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 / 명상디자인학교 교장
박철 / 명상디자인학교 교장

연말입니다. 보통 이때쯤이면 한 해를 돌아보면서 아쉬웠던 부분을 반성하고 보다 나은 내일을 기약합니다. 또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며 더욱더 새로운 마음을 다지며 가족의 안녕과 건강을 기원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가운데에 가고 오는 것에 대한 회환에 삶의 의미를 부여하며 조용히 내면을 다지는 분들도 있습니다. 소위 나는 누구이며 무엇이냐는 철학적 소견에 자신을 조명하며 넓고 깊게 자아를 관찰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중요한 것은 자기의 마음을 바라보며 그 마음이 정도에서 이탈되지 않도록 객관화하는 것입니다. 나를 객관화한다는 것은 내 생각이나 감정에 동일화되지 않도록 바라보는 것입니다. 감정의 이입은 대체로 과거 경험의 잔재가 현재의 일과 맞물려 일어나는 경우입니다. 특히 고집이 세거나 좀처럼 자신의 관점을 바꾸지 않으려 하는 사람은 새로운 느낌을 받아도 그것을 이미 굳어진 과거 경험을 요지부동의 근거로 삼아버리는 경우입니다, 이러한 사례는 나는 누구이냐는 자아탐구에도 지대하게 영향을 미치게 합니다. 실제로 감정이 일고 화가 났을 때 혹은 기쁜 일이 생겼을 때 그 기분이 나라고 통상적으로 여깁니다만 그 느낌이 끝났을 때 또 다른 기분이 자리한 그때 나는 누구냐는 것입니다. 또한, 과거에 이미 경험한 바가 나를 이루는 일종의 감정 패턴에 익숙해진 경우 나에 대한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기가 더욱 요원해질 수 있습니다. 여기에다 하루에도 수없이 변하는 감정의 소산으로 이 기분도 나요 저 기분도 나라면 나는 도시 주체적 감각을 가진 진정한 나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이며 어디에 있는가? 있기는 하나 어디에 있는가를 꼭 집어 말하기도 어려운 나의 실체를 찾아보는 용기, 어쩌면 이것이 가장 위대한 도전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도전의 지향점을 밖으로 둘 것이 아니라 내면 깊숙한 곳에 정착해있는 나의 실체를 밝히는데 의미를 두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사념 思念(헛된 생각, 망상)에 마음이 예속되어 실체적 자각 自覺에 대한 의미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외형의 허상이냐 내면의 실체이냐를 염두에 두면서 삶의 기준을 잡아가는 것입니다. 이른바 마음이 시키는 것이냐 몸이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냐를 조율하는 지혜입니다. 몸(감정, 생각)에 예속되면 될수록 마음(참나)은 더욱 멀어지고 마음에 의미를 두면 몸을 소홀히 하게 됩니다. 몸이 아프다고 몸에 대한 처방만을 생각하면 가벼운 병증이라도 그리 쉽게 낫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몸은 마음과 연결되어 있기에 마음이 상처를 받으면 그 후유증이 몸으로 나타난다는 현상도 직시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의 관계성을 명확히 해야 만이 나의 실체를 밝히는 작업이 더욱 용이해질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적어도 몸과 마음에 남아 있을 상처(미움, 원망, 오해, 분노, 두려움, 섭섭함)는 깨끗이 씻어버리고 새해를 맞이해보면 어떻겠습니까? 거울을 바라보며 용서와 수용의 신념을 다지는 등의 일련의 체험은 생각과 감정 너머에 있을 나의 실체를 만나는 데도 크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상대방에게 먼저 화해의 전화를 걸거나 편지를 써보는 것도 나를 탐구하는 데 도움 되는 방법입니다. 생각이나 감정으로 맺혀진 아쉬움이나 섭섭함이란 지니고 있으면 있을수록 자신만 더 괴로워질 뿐입니다. 아무리 극단적인 원망이나 미움도 결국 자신이 만들어낸 생각과 감정의 과오인 것을 생각하면 일차적 원인은 자신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러한 것에 익숙하지 않다면 수양(수련, 명상)을 한다거나 가끔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숲길을 걷는다든지 산과 바다를 찾아 마음의 시야를 넓혀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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