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사라는 단어가 매우 생소했던 38년 전 남해농약종묘사와 남산꽃집을 운영하던 김태종 이사는 25명의 회원과 함께 새남해라이온스클럽 창단 멤버가 되었다. 그때 창단 멤버 중 생존해 있는 사람은 김태종 이사와 나이가 몇 살 적은 한 명이 유일하다. 김 이사는 올해 76세로 클럽에서 제일 맏형이지만 여전히 윤리강령을 잘 실천하며 후배들에게 모범이 되고 있다.  
클럽이 형성되던 초창기 회원들은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하고 싶은 순수한 마음도 있었지만 사업을 하거나, 자영업을 하던 사람들이 서로 상부상조하자는 의미를 담고 출발하기도 했다. 그래서 동종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가입을 제한하자는 회칙도 준수되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뜻만 있다면 누구나 회원이 될 수 있지만 그때는 그런 조건들이 통용되고 있었다. 한때 비회원들은 클럽회원들이 모두 잘 살고 특별한 사람들만 있는 곳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지만, 회원들은 생각보다 어려운 삶을 살아온 서민층이었다. 풍족하지 못한 살림을 일으켜보려고 온갖 풍파를 견디며 자식들을 키워온 근검절약의 소유자들이었다. 어려움을 겪어 본 사람만이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의 마음을 더 잘 안다는 동병상련의 정신으로 클럽의 목적인 사랑과 봉사를 실천해왔다.
38년간 이 클럽을 거쳐 간 사람들은 수없이 많다. 그동안 기억에 남는 사람들도 있고 간혹 잊힌 사람도 있지만 성향이 맞지 않다고 탈회를 할 때는 무엇보다 안타까움이 컸다. 그는 자영업을 하면서도 회원의 기본의무인 회의와 봉사활동은 빠지지 않고 참석을 했다. 남해농약종묘상을 30년, 꽃집을 10년 동안 운영하면서도 그것을 제1원칙으로 내세우고 솔선수범하였다. 자식 4명을 훌륭하게 길러낼 수 있었던 고마운 사업체는, 18년 전 함께 일했던 처남에게 넘겨주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잘한 일로 남아있었다. 그는 그때 식물을 다룬 경험 때문인지 지금도 여러 종류의 식물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고 집의 안과 밖을 다양한 식물로 꾸미는 일을 즐거운 소일거리로 삼고 있었다. 집에 화분이 많아진 것은 딸과 처남이 개업할 때 받은 식물이 관리소홀로 시들해지는 것을 볼 수 없어 들고 와 살린 덕분이라고 한다. 
38년간 한결같이 너털웃음 지으며 새남해라이온스클럽에서 재무, 총무, 1‧2‧3부회장, 회장, 지대위원장, 지역부총재직을 모두 잘 수행했지만 제일 높은 봉우리인 지구총재는 여건상 추천을 반려했다. 현재는 이 클럽 회원이자 이사로 활동하면서 한 달에 두 번 정도 회원들과 교류하고 있다. 이외에도 4H클럽에서 남해군연합회부회장, 남해읍연합회장, 전국농업기술자협회 간사를 역임했다. 현재 가락김씨 남해읍 종친회장과 남해군종친회 부회장도 역임하고 있다. 남해산악회 회원으로 32년간 활동하면서 많은 산을 오르기도 한 김 이사는 산처럼 넉넉한 품으로 세상을 대면하며 지금껏 큰소리 한 번 내는 일 없이 무난한 삶을 살아왔다. 어릴 때부터 친구와 싸운 적도 없고 아내와의 다툼도 없이 정분 있게 살아온 그는 항상 좋게 해서 사는 게 좋다는 삶의 이치를 놓치지 않았다. 

