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김봉윤고려대장경판각성지보존회 부회장
김봉윤고려대장경판각성지보존회 부회장

 

관음포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일까? 이순신 장군, 정지장군, 팔만대장경, 둑방 봄꽃축제, 갈화 새우축제, 해저심층수 등이 있을 것이다. 나는 생뚱맞게도 달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만월이 뜬 깊은 밤 어서리끝과 이내기끝으로, 배방섬과 목섬으로 관음포에 잠긴 달을 보러 달려가기도 했다.

그리고 갈구지(가을곶〈갈화〉)에서 건져 올려 만든 뽈래기 김치와 김 맛을 생각하면 입맛이 확 돌아오곤 한다. 갯벌에서 잡아 튀긴 쏙 맛은 또 어땠는가! 요즘은 그곳에서 키운 새우의 짭조름한 맛에 빈 술병이 는다. 탑동 구이장의 말을 빌리면 관음포만의 해산물에는 관음포해전과 노량해전에서 왜군들이 하도 많이 죽어 갯비린내와는 조금 다른 묘한 비릿함이 섞여 있다고 하는데 혹여 팔만대장경을 만들 때 흘러내린 땀에 젖어 지금도 그런 맛이 베여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섬진강이 흘러내리는 물고기의 산란장이자 모래톱과 갯벌에 조개와 해초가 널린 천혜의 어장이었던 광양만이 항만과 국가산단이 들어서면서 국가경제를 밝히는 불꽃바다로 변모한지 이미 오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음포는 지리산과 백운산에서 흘러온 섬진강의 맑은 물이 바다와 만나고 동해와 서해의 물이 하나가 되어 휘감고 뒹구는 역사의 현장임에는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함이 없다.

▲ 관음포 전경
▲ 관음포 전경

 

대장경, 정지, 이순신

팔만대장경과 정지장군 그리고 이순신장군은 역사의 모퉁이를 돌아 관음포에서 만난다. 관음포는 고려시대 팔만대장경 판각의 현장이며 정지장군이 왜구를 대파한 관음포대첩의 현장이다. 그리고 조선시대 이순신장군이 노량해전에서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한 구국(救國)의 현장이다.

팔만대장경은 몽골의 침입으로 초조대장경이 불타자 1236(고려 고종 23년)년에서 1251(고종 38년)년에 걸쳐 조성되었으며 관음포를 포함한 고현 일대에 분사남해대장도감이 설치되었다. 불력(佛力)으로 몽골을 물리치고자 대장경을 판각한다고 하였다.

대장경을 판각한지 132년이 지난 1383년(고려 우왕 9년) 5월 해도원수(海道元帥) 정지(鄭地)장군이 왜선 120척이 침입해 온다는 연락을 받고 나주와 목포의 전선 47척을 이끌고 남해 관음포로 달려와 화포로 적의 선봉 17척을 완파하였다. 왜군은 2천여 명의 전사자를 내고 퇴각하였다. 남해가 왜구의 등살에 못 이겨 1358년(고려 공민왕 7년) 폐현하고 대야천부곡(지금의 하동 북천)으로 이주한지 25년 만에 이룬 대승이었다.

남해를 구한 셈이다. 그 고마움을 잊지 않고자 탑동의 탑명을 정지석탑이라 지었는지도 모른다. 정지장군은 팔만대장경 판각 당시 분사남해대장도감을 주도했던 하동정씨 정안(鄭晏)의 후손이다.

▲ 순신역전(舜臣力戰, 조선 광해군,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실린 이순신의 순국장면)
▲ 순신역전(舜臣力戰, 조선 광해군,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실린 이순신의 순국장면)

그로부터 215년 후인 1598년(조선 선조 31년) 겨울의 차가운 바다 관음포에서 이순신 장군이 전쟁의 마지막 승리를 거두고 순국했다. 그날은 보름이 나흘 지난 음력 11월 열 아흐렛날이었다. 그 날 밤 관음포의 달도 한산섬의 달처럼 애절한 모습으로 바다에 잠겼으리라. 명나라 장수 등자룡(鄧子龍), 가리포첨사(加里浦僉使〈완도군〉) 이영남(李英男), 낙안군수(樂安郡守) 방덕룡(方德龍), 흥양현감(興陽縣監〈고흥군〉) 고득장(高得蔣) 등이 이순신과 함께 전사하였다.

