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성하의 계절 칠월이다.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한 손님이 조국광복이라느니, 어쩌니 하면서 외워대던 이육사의 시'청포도'가 새삼 떠오르는 계절이다.

  나라를 잃고 먼 이역에서 고국을 그리는 안타까움과 향수, 그리고 밝은 내일을 기다리는 마음이 알알이 담겨있는 이 시는 청순하고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순후한 인정과 전설을 꽃피우며 사는 고향을 한 폭의 그림으로 펼쳐 보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늘날 고향은 육사가 그리던 고향과 너무 거리가 멀다. 고향엔 늙고, 병들고, 지친 사람들이 서로 품앗이하고 위로 받으며 한사코 살아가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남해에는 할머니들이 유모차를 밀고다니는 모습이 눈에 띄게 늘었다. 아이 하나 없는 시골에 웬 유모차가 이리도 많을까?  이상해서 볼 때마다 유모차는 텅 비어 있다.  어떤 때는 마늘종이며 호박, 옥수수, 고추 등이 실려있기도 하고, 간혹 빨랫감 같은 것이 있기도 하다. 한번은 할머니에게 물어봤더니, "허리가 아파서 안그러나. 헤겁고 바꾸가 네 개나 이싱께 심 안들어 좋고, 손주놈 생각함시로 간께 더 안좋나!"한다. 순간 실려있던 주먹만한 호박이 갓난아이 얼굴처럼 빛나 보인다.

  유모차가 꼬부랑 허리를 지지해주는 지팡이 대신으로, 자잘한 물건을 싣고 다니는 무거운 딸딸이 대신으로 이렇게 훌륭하게 재활용될 수 있구나. 감탄을 하면서도 곧장 서글픈 생각에 젖어드는 이유는 뭘까?  난데없는 '유모차 붐'이 오늘날 우리 농촌 현실을 기막히게 역설적으로 말해주기 때문이다.

  아기 울음소리가 끊인 지 오래인 우리 농촌은 이미 거대한 노인병동으로 변하고 있다. 그야말로 전국 농촌이 저출산․고령화란 깊은 병에 걸려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 우리 남해만 하더라도 1년에 2천명 정도씩 인구가 준다. 반면 태어나는 아이는 200여명 고작이다. 고령화 지수도 전국에서 가장 높다. 통계상으론 100명중 25명이 65세 이상 노인이지만 훨씬 심각하다. 읍을 제외하면 열에 일곱은 노인들이다.

  남해군을 비롯해 각 지자체마다 인구감소를 막기 위해 다양한 출산장려시책을 펴고 있다. 하지만 국가가 아이를 낳지 않으려는 사회구조와 원인을 정확히 진단해 대책을 내놓지 않으면 성공을 거두기 어렵다고 본다.

  농촌은 도시와 소득격차도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 1990년 도시의 97.4%에 육박하던 농촌소득은 2002년 73.0%로 뚝 떨어졌다. 의료기반도 턱없이 허약하다.  젊은 사람들이 돌아와 살 기반을 갖추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한달 전 보건복지부는 앞으로 5년동안 3조원의 예산을 투입하는 '제1차 농어촌보건복지 기본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비슷한 시기 '저출산 시대의 인구정책에 관한 국제워크숍'도 열었다. 농어촌 복지와 인구 감소를 막기 위해 많이 노력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과거 어떤 정권에서는 󰡐돌아오는 농촌󰡑을 부르짖으며 40조원을 쏟아부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농어촌 대책이 화려하게 발표되었지만 농촌은 비어가고 사람들 허리는 갈수록 휘어졌다. 정책입안자들이 유모차를 밀고다니는 농촌 할머니들을 본다면 무슨 말을 할까.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오는 손님'을 위해 올해도 하얀 모시수건을 준비해 두어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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