지난달 18일 창립 38주년을 기념하는 의미로 37년 동안 자매결연을 맺어온 부산현대라이온스클럽과 함께 남해읍사무소를 시작으로 봉황산 입구까지 환경정화활동을 펼쳐 양 클럽 회원들이 친목과 우의를 다졌다. 11월29일이 창립기념일이지만 일정이 당겨졌던 그날 류영환 회장이 “지금까지 다양한 봉사활동을 펼쳐왔고 올해 38주년을 맞아 새로운 봉사사업도 계획 중에 있다”고 한 것처럼 이제는 재능기부 쪽으로 봉사활동을 전개해 나가야 한다고 했다. “노후를 즐겁게 맞이하고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정신적인 건강을 챙겨주는 것이 우리 클럽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물질로 보답하고 필요한 부분을 채워주는 것도 일순위로 챙겨야 하겠지만 정신이 만족하는 삶도 더욱 필요하기에 클럽 회원들이 자신의 재능을 기꺼이 기부해야 한다” 
그는 일상생활 속에서도 몸에 배인 봉사활동을 잊지 않고 실천하기에 의미 있는 한 마디를 던졌다. “클럽 회원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우리는 몸에 밴 행동을 평소에도 해야 한다. 바깥에서 비쳐지는 모습들은 자기 회비 내서 자기들 잔치하는 것이 아닌가로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는데 뭔가를 한다는 느낌을 보여 주어야 한다. 보여주기 위한 겉치레의 봉사보다 진정성있는 봉사를 통해 받는 측에서 새 힘을 내고 희망을 갖도록 해야 한다” 그는 잘 사는 것은 아니지만 친구들과 식사를 하면 ‘식사비 정도야’ 술을 먹으면 ‘술값 정도야’ 하면서 흔쾌히 계산을 한다. 가진 건 없어도 그런 정신들이 클럽에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생성되기도 했고 그런 기질을 타고 난 것 같기도 했다. 어렵게 살아와서 그런지 화려한 삶을 싫어하고 분수에 맞는 생활을 즐기며 생활한다. 친구들과 몇 명 모여 놀이고스톱을 하며 세상사를 이야기하고 공설운동장을 걷거나 가까운 산을 오르기도 한다. 그라운드골프를 하자는 친구들도 있고 노인대학을 오라는 친구들도 있지만 집에서 식물을 기르고 텃밭을 돌보다보면 한나절이 훌쩍 지나가버려 그런 생각은 할 틈이 없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언제나 따듯한 그는 사치하는 일없이 타인의 불우한 삶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유니세프회원으로 20년 동안 기부활동을 해 오면서 감사장을 받았고 남해군 향토장학회에 적지 않은 금액을 기부했다. 지금도 향토장학회에 매달 약간의 기부를 하면서 삶의 보람을 느끼고 있다. 온화한 성품을 아는 듯 그의 손길만 닿으면 식물은 기사회생을 한다.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고 탈이 나기 전에 미리 예방을 해서이다. 그를 만나러 간 날에는 대문 밖으로 노란 국화 화분을 놓아 두어 삭막한 거리를 생기 있고 운치 있게 했다. 식물을 대한 남다른 안목으로 작년에는 10평도 채 안 되는 텃밭에서 말린 고추 6㎏을 수확하여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도 했다. 
살아오면서 후회스러운 부분이 궁금하여 질문을 했더니 “장사를 하면서 딸들을 세밀히 살피고 어떤 재능이 있는지를 알아내서 길을 터 줘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미안함으로 남아 있다는 부모의 솔직한 심정을 전했다. 첫째 딸이 그 어려운 행정고등고시를 2001년에 합격하여 국토교통부에 근무하고 있고 다른 딸들도 자신의 길을 잘 걷고 있는데도, 부모의 한량없는 사랑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했다. 도덕책보다 더 바른 양심을 가진 그는 남에게 피해가 될까 봐 아침 4시에 셔터 문을 올릴 때마다 마음을 졸이며 조심했다. 그런 마음으로 살아온 그였기에 사람들의 비양심적인 행동을 꼬집기도 했다. “음식을 먹고 컵이나 담배꽁초 이런 것을 개념 없이 길거리에 버리거나 산에서 음식을 먹고 쓰레기를 그대로 두고 오는 일은 없어야 한다. 버리는 사람 따로, 줍는 사람 따로가 되지 않도록 서로를 배려하는 문화가 정착되어야 한다”
오늘도 동갑내기 친구들과 소주 한 잔을 하기로 한 그에게 빨리 오라는 전화가 걸려온다. 후배들을 만나거나, 회의를 마칠 때면 “라이온스클럽 회원이라는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사회에 진심어린 봉사를 해야 하며 회원이라면 누구나 회의에 참석하는 일을 중요시 여기고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말을 잊지 않는다. 38년 동안 특별한 일 없으면 꼬박꼬박 회의에 참석한 그가 당당히 할 수 있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에게 빨리 오라는 전화가 또 걸려온다. 상대를 배려하며 전혀 서두르지 않던 그가 돌아가려는 나에게 분갈이하여 키웠다는 로즈마리 화분 하나를 너털웃음 지으며 안겨준다. 검은 색 플라스틱 화분에 녹색의 잘잘한 잎을 단 화분, 즉석에서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이런 게 아닐까, 흔들면 향기가 난다는 잎을 가만히 만져본다. 은은한 향이 진하게 다가온다. 그가 꿋꿋이 걸어온 길에도 이런 향기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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