관세음보살의 고향 남쪽바다 남해

남해읍에서 노량으로 나갈 때 정면에 보이는 삼각으로 우뚝 솟은 산이 녹두산이다. 그 오른쪽에 산성이 있는 곳이 대국산이며 뒷산이 약치곡산이고 그 뒤가 금음산이다. 맞은편에 사학산이 있고 오곡마을에서 도산, 도마마을에 걸쳐있는 산이 삼봉산이다. 이 산 이름들을 보면 예사롭지 않다. 녹두(鹿頭)는 사슴머리고, 사학(四鶴)은 네 마리 학이며, 삼봉(三鳳)은 세 마리 봉황이다.(삼봉산은 세 개의 봉우리가 연꽃모양으로 솟아올라 삼봉산(三峰山)이라 하였으며 또한 세 봉우리가 봉황의 모습이라 하여 삼봉산(三鳳山)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그 위로 구름을 두른 망운산(望雲山)이 있고 북쪽으로는 거북머리인 구두산(龜頭山)이 있다.

그림을 한 번 그려보자. 하늘에 구름이 있고 봉황과 학이 날고, 사슴과 거북이 거닐고 있다. 그 아래 절(대사)이 있고 탑(탑동)이 있고 관음전(관당)이 있으며, 위쪽으로는 참선도량(선원)이 있고 바다에서는 관세음보살(관음포)이 있다. 그대로가 장엄한 불국토가 아닌가!

이곳에 역사 기록 속의 고려시대 강월암과 정림사, 길상암과 봉소헌이 있었으며, 망덕사지(대사), 선원사지(선원), 백련암지(선원), 계사지(남치), 법씨암지(남치), 월곡사지(달실), 전 궁암사지(오곡), 관당성지, 성산성, 대국산성, 성담을등산성(탑동), 정안궁터(도마), 탑동리 다층석탑(정지석탑), 화방사가 있다.

사학산과 녹두산 사이 고현 갈화에서 차면까지의 바다를 관음포라 부른다. 관음은 천수천안으로 세상의 모든 소리를 살펴 대자대비(大慈大悲)로 중생을 구제해 주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뜻한다. 관세음은 산스크리트어 아바로키테슈바라(Avalokiteśvara)로 자재롭게 보는 이, 자재로운 관찰 등의 뜻이며 보살은 보디사트바(bodhisattva)를 음역한 것이다.

관세음보살은 자비를 상징하며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보살로 법화경과 화엄경에 등장한다. 법화경의 관세음보살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을 관음경이라고도 하는데 관세음보살이 온갖 재난으로부터 중생을 구제해 준다고 한다. 화엄경의 입법계품(入法界品)에서 관음보살은 남쪽 바닷가(南海)에 위치한 보타락가(補陀落迦, Potalaka)에 거주하면서 중생을 제도한다. 관세음보살은 머리에 보관을 쓰고 한손에는 버드나무가지나 연꽃을 들고 있고 한손에는 정병을 들고 있으며, 수월관음(水月觀音), 백의관음(白衣觀音), 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 천수관음(千手觀音) 등의 형태로 표현된다.

바다와 달

우리나라에는 3대 관음성지가 있다. 남해 보리암, 강화 보문사, 양양 낙산사로 모두 바다를 보고 있다. 이 중 남해의 관음보살이 최고인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관세음보살의 주석처가 남쪽 바닷가이기 때문이다. 곤경에 처했을 때 관세음보살을 부르면 관세음은 그 소리를 듣고 자비심으로 중생을 구제해 준다. 관세음보살은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는 동시에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는 ‘상구보리 하와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의 보살도를 가장 잘 실천하는 보살이다. 그래서 불교의 많은 보살 중에서도 가장 팬이 많다.

▲ 수월관음도(고려 1323년, 일본 센오쿠하코칸〈泉屋博古館〉 소장)
▲ 수월관음도(고려 1323년, 일본 센오쿠하코칸〈泉屋博古館〉 소장)

『화엄경』 「입법계품」에 선재동자(善財童子)가 구도를 위해 세상을 돌아다니던 중 바다에 접한 아름다운 곳인 보타락가산에서 관음보살을 만나는데 고려시대에 유행한 「수월관음도」는 이 장면을 표현한 것이다. 선재동자는 구도 길에 53명의 스승을 만나는데 그 가운데 28번째 스승이 바로 관음보살이다. 관음보살은 달빛 그윽한 물가의 바위에 한쪽 발을 늘어뜨리고 비스듬히 걸터앉아 있고 옆에는 버들가지가 꽂힌 정병이 놓여있고 발아래에는 향기로운 연꽃과 산호초가 피어 있다. 아래쪽 발밑에 관음보살을 향해 서 있는 꼬마가 선재동자다. 수월관음은 살아서는 재난과 질병을 막아주고 죽어서는 극락정토로 인도해주는 보살이다.

