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이 끝난 선조 31년(서기 1598년)부터 조선조 순조 34년(서기 1834년)까지 236년간 우리 고장을 거쳐간 현령(縣令)은 모두 148명으로 현읍지의 '환적(宦蹟)'난은 적고 있다.
현령이란 현에 두었던 지방 장관을 말하는데 신라 시대에는 현의 크기에 관계없이 현령을 두었다가 고려 시대에 와서 이를 구별하여 큰 현에는 현령을 두고 소현에는 감무[현령]를 두었는데 이 제도가 조선조 시대까지 이어져 왔다.
그리고 환적은 조선조 때 관리들이 그 직위에 있을 때의 행적이나 발령 사항을 적은 기록을 말하는데 요즘 말로 하자면 '발령 대장'과 같은 인사 장부를 말하는 셈이다.
236년간 148명의 현령이 거쳐 갔다면 한 사함의 평균 재임 기간은 1년 7개월 남짓한데 그 당시에도 사만(仕滿)이란 인사 제도가 있어 6품 이상의 벼슬은 900일, 7품 이하는 450일, 명예직은 360일의 근속 기간을 허용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사만에 해당하는 장기 근무 현령 몫을 제외하면 평균 재임 기간은 1년 7개월에 훨씬 못 미치게 된다. 이 사만 제도는 한 관리가 같은 직에 오래 있음으로써 오게 되는 폐단을 예방하기 위해서 만든 규정으로 사만이 되면 딴 자리로 옮기거나 한 단계 윗자리로 승진을 시켰다고 한다.
요즘 말로 하자면 장기 근무를 줄이고 순환 근무를 시켰던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우리 지역의 경우 환적이 보전되고 있는 것은 임진왜란이 끝난 1598년 이후부터이다.
현읍지에도 선조 31년 이전은 병란으로 인하여 기록을 모두 잃어버렸다고 적고 있다. 선조 31년이면 바로 임진왜란이 끝난 해가 되는데 선소에다 왜성까지 쌓고 읍성까지 깔아 뭉개고 앉아 살인에다 방화까지 온갖 노략질을 일삼던 왜병들의 포악 앞에 역사적 기록들이 온전하게 남아 있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나 무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지역에서 최초로 나온 관찬현지(官撰縣誌)는 1785년 9월부터 1786년 7월 사이로 추정되는데 바로 정조 9년에서 10년이 되는 해다.
이 현지가 나온 지 47년이 지난 1832년부터 1834년 사이에 '경상도 읍지' 속에 '남해편'의 두 번째 현지가 나온게 된다. 순조 32년부터 34년이 되는 해다.
임진홰란이 끝난 해로부터 236년이 되는 이 기간동안 남해 현을 다녀간 현령들이 148명이나 된다는 이야기는 이미 잠간 언급한 바 있다.
이런 여러 현령 가운데서 재임 기간이 1년 미만인 경우가 45명이나 되는데 148명의 30%가 넘는 숫자이다. 이 45명 가운데는 부임하자마자 경직(京職, 중앙 관서로의 대기 발령)으로 옮겼다가 파직 당한 경우를 비롯하여 부임 4일만에 분상(奔喪, 먼 곳에 있는 어버이의 죽음을 듣고 급히 돌아감)으로 물러난 경우도 있었다.
또 1년 이상 2년 미만의 재임 현령은 50명이었다. 이 숫자는 전체 현령의 33%가 되는 비율이다. 또 2년 이상 최장 2년 11개월까지의 장기 재임 현령은 모두 53명으로 전체의 약 37%를 차지했다.
왜란 이후 전쟁의 후유증이 차차 수습되고 국정이 안정을 되찾게 되자 공직 기강이 바로 잡혀 재임 기간이 차차 늘어나서 사만의 경우도 증가하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또 현령들의 전임(사임) 사유를 보면 시대 상황을 이해하는데 더욱 큰 시사가 될 것으로 믿는다. 앞에서 분상이라는 특수 상황을 설명한 바 있다.
분상으로 현령직을 그만두고 떠난 경우가 236년동안 12사람에 이른다. 실제 분상의 비극을 당한 경우가 없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되나 어떤 딱한 사정이 있어 분상을 핑계로 현령직을 그만둔 사례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파직의 경우는 압도적으로 많았다. 확실한 파직의 사유가 밝혀지지 않은 경우가 28명, 임금에게 아뢰는 계문(啓文)의 절차를 밟아 파직 처리되거나 장계(狀啓, 왕의 명령으로 파견된 벼슬아치가 글로 써서 올리던 보고서)를 올려 파직시킨 경우가 16명, 관찰사가 현령의 시비·선악을 평정한 표폄(表貶) 자료에 따라 파직 시킨 폄파가 30명에 이르렀다.
당시 관찰사는 관내 지방 장관에 대한 표폄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오늘날의 인사 규정상 근무 성적 평정 권한쯤 되는 제도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1년에 두 번씩 평정하고 그 자료를 인사에 반영했다.
이 자료에 따라 비리가 들어나 파직되는 경우를 폄파(貶罷)라고 했다. 반대로 표폄 결과 선정의 치적이 뚜렷하고 목민관으로 본받을 점이 있을 때에는 승직(陞職·승진) 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우리 고을 현령의 경우에도 이런 승직의 경우가 실제로 있었다.
영조 6년(서기 1730년)의 현령 박사정, 영조 16년부터 17년까지(서기 1740~1741년)의 현령 조경, 영조 17년부터 18년(서기 1741~1742년)까지의 현령 홍정명, 정조 1년부터 3년까지(서기 1778~1779년)의 현령 원우진, 정조 9년부터 10년까지(서기 1785~1786년)의 현령 이신경, 그리고 정조 16년부터 17년(서기 1792~1793년)까지의 이원상 현령이 대표적인 승직 케이스다.
박사정 현령은 종부판사(宗簿判事, 조선조 때 왕실·왕족의 계보 편찬과 종식의 잘못을 규탄하던 관서의 정 3품 벼슬)로, 조경 현령은 지평(地平, 사헌부의 정 5품 벼슬)으로, 홍정명 현령도 지평으로, 원우진 현령은 나주 영장(營將, 진영의 으뜸 장수)으로, 이신경 현령이 왕의 부름으로[승소(承召)] 선전관으로, 이원상 현령은 곤양 군수로 각각 승직되었다.
그리고 정해진 임기를 모두 채우고 이곳을 떠난 사만(임기 만료)도 38명이 있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임기를 모두 마치고 영예롭게 이곳을 떠난 현령들이 대부분이지만 김종수 현령(정조 13년부터 16년까지)처럼 2년 11개월이나 근무하다가 왕께 올리는 장계에서 비리가 밝혀져 파직된 경우도 있었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서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교훈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생각된다. 특별한 경우 몇가지 예를 들어본다.
인조 16년부터 17년(서기 1638~1639년)의 최정해 현령은 9개월만에 분상으로 그 직을 버리고 떠난다. 그 뒤를 이어 부임한 허응상 현령도 인도 17년부터 18년까지(1639~1640년) 1년만에 역시 분상으로 물러나고 만다.
그 뒤에 부임한 두 현령들은 모두 파직되는 불행을 맞게된다. 인조 22년(1644년)에 부임한 이만춘 현령도 4일만에 분상으로 물러나고 그 뒤의 이민행 현령도 1년 1개월만에, 그 뒤에 부임한 김몽남 현령도 1개월만에 분상으로 물러나는 거짓말 같은 일이 계속 이어진다.
그것만이 아니다. 오는 현령마다 파직 릴레이를 하는 것 같은 현상이 이어지는 것이다.
< 다음호에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