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애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남해군협의회 회장
김정애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남해군협의회 회장
  • 박서정 기자
  • 승인 2019.01.11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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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애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남해군협의회 회장

걸어온 길 후회 없다, 지금 이 자리에 오기까지 그 누구보다 ‘찬란해’

근 34년을 봉사활동 지난 12월 20일 국민훈장 수여 이외에도 대통령 표창

 

남해읍 토촌마을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교사였던 관계로 초등학교 때 산청으로 전학을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학교를 졸업했다. 그 후 중‧고등학교는 남해에서 졸업을 할 수 있었고 결혼을 하여 타 지역에서 몇 년을 살다가 귀향을 하였다. 초음마을에서 몇 년을 살다 1987년 서변마을로 이사를 온 후 지금까지 33년째 살고 있다. 그때 만약 남해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돌아올 수 없는 상황이었다면 고향을 위해 활동할 기회도 없었을 뿐 아니라, 지난 12월 20일 국민훈장을 받는 영광의 날도 없었을 것이다.

건국훈장 다음격인 국민훈장(목련장)을 수상한 김정애 회장의 그동안의 노고가 몇 층탑을 쌓고도 남을 것이라는 예감은 들었지만 이렇게 높을 줄 몰랐다. 33년 10개월 동안 아가페적인 삶을 살아온 김 회장을 만나는 날, 늦었지만 축하를 드리고 싶어 작은 꽃다발 하나를 준비했다. 1년 5개월 동안 매주 인터뷰를 하면서 한 번도 꽃다발을 선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데 이번에는 내 마음이 그렇게 작은 파동을 일으켰다.

소탈하고 꾸밈없고 강한 힘이 느껴지는 그녀는 33년 전 서변마을로 이사를 온 날부터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부녀회 총무를 맡게 되었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어떤 그릇들이 정해지는 것처럼 부녀회 총무를 시작으로 오늘날까지 그녀가 걸어온 길은 오로지 봉사, 한 길이었다. 여장부다운 여장부인 그녀가 사내대장부들과 선의의 경쟁을 치러 멋진 승리를 거두게 된 것은 흔들리지 않는 강한 뚝심과 굳은 신뢰 때문이었다.

 

3남2녀 중 장녀로 태어난 그녀는 책임감과 리더십 또한 강했다. 5형제 중 다른 형제들은 모두 어머니의 기질을 타고 태어났지만 그녀만은 아버지 쪽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남학생과 노는 게 더 좋았고 지금도 남자들 속에서 시간을 보내는 게 더 좋고 편하다고 한다. “남자들은 조금만 잘 이야기해도 포용력이 있어 쉽게 넘어가고 뒤끝이 없는데 여자들은 사람 나름이겠지만 끈적끈적하기도 하고 여튼 개운하지 않은 경우가 더러 있다”고 했다. 화통한 남자들의 성향을 닮아서인지 그들과 자연스런 인간관계가 형성되었고 일과 관련하여 교류할 시간이 많아졌지만 불편한 것은 없었다.

주변에서는 “남자로 태어났으면 큰일을 했을 텐데 여자로 태어나서 지금 이 자리에 머물고 있다”는 말들을 하고 두 아들도 “누군가 밀어줬으면 우리 어머니는 큰 인물이 됐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전하기도 한다. 제일 가까이 있는 자식들이 자신의 어머니를 그렇게 평가하고 인정해주고 있으니 어떤 사람의 말이 더 필요할까 싶다. 하지만 그녀는 정작 바쁘다는 핑계로 자식을 잘 챙겨주지 못한 게 가슴언저리에 남아 있어 볼 때마다 미안해진다. 그동안 바깥 활동이 많아 집안일에 소홀했던 김 회장은 요즘 집안일을 정식으로 해 보면서 그동안 집안일을 잘하지 못하고 지나친 게 너무 많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고 있다.

김 회장이 그동안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알면 알수록 30세 때 필자의 안일했던 모습들이 오버랩 돼왔다. 아이 키우기에만 급급했던 그 시절 잠깐이라도 사회로 눈을 돌려 이웃에게 관심과 사랑을 베풀 줄 몰랐고 그런 생각도 아예 하지 못했다. 모든 것은 담을 그릇이 따로 있듯 그녀는 1997년 1월 1일부터 서변마을 부녀회장을 시작으로 마을 일을 보면서 재활용품 경진대회에서 ‘남해군 최우수상’을 수상하는 업적을 낳았다. 부녀회장으로 있는 동안 부지런히 활동하여 복지회관을 건립하였고 독거노인을 챙기면서 생일잔치도 열어주었고 땀을 줄줄 흘리면서도 꽃길 가꾸기 등 사회봉사를 생활화했다. 요즘은 사회복지사나 요양보호사들이 신경 써야 될 부분이지만 그 당시에는 부녀회에서 부녀회장이 중심이 되어 사각지대를 발굴하고 도움의 손길을 골고루 뻗쳤다. 어느 가정은 화장실에 오물이 가득 차 있었지만 그것을 처리하지 못하고 끙끙될 때 구역질을 참아가며 말끔히 치워주기도 했다.

