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대거, 그가 어느 날 본사를 방문했다. 당당한 어깨, 세상사를 초월한 눈빛, 힘 있는 말투, 너무나도 솔직하게 던지는 언어를 불편한 진실로 받아들이며 나도 모르게 ‘이 사람은 평범한 사람이지만 뭔가 분명 다를 거라’는 느낌이 징의 울림처럼 강하게 안겼다. 그는 그동안 타 신문사에 시를 게재하다가 우연한 기회에 본사에 시를 싣게 되어 인사도 할 겸 잠시 들렸는데 운 좋게 처음으로 대면을 한 것이다.

시를 쓰고 있지만 무명시인이라는 겸손한 그의 말에 마음이 동해 잠깐 대화를 하게 되었다. 무엇으로도 자기를 포장하지 않고 “자신은 중학교 밖에 나오지 못해 가방끈이 짧다, 지금은 막노동 일을 하고 있다, 시상이 떠오를 때면 가끔 시를 끄적거린다” 분명 무거운 말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새털처럼 가볍게 귓속을 파고들었다. 자랑스러울 것도 없는 그 사실을 처음 보는 사람에게 드러낸다는 것은 마음이 순수하지 않으면 쉽지 않은 일이다. 그 옛날 우리 선조들이 힘든 노동을 견디기 위해 노동요를 애창한 것처럼 그도 노동에서 오는 힘듦을 시로 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시의 소재에 대한 질문을 했더니 다양하게 얻는다고 했다. 이 첫 만남은 10월 말경이었지만 올해가 가기 전 꼭 그를 다시 만나 예사롭지 않을 것 같은 그의 삶을 꼼꼼히 채취하고 분해도 해 보고 싶었다.

본연의 일에 바삐 움직이다가 주역 강의에서 여 시인을 또 만났다. 그리고 또 얼마 전에는 문학 강의에서도 만났다. 60대 후반인 여 시인이 인문학에 대한 열정이 누구보다 대단하다는 느낌이 진하게 다가왔다. 그 자리에서 만난 그는 분명 학자 같고 교수 같아 막노동꾼이라고 했던 본인의 말을 억지로 연관 짓고 싶어도 결코 쉽지 않았다. 분명 삶을 살아가는 아름다운 무기를 소지하고 있다는 확신이 차올라 이번에는 놓치면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인터뷰를 하고 싶다는 전화를 드렸다. 예상했던 대로 “내세울 것도 없는데 웬 인터뷰냐”는 반응이 왔지만 잠깐 시간을 내 달라는 부탁을 하여 어려운 만남이 이루어졌다.

기자의 눈은 비슷한가 보다. 그가 2014년 어느 여름 일용직으로 채용되어 송정해수욕장에서 해변청소를 하던 날에도 어느 신문사 기자의 눈에 들어와 이런저런 대화들이 이루어졌고 그 기자는 아무리 봐도 “청소부가 아닌 것 같다, 우주별에서 온 여행자”같다는 말로 첫 대면에서 받은 느낌을 전했다. 그때 주고받았던 내용이 신문의 한 모퉁이에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실렸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비록 가방끈은 짧았지만 그의 인격과 자태 화술이 그 기자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결국 기사화로 연결된 것 같았다.

그는 여덟 살이었을 때 사랑하는 어머니를 잃게 되었다. 그 후 가세가 기울어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진학할 수 없었다. 책 읽는 것을 좋아한 그는 군대에 입대하기 전까지 한국문학전집과 세계문학전집을 두루 섭렵했다. 그는 그 당시 어려운 환경을 이겨내기 위해 “부지런한 꿀벌은 슬퍼할 겨를이 없다”를 자신의 좌우명으로 일찌감치 가슴에 품고 슬픈 현실을 극복해 나갔다. 분명 부지런한 꿀벌은 자신이었을 것이고, 책을 시나브로 읽으면서 어머니의 부재에 대해 고교 진학을 못한 것에 대한 슬픔을 이겨내려고 본인에게 수없이 주문을 걸었을 것이다. 자기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만들어낸 좌우명 속에는 십대의 가슴앓이가 빼곡히 박혀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15년 전 여 시인은 미조에서 10년 동안 멍게양식장을 3~4ha까지 확장하여 개인 사업을 했다. 그런데 무시무시한 태풍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후유증은 무척 컸지만 좌절하지 않고 다시 힘을 냈다. 책에서 습득했던 자양분들이 모두 동원되어 끝까지 나쁜 길로 빠지지 않고 올곧은 삶을 지탱했다. 그때 인문학에서 체득한 정신적 지주가 없었다면 그는 벌써 풀처럼 쓰러져 회복불능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햇빛 한 줄기도 붙들 수 없는 상황에서 사업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고 언젠가 재기할 꿈을 꾸면서 8년 동안 일용직노동자로 살아왔다. 밑바닥 일을 안 해본 것이 없을 정도로 많은 고난을 겪었던 그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신이, 내가 이런 일을 잘 견디는지를 시험하기 위해 그동안 많은 숙제를 냈을 것”이라고 했다. 일반인들이 꺼려하는 묘지 이장 일, 땅속에서 하는 일, 공중에서 하는 일, 물속에서 하는 일 모두를 마다하지 않았던 그의 손은 여물디여물었다. 새로운 일에 도전할 때마다 ‘옛날에는 이보다 더한 일도 했는데’라는 생각으로 못할 게 없다는 생각으로 자신을 단단히 무장했다. “내가 고난을 잘 극복하는 사람임을 알고 또 시험을 하는구나, 그래 잘해보자”며 일일시호일 일일시호월 일일시호연 정신으로 살아갔다. ‘하루가 좋으면 한 달이 좋고 한 달이 좋으면 그 해가 좋을 것이라’는 믿음을 꼭 붙잡고 현실에 적응했다.

