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때 노무자로 해방 후 전쟁터로 끌려가
보상 한푼 못 받았지만 원망 없어

 
    
  
유석문 옹이 남양군도로 노무를 갔다는 증거가 담긴 수첩을 보여주며
당시를 설명하고 있다.
 
  

일제시대에 태어나고 청·장년시절을 보내야 했던 지금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에게 젊은 시절은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삼동 화암에서 태어나 줄곧 살았다는 유석문(83) 옹에게도 젊은 시절은 일본인들의 핍박과 배고픔으로 목이 메이는 시절이었다.

한창 학교를 다녀야 할 17살(1938년)의 나이에 그는 술로 세월을 보내는 아버지를 대신해 다섯 동생들의 가장으로 학교도 포기하고 돈을 벌기 위해 일본인들의 태평양전쟁을 위한 비행장 건설공사 노무자로 남양군도로 갔다.

남양에 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속임에 떠났던 그 길이 2년 동안 하루 18시간 노동착취와 굶주림의 시간들이었다.

임금이라고는 밥값을 제외한 1원이 고작인데 이도 배고픔을 달래기 위한 하루끼니비로 다 나갔다.

“한창 먹성 좋을 나이에 고작 쌀 한 주먹 반 먹고 하루 18시간을  어떻게 일할 수 있어 일당 1원으로 목숨 연명하기도 힘들었다”는 유 옹은 돈을 모은다는 것은 아예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고 한다.

남양에서의 2년은 그에게 배고픔 외에도 장기간 노동착취 등으로 지금까지 그때의 고통으로 육체적인 후유증이 남아 요즘은 밥 먹는 것도 힘들 정도라 한다.

고국으로 다시 돌아와도 그에게 힘든 생활은 마찬가지였다. 고향의 좋은 논·밥이며 어장들은 이미 일본인들의 차지였고 그나마 있던 논에 농사를 지어도 공출이라고 해 다 빼앗아 갔다.

“일본인이 죽으라고 하면 죽고 살라고 하면 사는 시대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지.. 그냥 쌀에 도토리나 톳나물 등을 섞어 밥을 지어먹으며 겨우 살았지”  

  
     
  
남양군도로 노무를 갈 당시 본인인적과 노무를
간 장소 등이 적혀있는 수첩.
 
  

부인 이순악(76) 할머니를 만난 건 유 옹 나이 23살로 할머니 또 한 위안부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16살의 나이에 할아버지에게 시집을 왔다고 한다.

그러나 그 해 유 옹은 갓 시집 온 할머니를 두고 청진(북한)으로 강제징용을 가게 됐다.

“청진에서는 7개월 정도 밖에 있지 않았지. 일본이 패망을 해 소련군이 점령을 했기 때문에 그곳에 징용됐던 사람들은 산으로 남쪽으로 다들 도망가기 바빴지”

소련군의 총에 유 옹 또한 고향에 두고 온 아내와 동생, 부모님을 생각하며 살아야겠다는 일념으로 쌀 반주먹 먹고 이틀동안 기차지붕에 매달려 여수까지 내려왔다.

유 옹은 그 당시 기차간의 풍경을 “사람들이 정말 개미떼같이 기차에 매달려 있었다”고 표현했다.

그는 그 후로도 6.25전쟁 때 군인으로 참전했고, 휴전이 된 후에도 또 한번 군 생활을 했다고 한다.

이런 할아버지가 안타까운지 할머니는 “맨날 끌려다니며 고생길을 몇 번이나 걸었는데도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 보면 할아버지 목숨이 질기다”고 눈시울을 적셨다.

보상은 못 받았지만 큰 원망은 없다는 유 옹은 때를 제대로 못 타고 태어난 게 죄일 뿐이라며 내 죽기 전에 혹 보상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말하며 너털웃음을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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