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낮출 때 가장 높아진다.” 
이 말은 의식의 밑바탕에 흐르는 고요함을 만날 수 있을 때 더욱 새로워진다는 뜻입니다. 낮춘다는 것은 나의 욕망이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가라앉히는 것입니다. 이는 지금까지 지녀온 온 생각이나 관점을 낮추거나 내려놓을 때 더 높고 깊은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나를 조금 넓은 차원에서 바라보면 감정이나 욕망은 내 성격의 일부이지 나에게 잠재된 가능성의 나, 본래의 내가 아닙니다. 사실 “나와 감정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고 단언하면 자신은 감정과 동일시된 상태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감정이 하는 대로 따라가다 보면 본래의 나는 사라지고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정이 곧 나라는 인식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기로서의 가치를 높이는 일이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행보에서 참고로 할 수행 덕목이 하나 있습니다. 인도나 티베트 지역에서 행하는 오체투지입니다. 오체투지는 무릎을 땅에 대고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하는 것으로 투지례(投地禮라고도 합니다. 오체는 인체의 다섯 부분을 뜻하는 말로 절할 때 땅에 닿는 머리와 두 팔, 두 다리를 지칭합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을 무한히 낮추면서 자신의 교만이나 거만, 어리석음을 떨치고 참회하는 것입니다. 낮추어야만 한없이 높은 자기를 볼 수 있다는 차원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행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새로 태어나려는 자는 지금까지 묶어왔던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합니다. 감정에 물든 자신을 넘어서야 진정한 자기를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감정을 다스리어 낮출 근거에서 오감(五感)의 작용을 제시합니다. 첫째로 머리로 달구어진 복잡한 생각이나 감정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이른바 감정 어린 사념(思念)과 사념의 사이에 있는 맑고 투명한 청명한 내가 있다는 사실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어느 순간 품었던 잡다한 감정이 사라졌거나 어려운 문제가 해결되고 난 뒤의 기분이 더없이 맑고 편안해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둘째, 바라보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사심 가득한 판단 없이 있는 그대로를 직시할 수 있다면 더욱 밝고 영롱하게 대상을 꿰뚫어 볼 수 있습니다. 셋째, 귀를 열어 청정함을 맞이해 보는 것입니다. 만약 미세한 소리라도 들을 수만 있다면 진리와 지혜가 번득이는 대자연의 소리를 직관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파생하는 감동 애(感動 愛)는 대자연을 향한 사랑의 물결로 가슴에 길이 각인 될 것입니다. 넷째, 코로서 경쾌하게 숨을 쉬어봅니다. 숨이야말로 생명을 기르는 원소입니다. 횡격막이 오르내릴 정도의 들이쉬고 내뱉음을 조율(깊고 그리고 길게)하면서 사랑의 숨결을 키워보십시오. 그러면 숨결이 닿는 심장의 따뜻함은 온몸을 기쁨에 젖어 들게 할 것입니다. 또한 냄새로서 맛을 조절하면 식탐은 몰론 비만과 체중조차도 조율할 수 있는 신념을 다지기도 합니다. 다섯째, 입의 기운으로 말의 의미를 소중히 담아 숙지해 보는 것입니다. 말로서 ‘행복합니다. 혹은 행복하세요,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를 되뇌는 것입니다. 내 말 한마디가 사람은 물론 세상의 성정을 바꿀 위력이 있음을 상기하면서 말입니다. 특히 상대방에게 작은 상처 하나라도 남길 말이라면 아예 삼가는 것이 좋습니다. 이른바 감정이 품고 있는 갖가지 작용(낮춤, 비움, 배려, 긍정, 부정, 분노)에 따라 모든 생명이나 무기물은 물론 물형(物形)조차도 내가 느끼는 대로 반응을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것이 일체 모든 대상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 주지의 사실이라면 낮추는 것이야말로 온 세상을 겸손에 이르게 하는 가장 아름다운 노정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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