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우기고 - 백상봉 작가 "앵강만 이름의 비밀"
향우기고 - 백상봉 작가 "앵강만 이름의 비밀"
  • 남해신문
  • 승인 2018.10.1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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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상봉 작가
한국문인협회, 한국pen클럽 회원
저서: <서울로 간 벅시>
<줌손과 깍지손>,
<공자 활을 쏘다>
​​​​​​​<마음은 콩밭>
연락처: 010-8868-9875 
 

 

남해 바래길이 여행자들에게 알려지면서 앵강만의 유래와 뜻을 묻는 이가 있으나 시원한 답글이 없는 것을 보고 내 생각을 정리 해 보려고 한다. 앵강만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개인적 주장이나 전해지는 것을 보면 △일제 강점기에 한자로 고치면서 沿岸(연안)을 뜻한다, △두모개의 드무가 큰항아리를 뜻하여 큰 독 甖(앵)자에서 왔다, △금산의 복골이 꾀꼬리의 고어인 곳고리로 와전 되었다, △산 고개에 꾀꼬리가 많이 살아 이름 지었다는 등의 설이 있지만 모두가 고증이 안 되는 가설이다. 

앵강만은 꾀꼬리 鶯자와 강 江자를 쓴다. 그대로 풀면 꾀꼬리 강이고, 고어로는 곳고리 강이다. 그러나 남해에는 불행이도 곳고리 강이나 꾀꼬리 강은 없다. 꾀꼬리는 한자로 黃鳥(황조), 고어는 곳고리, 곳골이, 굇고리 등으로 알려져 있으며, 어원은 곳골곳골 울기 때문이라는 것과 색깔이 예쁘기 때문에 꽃의 꼴(모양)에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灣(만)이라는 말은 조선시대의 지도에는 없는 비교적 근대에 사용된 말이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에는 앵강만을 무엇으로 불렀을까? 조선시대에는 바다가 쑥 들어간 지역을 津(진)이나 浦(포)로 불렀기에 남해에는 많은 진과 포가 기록으로 남아있다. 
지금 앵강만에 남아있는 이름은 앵강만의 입구에 있는 상주면 쪽의 豆毛浦(두모개), 남면 쪽의 月浦(다릿개), 그리고 중앙에 있는 曲浦(굽은개)가 옛날 이름이며, 그 중에서 대표적인 곳이 곡포이었기에 당연히 만의 이름은 곡포만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곡포의 옛 이름은 굽은개이지만 뒤에 堀江(굴강)을 파고 난 뒤에 이름이 화계로 바뀐다. 화계는 꽃 花자에 시내 溪자를 쓴다. 한자를 풀면 꽃이 피는 시내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화계마을은 마을 뒷동산에 꽃이 많고 앞으로 시내가 흐른다고 하거나, 마을 앞에 목단도가 있어 화계라고 하였다지만 잘못된 풀이라고 생각한다.

꽃 花는 곶이나 곡에서 온 것이며, 시내 溪는 인위적으로 판 굴강을 의미하는 말이다. 따라서 화계는 곶내이며, 곡굴강이나 곶굴강으로 불리게 되었다, 뒤에 곶굴강(곡굴강)을 한자로 옮길 때 곳고리(곳골) 鶯자와 강 江자를 쓰서 앵강만이 된 것이다. 지금은 꾀꼬리 앵자이지만 조선시대 훈몽자회에는 곳고리 앵자로 훈을 달아두었다.
참고로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곡포에 대한 기사를 보면 곡포가 이 지역의 대표적인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조선 성종 19년(1488) 미조항에 성을 쌓는 것을 두고 신하들 간에 의논이 있었다. 어떤 이는 왜적을 방비하기 위해 성을 쌓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어떤 이는 “미조항에 진을 설치하는 것은 현과의 거리가 90리인데 성고개 이북은 사람이 살고 전지도 있지만, 성고개 이남에서 미조항까지 거리가 60리로 이 지역은 숲이라 풀이 많아서 인가가 전혀 없는 곳입니다. 
사람들은 육지에 물이 있는 곳이라 왜선들이 항상 여기에 머물기 때문에 진을 설치하여 막을 수 있다고 하지만 물이 있는 곳은 미조항 뿐만 아니라 여러 골짜기에도 있으니, 사진의 군사들을 나누어 미조항을 방수케 하는 것이 타당 하옵고, 성을 쌓아 적은 군사로 진을 지키다 대적이 몰려오면 큰 패배를 당할 것이 분명하므로 이익이 없고 해로울 뿐입니다”라고 했다.      

조선 중종 5년(1510) 備禦方略(비어방략) 9가지를 경상도 병마사에 내리면서 경상 우도에서는 牛古介(우고개)를 城高介(성고개)에 합하고, 율포는 지세포에 합하여 대변할 것을 명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관방에는 ‘곡포보는 현남 30리에 있으며 석축의 둘레가 960척이며 높이는 11척이다. 
가정 임오년(1522), 조선 중종 17년에 우고개보를 혁파하고 여기에다 옮겼다. 권관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曲浦堡 在顯南三十里 石築周九百六十尺高十一尺 嘉靖壬午革牛古介堡移置于 此設權官戍之). 嘉靖은 明나라 世宗연호다.
조선환여승람의 항포란에서 ‘곡포는 고을 남 40리에 있으며 보 산성이 있다’고 했고, 고적란에는 ‘곡포보성은 돌로 쌓은 둘레가 960척이며 높이는 11척’이라고 했다. 
이 기록으로 보아 곡포는 평산현의 후방 방어진인 우고개를 혁파하여 성고개보로 옮길 적에 해안에 접해있는 곳을 곡포로 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곡포는 해안선이 짧고 배를 정박할 공간이 좁아 인위적으로 掘江을 파서 배를 정박하였다. 굴강은 창선의 적량, 읍의 선소 등지에도 흔적이 남아있다. 이 같은 기록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곡포가 지역의 중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전남의 강진만은 康津(강진), 옥포만은 玉浦(옥포), 창선의 동대만은 東大里(동한재) 처럼 육지에 있는 중심지역의 이름을 따는 것이 일반적이며 색다른 이름을 붙인 곳은 흔치 않다. 따라서 앵강만의 본 이름은 곡포만이며 화계로 바뀌면서 앵강만이 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 고지도에 표기된 해안 마을을 나타내는 글자는 津, 浦, 串, 梁, 項, 등이 있다.
 진(津)은 일반적으로 나룻배를 대는 곳이지만 기초행정 단위의 큰 나루를 말하며, 포(浦)는 조수가 드나드는 곳으로 동네 규모 크기의 나루를 말한다. 곶(串)은 땅이 바다 쪽으로 길게 나간 곳을 말하며, 량(梁)은 곶처럼 땅이 바다로 나갔지만 비교적 둥근 지역으로 어촌이나 군사기지로 적당한 구역이며, 항(項)은 목이라 하며 물살이 빠른 해협을 말한다. 만(灣)은 곶과 반대로 육지로 쑥 들어간 곳을 말하며 조선시대 지도에는 없는 명칭이다.

지금까지 앵강만의 명칭과 유래에 대하여 살펴보았지만 미천한 지식이라 고향에 누가 될까 걱정이 된다. 하지만 이것이 계기가 되어 많은 후학들의 연구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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