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가 저물어 가고,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이 하나 둘 곁을 떠난다. 나는 꽃피는 화려한 봄보다는 황금빛 들녘에 주렁주렁 오곡백과가 달린 풍요롭고 넉넉한 가을이 더 좋다.
어느덧 나이 70대의 중턱에 들어선 요즘, 아침저녁 찬 기운이 마음속을 파고든다. 때문인지 지난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했던 때가 생각난다. 서울에 기거할 곳도 없던 차에 5.16혁명 후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의 경호과장을 맡은 사촌매형(신동관 전 국회의원)댁인 신당동에 둥지를 틀면서 나의 상경기가 시작되었다.
나의 아버지는 1950년 6.25사변 당해에 북한으로 납북되어가다 지리산(산청골) 입구에서 죽임을 당했다. 아버지는 일본에 유학하셨고 남해에 토마토를 처음 들여온 분이시다. 남해공립농업중학교(5년제) 교감으로 재직하셨기 때문에 나는 학교 관사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그곳은 현재 남해도립대학이 되어 있다. 그때 넓은 운동장에서 뛰놀았던 덕인지 나는 전국체전에 남해군 육상대표선수로도 출전했었다. 
나의 조부님은 차산정미소와 이동에 양조장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지금의 장평소류지를 만들었고 남해향교 전교를 지내셨다. 나의 외가는 최초의 남해이동초등학교 설립 집안이다. 이러한 친가와 외가의 명성 덕에 나는 고향사람들의 내력을 아는 축에 속했다.
매형이 청와대에 들어간 무렵 어떻게들 알았는지 남해사람이라며 사람들이 찾아오니 나는 자연스럽게 고향인 감별사 역할을 했다. 이후 경호실 확대로 매형이 처장‧차장이 되자 조석으로 고향분들이 몰려들었다. 요즘 같으면 큰 사회문제가 되었을 게다.
어떤 때는 매형이 청와대로 모시고 오라고하여 택시를 타고 청와대 입구에 도착하면 택시비는 응당 자기들이 내어야 하는데도 가만 앉아있었다. 하는 수 없이 똘똘 말아 꼬불쳐놓은 고래심줄같은 비상금 주고나면 돈이 없어 나다닐 수도 없었다. 있는 분들이 더했다.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자기 일 부탁하러왔고 식사에 차까지 대접해서 안내했는데, 우리네들 말로 ‘문디 콧구멍 마늘을 빼먹지’라는 푸념도 했었다. 사실 그간 많은 향우들을 접하다보니 이처럼 못난 군상도 더러 겪었다.
한편 박정희 대통령처럼 매형도 친인척에 대하여는 참 매정하였다. 많은 고향사람들은 내가 청와대에서 근무한 게 매형인 신동관씨의 힘이라고 알고 있지만, 실상은 다르다. 당시 경호차장실 김정하 보좌관(남면 출신)과 박종규 실장은 군생활 시 함께 생활한 관계여서 내가 청와대에 몇 차례 출입할 때 김 보좌관께서 나의 신상과 가족사를 박종규 실장에게 얘기했다. 이를 통해 나를 눈여겨 본 박 실장께서 나를 데리고 있으려 했고 이를 계기로 청와대 근무에 되었다. 당시 22세였던 나는 경호실에서 ‘처남’으로 불리었다. 당시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경호실의 기세는 대단했다.
아무튼 매형 신동관 씨는 이후 남해의 국회의원이 되었다. 아직도 남해 국회의원 부부가 남해출신인 것은 신동관 씨가 유일하다. 이 때문에 조석으로 찾아오는 고향분들의 식사와 차 대접은 기본이었고 심지어 잠까지 재웠다. 특히 겨울에 여수에서 호남선 야간 기차를 타고 서울역에 도착해 꼭두새벽 5시에 이화동 신동관 의원 집으로 찾아와 대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분들을 방으로 모시면 잠을 잘 수도 없었다. 특히 궐연담배까지 피워대면 이건 고문이었다. 꾀를 내어 자리를 펴고 피곤할 테니 누워있게 하고는 겨우 잠을 잤다.
무소불위의 청와대에서, 그리고 1971~1980년 초까지 8, 9, 10대(8년간) 국회의원을 하며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열정으로 많은 고향 일을 하신분이 청남 신동관 선생이시다. 당시 남해와 서울은 물론 전국에서 고향분들이 매일 수십명씩 집밖까지 넘쳤고, 신동관 의원은 그 많은 민원을 손수 다 처리해주셨으니 그때가 남해인들에게는 행운이었고 전성기였다. 결코 친척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다.
나는 1977년 봄 결혼으로 1965년 상경할 때부터 정들었던 이화동 누님댁 생활을 접게 되었다. 서울 올 때 조그만 가방 하나 들고 왔는데 누님댁을 떠날 때 내 손에는 큰 옷가방 둘에 대학원(야간) 석사논문 등 책과 사진첩 박스 하나였다.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딱히 출근할 데가 없었다. 그동안의 생활이 빛 좋은 개살구였다. 처에게 참 미안했다. 그때가 생각나면 지금도 눈시울이 떨린다. 내 황금 같은 청년기 13년은 고스란히 남해 고향사람들 뒤치다꺼리 한 것뿐이었다. 당시 내가 마음을 달래던 노래가 최근 유명을 달리한 가수 최희준의 ‘하숙생’이었기에 새삼 그 시절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그러나 역지사지했고 나는 필요한 곳에서 그 몫을 했으니 떳떳하고 보람차다.

 

시련도 많았지만 아무런 욕심이 없었던 시절이다. 그래도 최고 끗발 청와대 3년과 1973년 6월 남해대교 개통식 때를 생각해보니 가진 건 없었지만 그때가 내 인생 황금기였다. 비록 남해라는 울타리 안에 억류되다시피해 밖을 생각할 수 없었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학생운동하다 구속된 친구도 구해 주었고,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국회의원 시 5공청문회 땐 소액후원금도 보탰다. 이념은 모르겠고 정의감에 앞섰다. 남해현대아파트 건립 시 남해신문 고(故) 김창영 국장의 광고부탁에도 많이 협조해줬다. 그리고 김두관 전 장관, 고(故) 박홍수 전 장관은 나의 사업장이 있는 충북 단양군에 많은 도움을 줬다. 
지난 연휴, 모두가 추석 명절날이었지만 나는 이 날이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이라 제삿밥을 먹어왔다. 이제 늙어서인지 옛날 생각이 자주 떠오르고 눈물도 많아졌다. 그래도 그땐 어려웠지만 고향분들께 돈 한 푼 받지 않은 게 얼마나 잘했는지 다행이고 자랑스럽다. 이 모두 나에겐 고운 인연들이다. 나의 인생은 남해를 떼고 나면 무의미하다. 이런 생활이 습관화되어 지금도 고향사람이 편하고 좋다. 나의 운명이라 생각한다.
그런 한편 유혹이 있었지만 배신과 모함과 사익을 우선하는 정치판에 끼어들지 않게 된 것도 큰 복이었다. 1992년에 명품 남해현대아파트를 건립했고, 그곳에 어머니가 살고 계시니 이만하면 행복하다. 가끔 나를 아는 고향분들도 “그래서 자네는 복을 받았다”라고 하니 내 인생 그런대로 잘 살아왔다. ‘받은 은혜는 돌에 새기고 베푼 은혜는 물에 새긴다’라고 했다. 범사(凡事)에 감사하리라.
※(추신) 지난 9월13일 제2남해대교 개통 전날부터 청남선생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다. 아마도 남해대교와 수를 같이 하는가 싶다.

 

저작권자 © 남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