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새들이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리’라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몇 마리의 참새들이 천장을 오간다. 마침 인심 좋고 넉넉한 성품을 지닌 주인의 방앗간이라는 것을 아는 듯이 사람을 피하지 않고 안식처로 여기는 듯하다. 참새가 지붕으로도 들어오고 열린 문으로도 들어와 놀고 있으니 심심하지 않고 오히려 좋다는 서상정미소 곽 대표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9년째 정미소 일을 하고 있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2009년, 갑자기 아버지의 건강이 악화되어 방앗간 운영이 어렵다는 소식을 듣고 별 고민 없이 귀향을 했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방앗간 일을 돕기도 했기에 익숙함이 앞선 이유도 있었겠지만 아내(박은경)가 적극 찬성하여 쉽게 내려올 수 있었다. 할아버지 때부터 운영한 방앗간은 이제 햇수로 70여 년을 넘겼다. 그 당시의 모습을 지닌 건물은 여전히 튼튼했지만 세월의 흔적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얼마 전에 교체했다는 두 개의 부품은 새 것이라는 것을 알리듯 은빛으로 도드라져 눈에 띄었고 엊그저께 구입했다는 빗자루 하나도 주변기기와 비교가 되었다. 

정미소가 오래되다보니 기계가 노후화되어 부품들을 교체할 일이 자주 생긴다. 그래서 여유분을 한 개씩 확보해 놓는데 특히 벨트는 정미를 할 때마다 빨리 소모가 되므로 여유분이 많은 편이다. 그의 부모님은 그동안 서상정미소와 떡방앗간을 함께 운영해오다 떡을 하는 손님들이 차츰 줄어 10년 전에는 떡집을 그만두고 고추방앗간으로 용도를 바꿨다. 그도 지금 부모님이 하던 서상정미소와 고추방앗간을 그대로 운영하고 있다. 옛날에는 정미소가 각 마을마다 있었는데 농작물이 줄고 인구도 감소하여 지금은 남상‧이동‧난음‧창선‧서상‧우형마을에만 남아 있다. 
서상정미소는 다른 정미소보다 정미하는 양이 많은 편이다. 읍내 식당으로 쌀을 정기적으로 제공해야 하고 남면‧설천‧고현‧이동‧읍 쪽에서 방아를 찧으러 오고 ‘내 고향 쌀’이라는 상호를 달고 판매도 하기에 방앗간 기계는 자주 돌아간다. 부탁을 잘 거절 못하는 그는 바쁜 중에도 벼를 이곳까지 가져오지 못하는 가정을 직접 방문하여 운반을 해주고 도정을 한 후 다시 방 안까지 배달해준다. 물론 이것은 수고비를 받지 않고 인정으로 베푸는 서비스이다. 할머니 할아버지만 계셔서 못하거나, 젊은 사람들이 있어도 운반수단이 없어 못할 때는 직접 그 일을 도맡아해 주고 있다. 인지상정이 된 어른들은 음료수도 챙겨주고 담은 김치도 주면서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한다. 그럴 때면 그는 “힘이 닿을 때까지 이 일을 귀찮아하지 않고 계속 해 줄 것”이라고 자신과의 약속을 더욱 굳힌다. 
사실 가정용 방아로 집에서 정미도 할 수 있지만 석발이 잘 되지 않아 완벽하게 안 될 때가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집에서 방아를 찧다가 다시 가져와 찧어달라고 한다. 깨끗하게 도정을 하여 상품으로 판매를 하고 싶은 사람도 색채선별기가 있는 서상정미소로 수확한 벼를 꼭 가져온다. 흰쌀에 흑미 녹미 노란 쌀이 섞여 있으면 상품 가치가 떨어지기에 이것을 위해 이곳을 찾게 되고 완성품을 보고 모두 만족을 한다. 
이곳에서 방아를 찧은 사람들은 대체로 밥맛이 좋다고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이곳으로 꼭 다시 온다. 쌀 색깔로 눈대중을 하여 수분조절을 하는 노하우가 있는 덕분이다. 도정을 세 차례 하는 동안 수분이 많으면 기계 조임을 약하게 하고 수분이 적어보이면 조임을 강하게 한다. 이곳으로 가져온 벼는 수분측정기로 먼저 14~15%가 되었는지를 확인하지만 정미를 하는 과정에서도 수분 양을 가늠하고 조절기 사용을 빠뜨리지 않는다. 얼마 전에 고현 차면마을에서 방아를 찧어간 사람이 다른 곳에서 찧었던 것보다 밥맛이 좋아서 다시 왔다고 했을 때는 자부심과 자신감으로 새로운 힘이 생기기도 했다. 사실 정미를 할 때는 모두 기계의 힘으로 한다고 보면 안 된다. 눈대중으로 이렇게 수분조절을 하여 연마기를 통해 나오는 자잘한 쌀을 줄여 주어야 한다.  
그 옛날 아버지가 했던 일에 비해 요즘 하는 방앗간 일들은 많이 쉬워졌음을 회상한다. 지금 모든 기계는 전기로 하지만 원동기와 차를 이용해 방앗간을 돌리던 때도 있었다. 그때의 노동력은 지금의 몇 배였다는 생각으로 모든 일을 불만 없이 해결하고 있다. “아버지는 기계에만 맡기지 말고 스스로 터득하는 도정기술이 필요하다고 누누이 말씀하셨다. 1차 석발기를 통해 이물질을 없애고 2차 원기를 통해 껍질을 벗긴다. 도정을 할 때는 3번의 과정을 거치는데 쌀 색깔을 보고 수분 함량을 가늠할 수 있어야 한다. 습기가 많은 것은 적게 깎아야 하고 습기가 적은 것은 많이 깎아야 한다” 기계를 돌릴 때마다 아버지가 주의를 줬던 내용들을 기억저장고에서 다시 꺼내 실수 없이 정미를 하는 그의 삶은 언제나 보람차다. 

