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성자(聖者)가 될 수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 이 말을 들려준다면 기분이 어떨까요? 내가 성자가 될 수 있다니, 꿈엔들 그런 일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과연 그런 일이 일어나겠느냐며 반신반의할 것입니다. 
그만큼 성자에 대해서는 보통사람이 할 수 없는 어떤 특별한 존재로서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성자(聖者)는 높은 덕과 지혜로서 대중의 사표가 되어 모든 이로부터 존중을 받는 사람입니다. 
보통 사람은 갖지 못하는 비범함도 갖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성자가 누구든지 될 수 있다는 말에는 조금은 난색을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부닥치는 여러 문제를 더 높은 지혜로서 기준을 잡아주는 누군가의 역할에 기대를 걸곤 합니다. 
이러한 방편에서 성자의 가르침은 생을 바르게 이끌어주는 좋은 길라잡이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성자됨의 요건이란 부단한 자기 성찰을 통하여 모두를 이롭게 해주는 역할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

그렇다면 보통사람이라도 이를 달성하기만 하면 누구든지 성자가 될 수 있다는 이치라면 어떨까요. 오히려 모두가 성자의 반열에 서서 세상을 선도할 수 있도록 지혜를 모으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를테면 모든 이의 마음 안에는 성자가 될 능력이 잠재되어 있다는 낙관적 의미로서 말입니다. 이를 한층 객관화하면 “나도 성자가 될 수 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명경지수(明鏡止水)와 같은 본성에 다가가야 한다. 
이 같은 본성으로 모두가 하나가 되는 기쁨을 엮어낼 수 있다면 이야말로 진정 성자다움이다. 성자는 특별한 사람만이 아니라 보통 사람일지라도 마음을 열기만 하면 누구든지 그 반열에 오를 수 있다. 
마음을 연다는 것은 용서와 수용으로 내면과 외면이 하나로 통하는 길”이라고 밝히면서 말입니다. 이러한 논리라면 사실 그동안 우리는 수많은 성자를 만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바로 우리들의 옆에서 성자만큼이나 높은 의식으로 행하고 있었지만 자기 생각이나 감정에 쫓겨 이를 알지 못하고 지나쳤을 수도 있습니다. 
이미 누군가가 성자가 되어 헌신과 희생으로, 연민의 정으로서 사랑과 자비를 펼치는 한 가운데에서도 말입니다.   
필자 역시 한 성자(聖者)를 만났습니다. 9월의 중순을 잇는 가을도 겨울이라는 고갯길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고 있을 즈음입니다. 버스는 추석 명절인지라 여유 좌석 하나 없이 이미 만원이었습니다. 좌우에 위치한 좌석들에는 승객들로 이미 가득 차 있었고 비좁은 통로마저도 서서 가는 분들로 실내는 매우 혼잡한 상황이었습니다. 
약 한 시간이 지날 무렵 앞쪽에서 서서 가던 서너 명의 여자 승객이 지쳐버린 듯 바닥에 주저앉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때, 처음부터 이들을 지켜보던 할머니가 큰 소리로 좌중을 요란스럽게 울립니다. “아이 구, 젊은 새 악시가 그리 서서 가몬 다리가 되기 아플 낀데,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고, 내 여기 조마니 하고 신문지하고 내줄 테니까 깔고 앉아 가래 이” 하며 그가 가지고 있던 신문지와 포장지하며 비닐봉지를 전부 꺼내어 하나씩 나눠주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의자 옆 손잡이하며 짐 칸 가장자리를 잡았다 놓기를 반복하며 서서 가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할머니의 그 외침이 마치 구원의 메시지처럼 마음속에 깊이 각인되었을 것입니다. 
웬만한 사람 같았으면 다른 사람이야 몇 시간을 서서 가든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치부해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 버스 안에서 만난 승객들은 같은 시간대에 만난 분이지만, 이 버스를 벗어나면 모두 다 헤어질 입장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아픈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하며 헌신하는 성스러운 모습을 연상시키듯 다정다감한 손으로 앉을 거리를 직접 건네주며 좌중의 이목을 집중시킵니다. 
어느 측면에서 보면 할머니의 마음 씀씀이에 대하여, 더 큰 일을 한 성자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이의 마음에 잔잔한 감동을 일으킨 할머니의 선행을 통하여 우리가 늘 보고 듣고만 오던 성자가 특별한 무엇에 의한 것이라는 편견을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작은 선행의 사례이지만 마음을 열었다는 점에서 할머니는 이미 훌륭한 성자(聖者)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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