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지랑이가 막 부화하던 77년 봄, 트럭 한 대에도 다 차지않는, 초라한 이사짐을 싣고 우리 식구들은 무작정 부산으로 왔다. 뜬 눈으로 밤을 보낸 모친은 새벽부터 말없이 짐만 꾸렸다. 그런 모친 앞에서 오뉴월 널뛰듯 마냥 좋아하자니 눈치가 보였다. 마을 회관 앞에서 동네 살람들과 인사를 나누던 모친은 결국 눈물을 쏟아냈다. 떠나는 슬픔과 새로운 삶에 대한 두려움이 뒤섞인 눈물이었다.
“갱수너메 정말로 고생많았네 인자 가모 온제 또올랑고”
“금방 옷기세. 아들 다 크모 다시 와야제. 고향 나두고 오데로 가겄능고” 금시로 내뱉지 않은 양 모친은 반드시 고향으로 온다는 약속을 몇 번씩 반복했다.
모친에게, 이사를 하기 전까지 부산은 도무지 처음이었다. 남면 구미에서 시댁인 숙호까지, 40년 넘게 바다만 보며 살아온 터였다. 어쩌면 ‘부산으로 이사하자’는 부친의 제의를 처음엔 거절한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밑천이나, 기댈 언덕도 없이 무턱대고 부산으로 간댔자 특별히 나아질 게 없다는 걱정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보다 섬사람은 섬을 지켜야 한다는 숙명론적인 강박관념에 짓눌리고 있었다. 모친은 사시사철 농사에 허리가 휘면서도 섬에 태어난 것을 운명으로 여겼다. 고향을 등져야 한다는 생각은 차마 품어서도 안될 금기였다. 모친은 결국 ‘40이 넘은 나이에 부산으로 가서 무슨 부귀를 누릴거냐’는 고집을 꺾었다. 순전히 하나뿐인 아들을 위해 짐을 꾸린 것이다. 중학교 졸업 후 집에서 빈둥거리는 앋르을 살리기 위한 희생이었지만 모친에게 촌을 떠나 도시로 간다는 것은 실로 큰 모험일 수 밖에 없었다.
회를 몇 년 넘긴 모친의 삶은 ‘지독한’남해여자의 이력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얼굴도 모르는 남편과 결혼한 첫날, 시어머니의 죽음을 맞았다. 기구한 앞날을 예고하는 복선이었다. 설상가상 다섯 형제 중 유독 공부에 미련이 많았던 부친은 장롱속 돈ㅇ르 훔쳐 달아나 대학에 들어갔다. ‘농사꾼에게 공부가 뭐냐’며 부친의 도둑질을 못마땅하게 여긴 계모의 구박과 괄시는 모두 모친이 떠안았다. “느그 할매가 어찌 구박을 하는지 죽는줄 알았다. 밥상만 차려놓으면 그길로 마실을 나가 들어오지 않았다. 며느릴 골탕먹일 요량이었제. 일도 큰며느리는 시키지도 않고 내한테 다 시켰다”는 모친은 급히 먹던 음식이 체해 여러날 고생했지만 약도 써보지 못했다. 그때 치료를 못했던 것이 일생동안의 지병으로 도졌다. 감당하기 힘들었던 구박이 원망스러웠을테지만 모친은 몇 년 전 시어머가 돌아가셨을 때 누구보다 서럽게 울고 또 울었다.
교편을 잡은 부친은 객지로 떠돌며 가정을 팽개쳤다. 달포에 한 번 정도 집에 왔을 뿐 살림은 전부 모친의 몫이었다. 전답이랬자, 몇마지기도 안됐지만 모친은 온종일 논과 밭에서 살았다. 똥장군을 지고, 거름을 나르고, 나락과 보리타작은 물론 손이 빌때는 소를 빌려 고랑을 가는 일도 허다했다. 가장이 없는 세간이 부족한 것은 당연했다. 쌀밥이라고는 구경하기 힘들었다. 외아들인 나도 좀체 쌀밥은 먹지 못했다. 우리 밥상을 보고는 이웃에 사는 진수너메는 “갱수너메, 아들 하나 있는거 쌀밥 좀 해주게. 맨날 보리만 그리 먹잉께 아가 커도 안하제”라며 꼬집었다. 그럴라치면 나는 진수너메의 말이 너무 고맙고 행여 쌀밥이라도 나올까 눈물을 뚝뚝 흘리며 허튼 수작을 부리곤 했다. 외아들에게 쌀밥을 먹이지 못한 모친은 더 많은 눈물을 흘렸을 터인데도 나는 그것을 영영 보지 못했다.
모친의 생각처럼, 부산에 와서도 세간은 나아지지 않았다. 자갈치가 아래로 보이는 남부민3동 중턱에 방을 얻었다. 콧구멍만한 방 두개에 여섯식구가 몸을 삐댔다. 빈대와 바퀴벌레로 인해 식구 모두가 심한 피부병에 걸려 몇 년을 고생했다. 열쇠를 챙겨 집 밖 공동화장실에 가는 것도 고역이었다. 모친은 육체적 노동에서 벗어나났지만 도시생활은 그리 평탄치 않았다. 길 눈에 어둡고 복잡한 글자에 익숙하지 않은 모친은 집 아래 시장만을 오갔다. 고달프긴 했어도 바다와 산과 넓은 들판이 펼쳐진 숙호에 비하면 감옥살이나 다름없었다. 한번도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내색하지 않았지만 모친의 귀와 눈은 늘 고향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학기 초 담임으로부터 부모임을 모시고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남부민동에서 대신동까지 멀지않은 거리였지만 모친에게는 험난한 길이었다. 혼자 버스를 타는 일이며, 정류소에서 멀리 떨어진 학교를 찾는 일이며 그리고 다시 그길을 되돌아 집으로 간다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수업시간 내내 마음을 졸였지만 모친은 무사히 학교를 찾아왔다. 나는 비로소 모친에 대한 걱정을 접었고 모친도 나름대로 도시생활에 적응해 나갔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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