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몰 비어 파티'가 오는 15()~21() 일주일간 독일마을 광장에서 소규모로 개최된다. 이에 정동양, 이정희 부부의 입을 빌려 축제 이외의 그동안 전하지 못했던 독일마을의 속깊은 이야기를 들어보자>
 

축제 준비가 한창이던 10월 초, 독일마을의 베를린 성을 찾았다. 형형색색의 꽃과 나무가 심어져 있는 정원을 지나 1층 카페로 들어가니 베를린 성의 주인 이정희, 정동양 부부가 맞아줬다.

독일마을 주민 대표 정동양 박사
파독 간호사 이정희 씨

 

독일로 가다

경남 사천이 고향인 정동양 씨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독일 가는 꿈을 꿨다. 625전쟁을 겪은 후 그의 아버지는 독일로부터 원조로 받은 위장약을 먹고 아픈 것이 나았다. 그 후 아버지는 독일 약은 명약이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정 씨는 독일에 대한 동경이 생겼고 그길로 24세에 홀로 독일로 갔다. 그 후 베를린 공대 토목공학과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정희 씨는 간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5년도 독일 베를린에 간호사로 파독됐다. 1976년이 마지막으로 간호사를 파독한 해니 늦게 파견됨 셈이다. 이정희 씨는 독일서 유학하던 정 씨를 만났고 두 사람은 결혼 후 약 20여 년을 독일에서 살았다.

 

독일 생활은・・・

다수의 교포들이 입을 모아하는 얘기지만 이정희 씨도 음식문화에 적응하는 것이 힘들었다. 병원에서 일하며 하루 한 끼는 집에서 한식을 먹었는데 주로 된장찌개를 끓여먹었다. 그랬더니 독일인들이 집 청소를 안 해서 나는 냄새라며 오해하기 일쑤였다.

한편 독일 여성들은 담배를 폈고 때때로 담배를 피느라 환자의 벨 소리를 놓쳤다. 한국간호사들은 흡연자가 거의 없어 벨소리를 들으면 즉시 환자에게 달려가서 일을 처리했다. 그러니 나중에는 동료가 아휴, 그만 좀 가라고 했다며 웃었다.

한국인들은 그렇게 일했다. 무시도 당했지만 성실하게 일하니 시간이 지나고 대화도 통해서 이들을 좋아 해줬다. 전에는 알지도 못했던 동양의 작은 나라, 한국에서 온 이들을 인정해주고 감사해했다. 차별 없이 대해준 것이 감사해 그토록 독일을 본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표적(表迹)을 세우다

독일의 교육은 대학까지 무료이며 세금으로 운영된다, 정 씨는 그 세금을 파독 광원, 간호사가 내기 때문에 그분들 덕에 독일에서 공부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신문에서 종종 이웃하며 지내던 광원, 간호사분들이 죽거나 다친 기사를 많이 접했다. 그는 한국으로 돌아가면 이분들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표적을 세워야겠다고 다짐한다.

남해는 그가 농어촌 하수처리장을 설치하면서 인연이 시작됐다. 남해에 와보니 바다가 아름답고 공기도 좋고 따듯해서 이곳에서 모여 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교포들이 이곳에 와서 집을 짓고 살게 되면, 이웃에서 보고 본인들의 주거 환경도 고쳐지면 좋겠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광원, 간호사 기념되고 대한민국의 다른 곳에서도 독일마을과 비슷하게 주거환경이 개선되면 좋겠다는 생각에 모델 마을이 될 것이라 믿었다. 이 두 가지 이유로 그는 그토록 독일마을을 만들고자 했다.

그 후 정 씨는 당시 김두관 군수에게 독일마을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그는 김 전 군수와 함께 20006월에 독일에서 교포들을 대상으로 설명회를 가졌다. 그전에 미리 독일 베를린에 있는 주독일 한국대사관에 갔다. 팸플렛과 사업 계획서를 본 대사는 사업의 가능성을 의심했다. 그는 대사관 문을 닫고 뒤돌아서면서 대사님은 의심하지만 나는 독일마을 입주 희망자 명단을 가득 채워 돌아갈 것이다고 다짐했다.

이주 설명회에서 그는 말했다.

 

교포 여러분, 한국이 어딨는 줄 모르던 독일이 여러분께 천사 칭호를 붙이며 감사해합니다. 남해에 오셔서 군으로부터 땅을 사서 집을 짓고 정원을 가꾸면서 평생 경험한 문화생활을 유지하신다면 그것은 여러분들이 조국에 마지막으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정착 초기 독일마을은?

 

독일마을 입주자들은 군으로부터 택지를 유료 분양받아 집을 지었다. 그러므로 정부에서 집을 지어주었다거나 군에서 땅을 준 것이 아니다.

 

20023월부터 공사를 시작했지만 2005년이 돼서도 여전히 공사 지지부진했다. 독일에서 온다던 교포들도 몇몇 오지 못하게 됐고, 정 씨가 자문했던 만큼 진행도 되지 않았다. 그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2005년도에 택지를 교포들로부터 구입하여 종합건물(현 베를린 성)을 짓고 살기로 결심했다. 본인이 자문했기에 책임을 지고 싶었기 때문이다. 현재 살고있는 마을 주민들은 독일마을에 살면서 당시의 많은 어려움을 직접 경험했다. 물 공급 문제, 주차장 문제 등이었다. 처음에는 군으로부터 현지인에 비하여 차별받는다는 생각에 서러웠다.

 

현재 생활은?

카페와 펜션을 운영하며 가끔 세미나를 열어 단체나 귀촌하시는 분들에게 남해에 대한 이야기와 관광안내도 하고 있다. 또 독일에서 간호사로 일하던 것과 독일에서 공부했던 전공에 대한 얘기를 하며 독일을 알리고 젊은이들에 독일 교육에 대한 내용도 가르쳐 준다.

 

하고싶은 말은?

이정희 씨는 아쉬운 것은 찾아와주시는 분들이 교통에 불편함을 많이 느낀다. 군민들께서 지역을 위해 이해해주셔서 고맙다고 죄송하다

 

우리도 남해군민으로서 지역발전을 위해 함께 고민할 것이다. ‘함께가 중요하다. 동행하자

 

고 말했다.

정동양 씨는 아이들이 와서 부모에게 여기서 100밤만 자고 갔으면 좋겠다하는 말을 들을 때 가장 보람을 느낀다며 끝으로

 

광부라는 말 대신 광부의 예우를 갖춘 말인 광원이라는 말을 사용해 주시길 부탁드린다

고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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