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 온 지도 그럭저럭 28년째로 접어들었다. 40대였던 모친은 주름살이 깊어지긴 했으나, 젊을 때 체한 병으로 위장과 심장이 나빠져 병원을 다니는 것 외에는 무사한 편이다.
살림은 여전히 나아지지 않았고, 재산을 모으는데 재주가 없던 나는 늘 모친에게 많은 돈을 드리지 못한다. 언제부터 단 한번이라도 마음껏 돈을 쓸 수 있게 해드리리라 다짐했지만 아직도 그러질 못했다.
설령 그렇더라도, 모친은 내가 준 돈을 모아 다시 손주에게 슬쩍 되돌려 줄 것임이 틀림없는데도 말이다.
나는 ‘사람좋은 갱수너메’의 성격을 그대로 닮았다. 모친은 무엇이든 나누어 주어야만 직성이 풀린다. ‘우리 먹을 것도 없는데 왜 자꾸 퍼주느냐’는 핀잔도 수없이 받았지만 천성은 어쩔 수가 없다.
남을 모함하거나 험담하는 말은 여지껏 들어본 적이 없다. 남에게 화를 내는 것도 보지 못했다. 자기를 내세우는 일에는 인색하지만 남을 내세우는 데는 주저하지 않는다.
모친의 피를 그대로 이어받은 나는 ‘남해사람 답지 않다’는 질책(?)을 듣는다. ‘고추가루 서말 먹고 물밑 삼십리를 간다’는 남해 사람들의 악바리 기질처럼 모질지도, 거칠지도, 우악스럽지도 못하다. 남에게 해로운 짓은 더더욱 못한다. 나를 내세우지도 않는다.
나는 신문사에 들어와, 소위 기자라는 일을 하면서 늘 이런 성격에 불만이었다. 허나 언젠가 ‘역시 사람좋은 갱수너메 아들’이란 칭찬을 들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한줄 공간 주세요※>
마지막 소원이라면, 부모님을 다시 남해로 모시는 일이다. 직장과 가족에 얽매여 지금은 어렵지만 언젠가 남해로 간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얼마 전 “고향에 있는 논을 팔겠다”는 부친을 겨우 말린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나는, 바다가 보이는 그 논에다 널찍한 집을 짓고 모친을 편히 모실 것이다.
손수 나락을 심고, 모친이 애써 만들었던 뒷산 밭도 다시 갈구어 고구마를 심으리라. 모친은 이미 “아들 다 커모 금방 올끼다”는 약속을 잊었다.
모친을 어떻게 다시 설득할 수 있을까. 아니, 그보다 고향으로 내려가는 그때까지 살아계실지 더 걱정이다.
어디를 둘러봐도 고향, 남해만큼 포근한 곳은 없다. 거친 삶들만 있지만 고향만큼 넉넉한 곳은 없다. 나는 하나 둘 동네를 떠난 빈자리가 언젠가 다시 채워지리라 믿는다.
모친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는 상상만으로도 늘 행복해진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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