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포토시스’(세포자살)와 ‘네크로시스 necrosis’(세포손상)는 똑같은 세포의 죽음입니다. 죽음의 의미로 보면 같은 맥락으로 보이는 듯하나 그러나 여기에는 상반된 뜻이 내포되어있습니다. 세포 자살은 스스로 죽음을 택함으로써 전체를 살리는 의미이고 네크로시스는 화상 타박이나 맹독 약물에 의한 세포 손상을 말합니다. 의미상으로 보면 생과 사의 혼미함 속에서도 아포토시스의 헌신이 있기에 생명의 존속이 가능한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인체 내에서 아포토시스의 자기애 적(自己愛 的)인 삶과 같은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내 속에서 세포의 지극한 헌신이 결국 나의 생명을 이끄는 동력이 되는 경험은 미세한 영역이어서 좀처럼 인정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인체는 경이롭게도 이처럼 미세한 세포 하나가 그 주인인 나를 위해서 헌신하거나 희생할 정도로 바라보는 시야를 넓히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감정의 메커니즘에 젖어 자기를 구성하고 있는 세포만도 못한 인간의 탐욕이란 게 얼마나 부질없는지 깨닫게 해줍니다. 육체는 삶과 죽음 사이의 균형을 잡는 역할을 하는 화학물질을 분비하는 데 그 화학물질이 우리의 의식으로 좌우됩니다. 이른바 아포토시스를 통하여 새로운 몸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정적 의식과 긍정적 의식에서 오는 차이는 생(生)과 사(死)의 극단을 치닫게 합니다. 질병의 관점에서도 병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더 악화가 되지만 반드시 그렇게 볼 것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느 순간이든 의식이 긍정적으로 바뀌면 병든 나쁜 세포는 자살하고 새로운 세포가 돋아나는 자율 활동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의 의식이 순간마다 감정에 따라 일희일비하는 여지가 바로 생명의 살림과 직결된다는 점에서 예사로 볼 일이 아닙니다.

죽어 없어지고 또 새로이 태어난다는 경험을 통하여 사람이나 동식물은 성쇠(盛衰) 명운(命運)의 운을 반복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한 생사의 경험에서 날마다 새로운 날을 맞이하는 지혜를 터득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 새로움을 열 수 있는 동기를 끊임없이 불어넣어 줄 훈련이 필요한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예로 든다면 좋은 의미의 문구나 성현의 가르침이 새겨진 말 등을 지속해서 되뇌거나 명상을 통하여 심신을 아름답게 가꾸는 일련의 과정입니다. 우리 인체를 구성하는 세포 인자에게 새로운 믿음이나 신념을 일으킬 수 있도록 긍정적으로 배려하는 것이 고귀한 생명력을 잇게 하는 자세입니다. 또한, 이것이야말로 아포토시스의 헌신에 보은하는 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는 고유의 메커니즘이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생각 감정 욕망이 나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내가 있으니 생각이 있고 생각이나 감정은 나와 동떨어질 수 없는 관계라 생각할 수 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체의 고유한 메커니즘은 이러한 사념(思念)에 매몰되지 않고 더욱 새로운 질서가 태동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유의 메커니즘이 감정, 생각, 행위를 통솔하는 위대한 나의 실체입니다. 이것은 복잡한 의식의 상태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고요한 본성이 정점에 이를 때라야 만날 수 있는 고귀한 품성입니다. 내 안으로 나를 사랑하는 기운을 불어 넣어주면서 위대한 나의 실체를 만나는 일, 이것이야말로 나를 나 되게 하는 최고의 비전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저작권자 © 남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