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사람들에게 건강한 막걸리 살아 있는 막걸리를 제공하는 서상양조장을 찾아가고 싶은 마음 가득했지만 한사코 신문에 나는 게 싫다고 거절을 하여 아쉽지만 접을까를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남해군민으로부터 몇 십 년 동안 사랑받아오던 그곳을 포기할 수 없어 다시 한 번 만남을 시도해 보았다. ‘간절하면 통한다’는 진리 아닌 진리를 붙잡고 연락은 하지 않은 채 바람이 몹시 불던 날 열려 있는 공장 문을 살며시 들어섰다.


마침 수돗가에 앉아 청소를 하는 남자분이 있어 인사를 드리고 ‘사장님’인지를 여쭸더니 “이곳에서 일하는 일꾼”이라고 했다. 반신반의하며 사장님은 안 계신지를 물었더니 안쪽으로 들어가면 있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안으로 들어가니 며칠 전에 통화를 했던 주인공인 이 대표가 “연락도 없이 왜 왔냐”고 면박을 주면서도 웃으며 반겼다.


45년 전 부모로부터 이 가업을 처음 물려받았을 때는 그의 남편인 곽명선 씨가 대표였지만 몇 년 전부터는 이정언 그녀가 대표가 되었고 남편은 공장장이라는 직함을 가지게 되었다. 공장장인 남편은 농담인지 진담인지 “공장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다 하고 병뚜껑 닫는 것만 아내가 한다”고 했다. 모두 수작업으로 이루어지는 막걸리 빚기에서 서로 도와야 될 일이 많을 게 분명하기에 그 말은 그냥 웃게 하려는 말처럼 들렸다. 막걸리의 원료인 고두밥을 찌고 거기에 주모(酒母)를 넣어 5일 동안 발효를 시킨 후 일일이 병에 담고 농협마트나 규모가 큰 사업장에 직접 배달까지, 이 일을 모두 곽 공장장이 도맡아하고 있었다.

 

 

그가 대기업에서 직장생활을 잘하고 있을 무렵, 갑자기 아버지가 일을 못하게 되어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해야 했다. 처음 10년 동안은 양조장에서 일하던 사람들과 함께 술을 빚었지만 그 다음부터는 부부가 모든 일을 감당해야 했다. 서울에 소재한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이 대표는 이곳에서 3년 동안 적응이 되지 않아 공장 문턱을 들어설 때마다 눈물지었다. 멀리 날고 싶어도 현실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아 스킬자수로 학을 수놓아 벽걸이로 걸어놓고 자신을 위로하며 그것으로 대리만족을 했다. 남편과 가업을 잇기 위해 자신의 꿈을 아쉽게도 접어야했을 이 대표의 그때 심정이 짐작이 되고도 남았다. 지금은 날고 싶은 꿈을 접은 듯 스킬자수 학은 방석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술을 빚으며 45년 동안을 살아낸 부부는 이제 허리도 아프고 어깨도 아파 이 일을 하는 게 힘에 부친다고 했다. 뭐든 쉬운 일이 없듯 막걸리를 발효시키는 일도 쉬운 게 아니었다. 이것을 만들어 내는 사입실, 최적의 온도는 언제나 18도에서 20도를 유지해야 했다. 그래서 여름에는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창문을 열고 냉각기를 돌려야 했고 겨울에는 문을 꼭꼭 닫은 채 연탄을 피워 온도를 맞춰야했다. 뒤뜰에 있는 400년 된 느티나무와 푸조나무는 고맙게도 술을 익힐 때 여름에는 시원한 그늘과 바람을, 겨울에는 바람을 막아주는 보온 역할을 해주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몇 년 전 이웃집의 피해목으로 지정되어 푸조나무는 사라지고 느티나무만 그 역할을 하고 있어 옛 풍경이 그립다고 한다.


