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 / 명상디자인학교 교장

결실의 계절 가을입니다. 결실을 맺는다는 의미에서 흔히 사용하는 단어가 풍성이요 풍요입니다. 풍성이나 풍요는 주로 부의 축적을 나타낼 때 쓰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보다 진실한 의미로서는 존재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면서 결실의 정도를 얼마나 의미 있게 가슴에 담아내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에게 주어진 소중한 생명을 가치 있고, 보람되게 여기며 살아가고 있는가? (존재론) 아니면 먹고 사는 데 치중하여 산다는 의미를 망각한 채 살고 있는가? (생존론)을 가름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존재인가 생존인가 여하에 따라 삶의 각도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풍성이나 풍요가 삶의 질을 확보할 방편이라면 그 내밀한 정서를 다룰 사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감정과 생각에 머물지 않고 이를 상회하려는 순수 의식입니다. 순수 의식이야말로 풍성이나 풍요를 이끌 주체요 보고(寶庫)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우리는 풍성이나 풍요의 기준이 될 순수의식을 얼마나 지니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도 나의 삶을 선명하게 이끈다는 점에서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얼마만큼 순수한가? 그동안 나는 순수에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왔는가? 만약 먹고 살기에 급급하여 이러한 감각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면 앞으로 이를 어떻게 담아낼 것인가? 또한 풍성과 풍요의 가치를 순수 의식에서 찾는다면 외연의 행동거지를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이러한 과제 속에서 순수 의식에 도달하기 위한 수양의 정도는 또 어떻게 가져가야 하는가? 사실 완벽한 풍성, 완전한 풍요는 있을 수 없습니다. 또한 살아가면서 순수만을 추구하는 것도 당장 현실에서 접목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 감정, 행위 여하에 따라 존재와 생존의 가치가 달라진다면 건전한 자아성취 차원에서 이를 수용해 볼 가치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순수의식으로의 회귀는 어쩌면 새로운 문명을 담아낼 잠재력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를 담아낼 마음의 창고를 조금 더 여유 있게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어느 정도의 순수의식이라도 담아낼 자신감이 있다면 말입니다. 이를 수양적 관점에서 직시해보면 마음을 잠잠한 가운데 머물게 하고/ 자연의 소리, 생명의 소리를 직관하여 교감하고/ 경청과 공감의 지혜를 터득하며/ 감정에 휘둘리어 마음을 어지럽고 복잡하게 하지 않고/ 명상을 통하여 한층 깊은 의식 세계를 경험하며/ 가고 오는 이치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생의 전반에 펼쳐지는 것을 유심히 바라보며 동참하고/ 어디서든 감사와 사랑이 있음을 오감을 통하여 실제로 느끼고 체험하는 가운데에서 나의 선명성을 더욱 확보해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답을 통하여 나는 순수의식의 나로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성장을 상징할 풍성과 풍요로움의 자양분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풍성과 풍요를 더욱 실감나게 가슴에 담아내는 것입니다. 결국 풍성과 풍요의 최대 가치는 순수의식을 사랑의 결실로 담아내는 것입니다. 비유해보면 결실의 정도에서 씨앗을 뿌리고 잎이 자라며 가지가 뻗으면서 열매를 맺는 일련의 과정은 해와 달, 별과 우주 전체의 순수 의식과 사랑으로 엮어내는 작용인 것과 맥을 같이 합니다. 따라서 모든 생명은 상호작용의 법칙에 의거 개체와 전체가 서로 살리고 살게 해주는 순수의식을 통하여 동반 성장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모두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과 그 연결의 매개가 순수의식이라는 점, 또 그것은 나를 더 큰 나로 이끄는 촉매제라는 것을 깨닫게 해 줍니다. 이런 까닭에 풍성과 풍요가 순수의식을 내 몸과 마음에 얼마만큼 담아내느냐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라면 이를 수양의 덕으로써 체험해보는 것도 이 가을을 빛나게 할 좋은 결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저작권자 © 남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