추수철에는 아침6시부터 저녁9시까지 정미를 하는데 한 시간에 40~50가마니 정도를 찧어낸다. 경제적인 여유가 생길 때마다 계약 재배한 벼를 사들여 창고에 보관하는 일도 계속하고 있다. 현재 큰 창고에는 벼 500가마니 정도가 저장돼 있다. 그 해에 재배한 벼는 새 벼가 나올 때까지 모두 판매를 하기에 묵은 쌀을 파는 일은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이 소비자에 대한 예의이고 신뢰를 주는 일이라고 생각하기에 그 부분을 항상 중요시 여긴다.
채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비우는 것도 중요하다는 이치를 아버지로부터 깨달은 그는, 일 년에 한두 번 불우이웃돕기를 한다. 예계마을을 통해 소망의집이나 새남해라이온스클럽 등에 쌀을 전달한다. 보통 10㎏짜리 쌀을 30개에서 50개 정도 하는데 아버지 때부터 그렇게 해오고 있었다. 또 어느 해는 서면마을 22개 부락을 위해 서면사무소에 10㎏짜리 22개를 전달하기도 했다. 쌀을 자발적으로 기부하는 일도 많았지만 식당에서 쌀값을 떼이는 경우도 있었다. 쌀을 외상으로 들이고 아무 말도 없이 이사를 가는 경우가 있어, 적게는 몇 십 만 원에서 많게는 몇 백만 원까지 손해를 본다. 그때는 불우이웃돕기했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독인다. 

어느 날 거래하는 식당에서 쌀이 안 좋다고 전화가 왔다. 똑 같은 날 정미한 20㎏짜리 4개를 갖다 줬는데 2개는 쓰고 아무 말이 없다가 다른 걸 사용하다가 밥맛이 좋지 않다고 하여 그냥 좋게 넘어가는 게 좋겠다는 생각으로 20㎏짜리 중 절반정도 쓴 쌀을 다시 가져오고 20㎏을 새로 교환해 준 적도 있다. 그때 일이 미안했던 식당 사장은 “그 집 쌀이 좋은 거는 세상이 다 알지만 주방에서 밥하는 사람이 세 사람이다 보니 조절을 잘 못해 그런 오해를 하게 되었다. 다음에는 쌀을 오해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그쪽의 불찰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또 어느 식당에서는 손님과 주인이 싸우는 일도 있었다. 밥에 철수세미가 나왔다고 항의를 한 모양이었다. 식당에서 설거지 하는 과정에서 들어갔을 게 뻔한데도 우리에게 전화를 하여 책임추궁을 했다. 이번에는 괜한 누명을 쓸 것 같아 “우리는 그런 수세미를 쓸 일이 없는데 사장님 양심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했으면 한다”고 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그 식당은 폐업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세상사를 그렇게 따지지 않고 아침이면 서상정미소로 출근하는 그는 언제나 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고향에 좋은 형과 동기들 주변 어르신들과 어울려 지내는 공간이 아늑하여 다시 고향을 뜰 생각이 없다. 고향이 좋고 또 좋다는 곽 대표는 부모님이 그랬듯 이웃을 챙기며 서상정미소와 고추방앗간을 씩씩하게 잘 꾸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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