5대 조상까지 제사를 지내며 성실한 며느리로 살아온 이 대표는 조상대대로 내려오던 회화나무와 느티나무에도 음력 10월 15일이면 어김없이 제를 올린다. 나무에도 신이 있다고 생각하고 시어머니가 했던 일을 그대로 이어오고 있었다. 그 덕인지 뒤뜰에 있는 느티나무와 앞뜰에 있는 회화나무는 건강한 가지를 뻗어가고 있었고 아주 푸르고 싱싱했다. 회화나무 옆에는 크고 작은 다양한 나무들이 넓은 땅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어 무척 활기가 넘쳤다.

 

양조장의 역사를 오래 전부터 지켜보았던 나무들은 미생물이 많은 지게미의 영향으로 잘 자랐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참새 몇 마리가 그것을 쪼기 위해 몰려든다. 술을 빚은 집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지게미가 햇빛에 말라가고 있을 때 들판에는 서상막걸리 병들이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남해군민들의 힘든 노동을 달래주고 기운을 북돋아주는 음식으로서 농사철에는 더욱 효자음식이 된다. 효모가 살아 있는 무방부제 막걸리 한 잔을 걸친 사람들은 “밥은 먹지 않아도 막걸리만 먹으면 힘이 난다”는 칭찬을 한다. 곽 공장장이 막걸리를 생산할 때마다 “막걸리가 잘 익어야 할 텐데, 맛좋은 막걸리가 돼야 할 텐데” 라는 염원을 담아 정성을 기울이기에 사람들이 그것을 아는 것 같았다.


막걸리는 모든 것이 수작업으로 이루어지기에 수요자에게 충분히 공급되지 못한다. 그래서 간혹 외지인들이 인터넷을 보고 막걸리를 사러오거나 지나가다 우연히 들렸을 때 빈손으로 돌려보내게 된다. 이때 부부는 손님을 그냥 돌려보내는 게 미안하여 “뒤뜰에 있는 느티나무를 보고 가라, 앞뜰에 있는 회화나무를 구경하고 가라”고 붙잡는다. 사람들은 세 아름이나 되는 느티나무를 안으며 사진을 찍고, 줄기는 없지만 가지가 커다랗게 자란 회화나무를 기특히 여기며 축복을 하고 떠난다. 400여 평의 대지는 건물 자리를 빼고는 모두 나무들을 위한 터전이다.  각종 채소들과 나무들이 어우러진 이곳에서 부부는 대추가 토종이어서 맛있다고 먹어보라고 한다. 알맹이는 작았지만 큰 대추보다 훨씬 달아 몇 개를 따먹었다.


이 대표는 뜰을 둘러보고 나온 방문객에게 줄 게 없는 게 또 미안했는지 공장에 놓아둔 친정어머니 사진, 두 아들 부부의 사진과 손자들 사진을 보고 가라고 한다. 정이 많은 이 대표는 가족이 보고 싶을 때마다 그 사진을 보고 마음을 달랜다. 사람을 끄는 힘이 아주 강한 이 대표와 인자한 모습으로 잔잔한 미소를 잘 짓는 곽 공장장은 가족을 위해 경제적인 희생을 치른것 같았다. 하지만 베풂의 미학을 알고 막걸리를 빚어 번 돈을 20년 동안 인근 학교에 장학금으로 지원하고 있었다.

 

수목들도 빠져들 것만 같은 청아한 목소리를 가진 이 대표가 지난 세월을 떠올리며 회화나무 앞에서 ‘가을 타는 여자’ 를 부른다. “가슴 타는 날엔 잠 못 들고/이리저리 뒤척인 것은/~~가을 타는 여자입니다/~~”를 감정을 듬뿍 담아 절절하게 불렀다. 왠지 꿈을 이루지 못하고 이리저리 뒤척인 그녀의 모습을 대변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렸지만 서로를 바라보는 애틋한 모습에서 그런 마음은 순간 사라진다. 부부를 다시 바라보던 필자는 나도 모르게 속사포가 터진다. ‘두 사람은, 분명 45년 동안을 잔잔한 느티나무, 잘 영근 단단한 대추, 달큰한 막걸리 같은 삶을 살아왔을 것이라고’

박서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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