현장에서 떠올랐던 시상이 소멸되지 않고 집에 도착할 때까지 남아있으면, 내 시가 되려고 사라지지 않았나보다 또 사라진 시 구절에 대해서는 안타까워하거나 연연해하지 않고 안달하지 않았다. 그가 처음으로 쓴 시는 어머니를 생각하고 쓴 시였다.

어머니 보고 싶습니다/먼-먼 기억 속에 아물거리는 모습/엄마!/엄마라고 부르던 시절/어머니는 저 세상으로 갔습니다/‧‧‧(중략)/남들이 엄마하고 부를 때/엄마 없는 설움에 가슴 아파했고/남들이 엄마 이야기로 즐거워할 때/엄마 없는 서러움에 눈물짓습니다/‧‧‧(중략)/그 시절 당신의 보살핌으로 이렇게 컸습니다/그 시절 당신의 정성으로 이렇게 건강합니다/어머니라고 부를 성년이 된 지금 그래도 제겐/어머니라는 단어가 사무치게 그리움으로 남습니다/‧‧‧(중략)/엄마! 어머니‧‧‧//

오년 전부터 시를 쓰게 된 그는 자신이 사유하는 모든 것이 시가 되고 있었다. 그의 시 ‘망태’는 추모누리에 현재 걸려 있는데 아마도 묘 이장을 한 후 우리네 인생무상을 담은 것 같았다.

평생을 같이 할 망태에 담겨 와서/세월 따라 빛바랜 망태/무얼 그리 담았을꼬!/잘 먹고 잘 살자 탐욕도 담아놓고/‧‧‧(중략)/자손만대 부귀영화 누릴 재물 담아놓고/‧‧‧(중략)/차곡차곡 담았건만 남은 것은 빈 망태/허망한 빈 망태에 떡지 떡지 붙은 업/천겁만겁 무거운 업, 눈꺼풀에 내릴 적엔/말없이 하직하고 모든 인생 갈 적엔/삼베수의 단벌옷에/북망산천 바람 담을/망태 망태 빈 망태!//

헛방이라는 시도 재미있다. 어느 날 산악회 회원들과 차를 타고 가면서 차창 밖으로 내리는 비를 보고 살살 떠오른 풍경에서 낳은 시이다.

사사건건 하는 일 잘 되는 일 없어/식구들 보기도 민망한 처지/모처럼 휴일 날 가족끼리 놀자하면/낚시 약속 있다며 핑계도 좋다/‧‧‧(중략)/오늘은 헛방했지만/‧‧‧(중략)/헛방은 대박의 지름길이라며/모든 경기에도 헛방은 있다/그러다 한 방에 역전되어 이긴다/우리네 인생사 헛방만 있는 게 아니다/그래 대박도 있다/‧‧‧(중략)/헛방, 파이팅//

삶에서 체득된 모든 것들이 체화시로 승화되었기에 시가 모두 현실적이고 꾸밈이 없이 가슴으로 온전히 스미었다.

그에게 통용되는 이름은 세 개다. 태어났을 때는 ‘여길홍’이었고 사업에 실패했을 때는 운을 틔워준다는 ‘여상윤’으로 바꿨고, 시를 쓸 때부터는 ‘여대거’라는 필명을 얻었다. 요즘 지인들은 그가 다시 멍게사업을 하면 도와주겠다고 한다. 새로 시작할 의향이 있다는 그는 그동안 도움을 준 사람들에게 꼭 은혜를 갚을 것이라는 말도 잊지 않는다. 사업을 하기 전 멍게를 애송하는 시 한 편을 꼭 쓰라고 하자 “시가 마음대로 오나요, 접신이 돼야만 내 시가 되지요” 마음을 졸이고 애태운다고 뭐든 되는 게 아니라며 답을 비켜간다. 하지만 그의 표정에는 벌써부터 붉은 멍게꽃을 열렬히 피워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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