간이 오래 걸릴 것으로 보였다. 아침에 눈만 뜨면 새벽공기가 상쾌하고 아침햇살이 방안까지 들어와 저절로 평화로움을 느끼고 행복해진다는 그의 말에서 많은 대리만족이 되었다. 남해의 품도 좋고 이웃도 좋아 벌써 부산은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그는, 요즘 버킷리스트 중의 하나였던 노래를 가까이하며 살고 있다. 노래로 무대에 서 보는 것을 오래전부터 원했는데 요즘 6학년5반합창단 회원이 되어 매주 수요일 노인복지관 강당에서 2시간 정도 연습을 하고 있다.

사람을 좋아하고 매사 긍정적인 그는 월요일 아침6시에 남해성당을 간다. 성당에는 귀농귀촌한 사람들이 많아 귀농정보를 서로 교환하고 교우로서 정담을 나눈다. 성당에서 레지오라는 심신봉사단체의 단원으로 활동하며 사람들과의 교류를 통해 삶을 향유하고 있다. 현재 그가 살고 있는 섬호마을에도 60대에서 80대 6가구 12명의 교우가 있는데 조화롭게도 절반이 귀촌한 사람이고 나머지는 대대로 남해에서 거주하는 본토박이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다. 매월 한번 씩 교우 집을 순회하면서 모임을 가지며 서로의 정을 나눈다.

조화롭게 세상을 잘 살아가는 그가 귀촌4년차가 됐을 때 마을사람들은 그를 노인 회장으로 추대했다. 처음 노인 회장을 하라고 했을 때 “내가 사람들을 잘 모른다. 농사와 어업도 잘 모른다. 동네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고 거절했는데 직전이장이 총무를 맡아주겠다고 하여 자의반 타의반으로 결국 받아들였다. 사람들에게 얼마나 신뢰를 얻었으면 회장을 못 하겠다는 그를 노인회 회장으로 끝까지 추대를 했을까, 이는 필시 그의 인품과 성품이 마을 주민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어 이방인이라는 단어를 잊게 했을 것이다.

그는 남해로 왔지만 농사를 지을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웃집에 사는 90세 할머니가 혼자 농사를 못 짓겠다고 자신의 밭에 농사를 지어볼 것을 권했다. 농사를 지어 본 일이 한 번도 없는 그는 할머니와 이웃사람들의 도움으로 할머니가 건네준 몇 가지의 콩으로 처음 농사를 지어보았다. 이랑을 20여 곳 만들고 흙덩이를 깨고 콩을 심고 피복 작업을 열심히 하다 보니 그냥 탈이 나서 병원에 보름이나 입원하는 일이 생기고 말았다. 병원에 있는 동안 절실히 깨우친 것은 육체적으로 많이 힘들지 않은 일을 해야겠다는 다짐이었다.

“남해에서 내가 해야 될 것은 농사를 짓는 게 아니고 웰다잉 강의와 모바일 강의로 재능기부를 하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더욱 굳혔다. 그는 현재 한국 웰다잉 강사협의회 소속으로 대안노인회 경남연합회와 천주교 마산교구 웰다잉교육회에서 웰다잉 강사로, (사)한국메멘토모리협회에서 사전의향서 상담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 소셜미디어 전문가협회에 소속되어 모바일 지도사((스마트폰 강사)로, 작년까지 남해문화원에서 컴사동(컴퓨터를 사랑하는 동호회)스마트폰 강사로 활동을 했다.

남해에는 현재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여 효력을 발생시키는 곳이 없다. 이것이 보건소에 지정등록이 되면 누구든지 연명의료결정을 하여 다음을 대비할 수 있다. 요즘 중요하게 대두되는 사전의향서 상담사 자격을 가진 사람은, 현재 남해에는 서상길 강사밖에 없다. “우리는 웰빙도 잘해야 하고 웰다잉도 잘해야 한다. 만약 다음에 인공호흡기를 안 꽂고 죽고 싶다면 미리 사전의향서를 등록 하면 그것이 가능하다. 인공호흡기는 의사가 마음대로 뺄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사전 준비는 본인이 건강할 때 미리 해야 한다. 우리가 익히 아는 연명의료란 임종이 가까워졌을 때 인공호흡기착용을, 항암제 투여를, 혈액투석을, 심폐소생술을 그대로 할 것인지 말 것인지 미리 결정을 해놓는 것”이다. 덧붙여 “연명의료란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에게 하는 심폐소생술 혈액투석 항암제 투여 인공호흡기 착용의 의학적 시술로 치료효과는 없고 임종과정만 연장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웰빙 못지않게 중요한 게 웰다잉이다. 어떻게 하면 잘 죽을 것인가에 대한 물음에 그는 “잘 살아야 잘 죽는다, 마음의 준비 몸의 준비 법률준비가 잘 돼야 한다. 그러니 평소에 건강검진과 건강관리를 철저히 해야 한다”고 답한다. 우리 남해에도 보건소에서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기관으로 지정하면 상담사가 그것을 작성하여 보건복지부에 신고를 하면 성립이 된다. 인근 하동에는 그런 기관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이미 이용하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이라는 단어를 생각하기 싫어한다. 하지만 성찰을 통해 살아있는 동안 삶을 아름답게 보내다,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철저한 준비를 통해 후회 없이 자신의 생을 마무리하는 과정을 생각해야 한다. 삶과 죽음은 어차피 한 쌍이니까.

웰다잉 강의와 스마트폰 사용법을 경로당 같은 곳에서 재능기부하고 싶은 그는, 폰으로 단축번호‧플래시‧시계 알람‧네이버 검색‧전화주고받기‧문자보내기‧사진 찍기‧카카오톡 사용법 등을 알려주면서 폰에 흥미를 가지게 한다. 폰에 대해 알아가는 재미를 느끼는 수강생들을 볼 때마다 작은 일이지만 보람을 느끼며 그 일에 매진하는 그는, 집 뒤 대나무밭 자랑과 후박나무 살리는 이야기에 여념이 없었다.

“집 뒤에는 대나무와 오래된 후박나무 두 그루가 있었는데, 한 그루는 지붕 쪽으로 뻗어있어 장마가 오면 위험해질 수 있었지만 행정의 발빠른 도움으로 그 나무를 아무 탈 없이 벨 수 있었다”며 그때 일을 기분 좋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노인복지관에서 배운 노래 중 우리네 인생을 잘 나타낸 추가열의 ‘소풍 같은 인생’을 즐겨 부르며 제2의 고향인 남해를 접목시킨다. ‘너도 한 번 나도 한 번/누구나 한 번 왔다가는 인생/ 바람 같은 시간이야/멈추지 않는 세월/하루하루 소중하지//미련이야 많겠지만 후회도 많겠지만/어차피 한 번 왔다가는 길/붙잡을 수 없다면/소풍가듯 소풍가듯/웃으며 행복하게 살아야지. 남해에서 보내는 그의 노년은 분명 인생의 황금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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