마을이장은 거의 남자들이 도맡아 하던 시절인 2004년도에 마을 이장에 당선되어 사람을 보살피는 일에 가장 중점을 두고 어르신들의 다정한 심부름꾼이 되었다. 그때 이장으로 출마한 사람은 남자3명과 여자2명이었는데 그들과 당당히 겨뤄 첫 여성이장의 테이프를 끊었다. 2년 후에는 여자로서는 처음으로 남해읍 이장단 협의회장을 3년간 역임하였고 2008년에는 경남에서는 여성 최초로 남해군 이장단협의회 회장에 당선되는 놀라운 성과도 거두었다. 그녀는 남해군정과 마을의 가교 역할을 10년 간 빈틈없이 수행하였고 특히 여성으로서의 위상과 섬세함으로 남긴 업적이 널리 인정돼 그녀 이후로 남해읍의 여성 이장들이 줄줄이 탄생되었다.

그녀는 1998년에는 청소년 지도위원으로 위촉되어 현재 4년째 남해군 청소년 지도협의회 회장을 맡고 있다. 청소년들의 올바른 성장과정을 모니터링해주고 탈선 청소년들의 비행을 선도하고 어려운 환경의 청소년들에게는 도움도 주었다. 또한 남해군 청소년 실행위원회 부회장을 맡으면서 실제로 이웃의 불우한 환경의 중학생을 10년째 돌보고 있다.

사회로 시선을 돌리는 일에 익숙했던 김 회장은 도움이 필요한 곳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위한 일을 멈출 수 없어 2007년부터 2015년 12월까지 전국시민단체연합 남해군지부 사무국장을 역임하였다. 그 일의 연장선상에서 시장경제상인들의 물가안정과 정기적인 친절교육과 상인들의 자긍심을 높일 수 있도록 상인대학 설치를 건의했고, 소포장 등으로 물건 제값받기 등의 캠페인 전개로 재래시장 살리기에 누구보다 앞장섰다. 남해군의 모든 읍면을 순회하면서 읍면 이장단 회의에 참석해 여론을 수렴하고 남해와 여수를 잇는 한려대교 건설에 5만 명의 서명을 받아 국회에 전달하기도 했다. 군민을 위한 일에 많은 열정을 쏟은 그녀는 그 공로를 크게 인정받아 국회의원 표창을 하기도 했다.

오랫동안 사회봉사와 투철한 국가관과 사명감으로 살아온 그녀는 이일 저일을 많이 겸해왔다. 2001년 7월1일자로 제10기를 시작으로 제12기부터 제17기까지 민주평화통일자문위원으로 활동해오다 제18기 협의회장을 맡으면서 통일정책 국민공감사업과 통일안보 역량강화로 통일기반 구축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여 타의 모범이 되고 있다. 민주평화통일자문위원회에서 17년째 몸담고 있는 그녀가 남해민주평통 제13기 때 부회장으로 활동하던 중, 대통령 표창을 수상한 바 있으며, 여성분과위원장 기획운영분과위원장을 역임하면서 빛나는 공을 많이 세웠다. 지난달 20일 서울 용산구 백범 김구기념관 컨벤션홀에서 열린 2018년도 국민훈‧포장수여식에서 받은 국민훈장은 지역사회 통일역량 결집과 사회통합활동에 기여한 공로에 대한 보상이었다.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뀌는 동안 그녀는 한 가정의 어머니 아내 딸 며느리보다 군민을 위해 지역을 위해 올곧은 삶을 살아왔다. 모든 사람을 좋아하기에 사람에 대한 평가는 잘하지 않지만 간혹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하거나 가벼운 사람은 싫어한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을 배척하지 않고 품어주는 대인배다. 덧붙이자면 흑과 백을 확실히 구분하는 성향이지만 간혹 회색도 그대로를 인정하고 되도록 화합의 길로 나아간다는 뜻이다. 그녀가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도 마을을 위해서 많은 봉사를 했듯이 그녀 또한 그 길을 쉬지 않고 걷고 있다. 지금까지 걸어온 삶이 전혀 후회스럽지 않다는 그녀의 참된 말을 듣는 순간 ‘아! 저런 분이구나’로 다시 감동이 되었고, 문을 열고 나가는 필자에게 “대충 써도 된다”는 편안한 말을 던졌을 때는 그 누구보다 찬란하게 잘 쓰고 싶은 욕구가 잔잔히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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