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때부터 음악적 소질이 있음을 알고 음악고등학교로 진학을 했고 전경대(전투경찰대)를 졸업한 그가 결국 정착한 장르는 솟대였다. 그가 들고 다니는 명함에는 솟대작가라고만 돼있지만 직접 생산해내는 작품들은 너무나 다양해서 멀티작가로 칭해도 될 것 같았다. 건물을 용도에 맞게 리모델링하는 일, 나무를 조각하여 그럴 듯한 형상을 만드는 일, 누군가 예술품을 주문하면 막힘없이 만들어내는데다 재활용품을 이용한 환경작품까지도 절대영감으로 창조하여 우리 앞에 버젓이 내놓는다.
상주면 양아리 1853-2번지(남해대로 1299번길 35-20)국도변 한켠에는 크고 작은 조각 작품들이 비바람을 가리는 막도 없이 24시간 언제나 열려있다. 누군가 마음만 먹으면 작품을 하나둘 집어가기 십상인 상황을 그는 스스로 만들어놓고 있었다. 작가의 혼으로 빚어낸 귀중한 작품을 누군가 마음에 들면 가져가도 된다고 용인하는 일이 세상천지 어디에 있겠는가. 그 이해 못할 일이 그동안 그에게서 일어났고 천 개 정도의 작품이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주어졌다. 그는 자연이 준 소재로 만든 작품이기에 마음에 드는 사람이 가져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단언했다. 분명 노마인드 정신으로 무장돼 있지 않으면 그렇게 답할 수 없는 것이다.

강 작가는 어떤 이가 가져다 준 물건을 받아드는 순간부터 무슨 형상을 만들 것인지가 미리 그려진다고 한다. 어느 날 큰 나무둥치를 받게 되었을 때 여성상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조각을 하게 되었는데 완성한 후 자신도 모르게 애정이 생기더란다. 그래서 여기에 진열된 작품 중 제일 소중히 여기며 아끼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도 누군가 마음에 들어 하고 자신의 마음이 움직이면 고민하지 않고 줄 것이라고 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가장 아끼는 물건은 안전한 곳에 보관을 하고 애지중지하는데 그것마저도 자연의 순리에 맡기고 마음가는대로 살겠다고 하는 사고는 초월적 삶 그 자체였다. 
잠자는 시간이 제일 좋다는 그의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다 들은 후에는 공감이 되고도 남았다. 이유인즉슨 수면을 취하고 있으면 꿈속에서 작품 구상이 떠올라 일부러 잠을 청하게 되고 그 시간을 즐기면서 모티브를 생산해낸다는 것이었다. 수잠을 자다 벌떡 일어나 조금 전 생각났던 아이디어를 메모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응용을 하는 그는 분명 몽작으로 끊임없는 창조를 하는 신비로운 사람이었다. 
그가 여기에 자리를 잡은 것은 12년 전이었고 카페가 생긴 것은 4년 전이었다. 현재 화가로 활동하는 사촌여동생이 이것을 운영하고 있는데 그도 여기에 일조를 하고 있었다. 카페 내부에는 그녀의 작품이 눈길을 끌었으며 손님들이 남기고 간 포스트잇에는 소감 글들이 빽빽이 붙여져 있어 읽는 재미가 컸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듯이 관광객들도 볼거리가 많은 이곳을 놓칠 수 없었을 것이다. 인터뷰를 하고 있는 시간에도 길손들이 수시로 들어와 노도가 바라보이는 이곳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며 힐링을 즐겼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예술의 향기가 묻어나 딴 행동을 할 수 없었던 필자는 앞에 놓인 커피도 그대로 둔 채 그의 이야기에 심취해 있었다. 어떤 계기로 솟대를 만들었는지가 궁금하여 눈빛을 반짝이며 물었더니 “우리 선친께서 옛날에 이동면 화계에서 조선업을 하면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삼각솟대를 만들었다. 솟대 세 개의 모서리에 오리를 조각하고 오리 입에는 멸치와 디포리 같은 물고기를 물게 한 조각품을 7m정도 되는 장대 위에 달았고 바로 아래에는 풍향을 알게 하는 천을 이용한 기구를 달았다. 아버지는 우리나라 솟대의 원조였다. 사람들이 바다로 나갈 때는 꼭 솟대 앞에서 두 손 모아 빌고 배를 탔다”라고 했다. 하지만 본인은 아버지에게서 직접 솟대 만드는 것을 배우지는 않았다. 곁눈질로 눈여겨보았던 것을 어른이 되고 한참 후에 스스로 만들었던 것이다. 뱃사람들의 무사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의미로 세워졌던 그 솟대는 지금은 까마귀로 변형된 채 마을의 염원을 담고 우뚝 서 있다. 도민속문화재로 등록된 배선대에서는 매년 정월대보름이면 마을 사람들이 배선제를 올리고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다양한 작품 활동을 하는 그가 제일 처음 만든 것은 ‘흰발농게’였다. 한려해상국립공원에서 2013년부터 자원활동가로 활동하면서 멸종위기종인 흰발농게를 발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여동생인 김귀연 씨와 재능기부를 했는데 현재 고현면 이락사 갯벌에 조형물로 세워져 있다. 앞으로도 스티로폼을 이용해 갯게와 대추귀고동을 완성하여 이곳에 함께 세워둘 것이라고 한다. 환경의 소중함을 일깨우기 위해 수거한 스티로폼으로 만든 작품 50여점을 그동안 각종 환경 행사나 축제 때마다 출품하여 시선을 끌기도 했다. 그가 작품을 척척 잘 만들어내는 것을 신기해하고 보는 재미를 느낀 사람들은 어떤 재료가 생기면 혹시나 하고 그에게 갖다 준다. 지금까지 그가 구상한 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작품이 하나도 없었다는 말에서 완벽한 영감의 소유자라는 인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예술적 재능이 탁월한 그가 현재 강의를 하고 있는 곳은 안타깝게도 남해가 아니고 사천이다. 사천문화원에서 강의를 하는 그는 민속문화작품을 문화원마당에 세워놓았다. 그의 재능이 탐이 난 사천에서는 위치 좋은 곳에 작품공간을 줄 테니 꼭 와서 창작활동을 해주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아직 결정을 못 내리고 고민 중이었다. 그는 그동안 남해 곳곳에 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이제는 세월 속에 마모돼 없어지고 현재는 상주 임촌마을에 솟대공원만 유일하게 남아있다. 

이동면 화계가 고향인 그는 우리 남해도 이웃 도시처럼 관광객을 더욱 많이 끌어들이기 위한 대비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했다. 이곳 양아리에 유배문학관을 이전하여 금산에 올라갔던 사람들이 유배문학관을 들리고 노도로 가는 유람선을 이용하면 삼박자를 갖춘 관광지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찾을 것이라고 했다. 김만중 초가집과 마차는 거의 마무리 단계였는데 나중에 군에 기증을 하면 노도로 옮겨져 관광지의 면모를 한층 더 높일 것이라고 흐뭇해했다.
그가 공을 들이며 만들고 있는 마차를 보다가 아기자기하게 진열된 작품들로 다시 눈길이 머물다 작은 새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마음에 든다고 했더니 조금 전에 말한 것처럼 그냥 주겠다고 했다. 고맙고 미안하기도 하여 어떻게 할까를 고민하고 있는데 읍내에 나가면 막걸리 한 잔을 사달라고 한다. 쉬운 대안책이 마음에 든 필자는 기분 좋게 그것을 수락하고 마음이 가뿐해졌다. 오는 목요일 강대근 솟대작가를 만나면 그날 못 다한 이야기들을 또 나누며 심취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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