이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에 바다와 달이 나온다. 역시나 관음포에 달과 관련된 지명을 가진 마을이 있다. 고현 방월(訪月)과 달실(月谷〈월곡〉)이 마주보고 있다. 결코 우연일 수가 없을 것이다.

호국(護國)과 달

관음포 일대를 호국과 달을 테마로 개발하여 역사문화의 현장에서 호국정신을 함양하고, 달빛이 드리운 바다에서 심신의 피로를 풀 수 있는 휴식과 감성을 일깨우는 명소로 만들었으면 한다. 팔만대장경을 판각했던 ‘고려국분사남해대장도감’을 복원하여 목판인쇄와 목재문화를 체험하고, 이순신순국공원에 이순신의 정신을 배우고 정지장군의 관음포대첩과 이순신장군의 노량해전을 기리는 이순신학교와 세계해전사 전시·교육장을 만들어 호국정신을 함양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관음포의 정서를 달로 이미지화하여 마케팅에 활용한다면 화려한 조명보다 해수면에 드리운 은은한 달빛이 주는 감흥의 여운이 더 깊고 길게 느껴질 것이다. 초승달과 반달, 보름달 등으로 다양한 캐릭터와 공예품을 만들면 재미있을 것 같다. 잔잔한 바다 속에 달을 품은 관음포가 한눈에 보이는 곳에는 월영대(月影臺)와 만월대(滿月臺)를 짓고, 관음포에 있는 섬 한군데에 수월정(水月亭)을 지어 연잎차라도 한 잔 나누며 선재동자와 관음보살의 스토리를 듣고 싶다.

관음포 이순신순국공원을 리모델링 하자

지금의 순국공원은 너무 엄숙한 분위기다. 전국에 산재한 이순신의 유적지 가운데 유일한 순국지 임을 강조하다보니 전체적으로 납골당 분위기다. 납골당은 추모객 외에는 쉽게 다가설 수 없다. 물론 순국지는 엄숙해야 하지만 죽음을 넘어 부활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 다만 참배와 추모의 공간을 명확하게 구분 짓고 다른 공간에서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이순신을 만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이순신과 함께 신나게 뛰놀 수도 있어야 할 것이다. 당초의 이락사 구역을 추모의 장으로, 기와집이 있는 관음포 광장을 교육의 장으로, 차면마을 쪽의 호국광장을 놀이의 장으로 구분지어 이순신 장군을 추모하고 호국정신을 배우며 재미있게 놀 수 있도록 하면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을까?

그리고 접근로도 재검토해야 한다. 현재 순국공원의 차량 진입구과 출구는 아주 복잡하게 얽혀있다. 진입로가 곡선차로에 설치될 수밖에 없는 위치인데다가 도로 선형이 양쪽 모두 S자로 춤을 추면서 경사진 커브를 돌게 되어있다. 진출입로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차량을 유입시킬 수 있도록 바꾸어야 한다. 노량에서 올 때 호국광장 쪽으로 바로 들어가고 남해읍 방향으로 나갈 때도 바로 본 도로에 올라설 수 있도록 하면 안 될까?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적선을 관음포로 유인해 몰아넣었던 것처럼 공원으로 차량을 유도할 방안을 연구해 보자.

 

구원과 치유, 화해의 관음포

관음포는 신라와 벽제의 접경지로 군사적 요충지였으며 고려와 조선시대 일본과 대규모 충돌이 있었던 국제적인 전쟁터였고 몽골의 침략에 맞서 대장경을 판각한 곳이다. 참혹한 전쟁의 한복판이자 나라와 남해를 살려낸 곳이었다. 적을 포함한 수많은 군사와 백성들이 쓰러졌다. 이제 그 고혼(孤魂)들을 위로하고 서로 화해의 손을 맞잡고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나가야 한다.

영호남의 물이 만나 관음포로 흘러온다. 관음보살이 우리를 재난과 고통에서 구원하고 치유해주듯 관음포를 화합과 상생의 바다로 만들자. 남해는 고립된 섬이 아니라 동서의 바다가 만나는 중간지점에서 세계를 향해 활짝 열려 있다. 정쟁과 이념, 갈등과 대립, 원한과 전쟁을 녹이는 사랑과 평화의 바다 관음포에 달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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