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가 한들한들 내리던 날 노량마을회관으로 속도를 내어 달렸다. 마침 오늘 장홍이 회장이 오후1시부터 3시까지 마을 어르신 20여 명에게 안마를 한다는 정보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곳에 오기 전 헬스장에서 아침운동을 한 후 이미 문의마을에서 10여 명의 어르신에게 안마를 해 드렸다고 한다.
아침에 한차례 일을 마치고 왔기에 손아귀에 힘이 빠질 만도 한데 안마를 하는 내내 얼굴은 생기가득이었고 헬스로 단련된 팔에는 활력이 넘쳤다. 장 회장에게서 좋은 기를 받은 어른들은 시원하다를 연발하며 만족해했다. 그는 사람들의 뭉친 근육을 풀어주고 혈액순환을 돕기 위해 수련원에서 습득한 내용과 자신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두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안마를 했다. 한 사람의 안마가 끝날 쯤에는 두 손을 맞대고 등 쪽을 몇 번 두드리면서 잔잔한 북소리를 내었고 죽비를 치는 듯한 소리를 내며 마무리를 했다. 경쾌한 소리를 듣는 순간 직접 마사지를 받지 않아도 아픈 어깨 쪽이 낫는 듯했다.

그는 대한노인회남해군지회의 프로그램에 따라 각 마을회관을 찾아다니며 1년 6개월 전부터 안마를 해왔으며 남해군장애인연합회장으로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또한 경남장애인차별상담네트워크 소속강사로서 초중고교를 다니면서 비장애인들에게 5년 전부터 장애인에 대한 인식개선교육을 해오고 있다. 그리고 남해최고지압원을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안마를 제공하고 복지관과 면사무소 등에서 봉사활동도 하고 있다. 그는 체력단련을 위해 헬스는 물론, 볼링과 탁구도 하고 있는데 볼링은 경남대표선수로서 곧 대회를 앞두고 있었다.
장 회장은 태어날 때부터 시신경이 약해 시력이 그렇게 좋지 않은 상태였는데 2011년부터는 완전히 상실되고 말았다. 시력이 그나마 있을 때는 고등학교를 졸업 후 꽃과 과일을 기르는 관광농원을 운영할 생각으로 부산에서 화훼농사를 7~8년 정도 배웠는데 그 꿈을 시도도 하기 전에 시력 문제로 접어야했다. 시력이 약간 있을 때 사회복지학을 전공하여 2007년 전문학사를 취득하고 2011년에는 학사를 취득했다. 30대 후반 완전히 실명이 된 후에는 사회복지사 자격증도 취득했다. 실명을 한 후 처음 6개월 동안은 삶을 비관하며 극단적인 생각도 했지만 자신이 힘들다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무의미하게 사는 건 잘못됐다는 판단을 하고 시련기를 잘 극복했다. 그가 시력을 잃고 헤맬 때 마침 남해군에서는 장애인에 대한 처우 운동이 일어났고 장애를 가진 회원의 집을 방문하는 일들이 많아졌다. 그때서야 본인보다 더 어려운 장애인들도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는 것을 알고 새 힘을 냈다. 그리고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봉사할 것임도 다짐했다.
안마를 잠시 멈춘 그가 장애인복지관 개관 10주년 기념식 때 남해군에서 무장애 고장을 구현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고 함박웃음을 짓는다. 남해를 무장애 남해로 만들겠다는 내용은  장애인이 편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경제적‧정치적‧인식의 무장애에 필요한 부분들을 제공하겠다는 의미라고 한다. 우리 사고가 바뀌지 않으면 우리 사는 세상도 바뀌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살고 있는 그는 장애인 인권운동가의 꿈을 꾸고 있었다. 자신이 원하는 사회는 사회적 약자인 노인과 장애인 다문화가정을 차별하지 않고 편안하게 살 수 있게 하는 사회적 분위기 조성과 지원책이라고도 했다.

작년에도 안마를 받았던 어느 할머니는 “저번에 받고 나니 시원하고 좋았다. 이번에는 작년보다 더 잘한다. 안마를 할 때 통증이 있어도 그냥 참고 받다보면 괜찮아진다. 뭉친 부분을 잘 풀어준다”는 소감을 전해주었다. 그는 어르신들의 어깨를 주무르면서 재미있는 농담도 건넸다. “다음에는 누가 할 건고”라고 묻자 할머니들 몇 명은 “젊은 19살 아가씨가 곧 온다”라고 했다. 그는 대뜸 “할매들은 이제 집에 가라 이쁜 아가씨 온다니까”로 응대하자 곧바로 “지도 늙었구만 까불고 있다”로 받아쳤다. 그의 너스레와 할머니들의 거침없는 대답은 10년 지기 친구 저리가라였다.
고현면 화방사 밑 대계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올해 47세였는데 삶에서 터득한 깨달음이 많은 듯 “사람에게는 지식이 많은 것보다 어르신들이 삶에서 체득한 지혜들을 듣는 게 더 소중하더라, 70‧80년을 산 어른들의 경험을 들으면 답이 보이고 힘이 난다”고 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꽃 농사를 짓기 위해 부산에서 7~8년 정도를 보냈던 것과 장애교육을 받기 위해 서울로 다녔던 것을 빼면 거의 남해를 떠나지 않고 살았다는 그는, 거의 읍내에 살면서 도로나 주변 환경을 눈으로 익혀왔다. 하지만 흰지팡이를 짚어도 무릎과 이마에 멍이 떠날 날이 없을 정도로 장애물과의 전쟁치렀다. 그는 이것을 막기 위해 자신의 몸을 보호하는 차원으로 운동을 시작했지만 지금은 자신의 직업을 잘 해내기 위해 운동을 그만둘 수 없다고 한다. 근력을 기르기 위해 턱걸이를 할 때도 손아귀 힘을 기르려고 손끝으로 철봉에 매달린다. 하지만 직업병은 어쩔 수 없었다. 안마를 수없이 하다 보니 손바닥이 성난 것처럼 빨개졌고 손아귀가 아파 젓가락질이 힘들어졌고 엄지손가락 지문도 닳아 없어졌다. 직업을 위해 꾸준히 몸을 단련한 결과 58㎏이었던 왜소한 몸이 이제는 74㎏으로 단단해져서 운동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의 성격은 원래 내성적이어서 집에 있으면 생각을 많이 하고 고민을 많이 하는데 밖을 나오면 외향적으로 바뀌어 어느새 수다쟁이가 되고 밝아진다. 그는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 안마를 하지만 우리 장애인도 사회에 재능을 환원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장애인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 쇄신의 필요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했다. 그가 계속 안마를 하는 중에 인터뷰를 하는 게 미안하여 힘들지 않냐고 했더니 이게 힘들면 어떻게 세상을 살겠냐는 답이 돌아왔다. ‘괜한 질문을 했나’하고 머쓱해하는데 어느 어르신의 어깨를 주무르다가 “비나이다 비나이다 우리 어머니 50년 더 살게 해 주시다”는 소원을 흥겹게 주문했다. 그의 명함에는 공무원복지포인트가맹점, 사회서비스제공자(바우처)업체, 남해군안마바우처제공기관이라고 적혀 있고 안마‧발마사지‧지압‧스트레칭운동요법‧자세교정으로 돼 있다. 남해최고지압원에서 다른 두 명의 안마사와 함께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건강을 제공하고 있는 그에게 필자도 한 가지 소원이 생긴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장홍이 원장이 앞으로 50년 이상은 거뜬히 안마사의 길을 걷도록 해 주옵소서”

박서정 기자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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