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밖에 안 남은 화전표구사 필요한 사람들 있으니 하는 데까진"
"지역서예사와 대가들의 작품을 볼 수 있는 상설전시관 생겼으면”

 

누구에게나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날짜가 있다. 대개 기념일이라고 부르는 날이다. 가령 남해신문사에게 1990년 5월 10일 목요일은 특별한 날이다. 창간일이기 때문이다.

1989년 8월 29일, 포털사이트에 물어보니 이날은 화요일이었다. 화전표구사 박근규 대표가 기억하는 그날 오후 6시경의 남해읍에는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가 처음으로 남해에 발을 디딘 날이기 때문에 그는 이날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그러니까 엊그제 지나간 2018년 8월 29일 수요일은 그가 남해에 발을 디딘지 꼭 만 30년인 날이었다. 그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날이다.

지난 2001년 8월 29일자 남해신문은 ‘남해에서 살아보니’라는 꼭지를 단 ‘강원도 고성출신 표구점 주인 박근규 씨’에 대한 스토리를 싣고 있다. 양연식 기자가 쓴 글인데 “꼼꼼함과 노하우로 터전 마련했다” “개업 집 도우러 왔다가 남해 정착”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이는 물론 박근규 대표가 내민 스크랩북에서 본 것이다. 그는 자신의 스토리와 관련된 것은 무엇이든 스크랩북에 간수해놓고 있었다. 그 스크랩북을 찬찬히 넘겨보니 그가 남해에 발을 디딘지 10년이 되는 해마다 그는 무언가 의미 있는 이벤트를 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0주년이 되는 지난 1999년엔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유명 서예가들의 작품들을 가지고 남해우체국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100만원의 성금도 지역사회의 사회복지기관에 기부했다. 남해 정착 20주년이 되는 2009년엔 100만원의 향토장학금을 기탁했다. 30년이 되는 올해는 어떤 이벤트를 구상할 지 궁금하다. 뭔가 특별한 이벤트가 분명히 나올 것임을 짐작한다.


남해에서 30년 삶

박근규 대표는 1958년생이므로 올해가 환갑이다. 올 초에 지나간 생일에는 선아와 소영이, 정호 세 자녀가 마련한 멋진 식사자리에서 금일봉도 받았다고 한다. 세 자녀는 28, 25, 22살로 꼭 3년씩 터울이다.

그가 화전표구사를 개업한 날짜는 그가 남해에 발을 디딘지 1년 반쯤 뒤인 1990년 12월 15일 토요일이다. 속초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서울에서 표구사를 열고 있던 열한 살 터울의 큰형 네에 가서 표구를 배웠다. 그 때가 열여섯 살 되던 해인 1974년이었다. 주경야독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복무를 마친 뒤에는 독립해서 직접 표구사를 차렸다. 표구로 잔뼈가 굵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던 1989년 어느 날 해오던 서울의 표구사를 접고 잠시 쉼 호흡을 하고 있을 때 부산에 정착한 작은 형네가 미장원을 개업한다면서 그곳의 인테리어를 그에게 맡겼다. 그 일이 끝나갈 즈음 남해에서 누군가 표구사를 개업한다면서 그에게 도와달라는 기별이 닿았다. 남해로 오는 버스 안에서 그는 ‘몇 달간이면 되겠지’라고 짐작했단다.

그러나 얼마 안가 그의 이 짐작은 점점 빗나가고 있었다. 첫발을 디딘 남해는 그 어느 곳보다 따뜻함을 느끼게 했다. 말씨가 다른 외지인에게 처음에는 매우 거칠게 대했지만 한번 관계를 터고 나면 그 정을 끊을 수 없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 남해였다.

남해로 오고 나서 네 계절이 다 바뀐 어느 날 서른 살이 넘은 그에게 중매쟁이가 나타났다. 선을 보러 간 자리에 나온 사람은 천생연분 배필이 된 다섯 살 터울의 남해처녀 김서분 씨였다. 두 사람은 1990년 11월 11일 일요일 오전 11시 당시 군청 앞에 있었던 해양예식장에서 백년가약을 맺었다. 길일로 알려진 그날 결혼식장은 바빴다. 그 중에서도 11이라는 숫자가 세 번 겹치는 때에 그의 결혼식이 잡혔으니 길일 길시를 중히 여기는 그의 세계관을 알 수 있다.

신혼의 신바람으로 개업한 화전표구사에는 그의 꼼꼼한 표구솜씨에 감탄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갔다. 표구는 늘상 보고 싶은 서예나 그림, 사진 등 자신에게 특별한 가치를 가진 작품에 알맞은 틀을 입혀 집안이나 사무실 등에 걸어두기 위한 장치를 만드는 과정이다. 특정 공간의 인테리어를 완결하는 소품이기도 하다.


하나밖에 안 남은 화전표구사

표구사는 자연히 서예가, 화가, 사진가들과 교류하게 된다. 그는 고 묵해 김용옥 선생으로부터 이어지는 남해출신 서예대가들의 인맥과 작품세계를 꿰뚫고 있다. 걸어 다니는 사전이라고 보아도 좋다. 김광세 이비인후과 원장의 선친인 김갑규 선생, 박익주 전 국회의원의 선친인 박진용 선생과 더불어 화산 이성숙 선생이 주도하여 1975년 창립한 남해서도회는 수없이 많은 문하생들을 배출하면서 남해의 서예 역사를 이끈 분들이다. 우한욱, 한석현, 하종현, 정세환, 이삼표, 양병량, 최민렬 선생도 남해서예사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대가들이다.

박근규 대표는 남해서도회의 일원으로 남해 서예가들의 활동을 묵묵히 뒷받침하는 역할을 충실히 해왔다. 지난 1995년 화산 이성숙 선생의 개인전을 열도록 회원들과 함께 노력한 기억은 그가 가장 뿌듯해하는 기억이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기라성 같았던 대가들이 스러져가고 서예프로그램도 문화원이나 향교, 도서관 등의 프로그램으로 전환돼가면서 서예가들이 운영하는 서예교실은 명맥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졌다. 한 때 읍내에 네 개나 되던 표구사 역시 명멸을 거듭해오다가 지금은 박근규 대표의 화전표구사 한 곳 만이 유일하게 남았다.


소장작품들을 어이 하리

화전표구사는 남해군청 정문 쪽 길 가운데쯤에 있다. 2002년에 현 위치에 자리 잡았으므로 올해로 15년째 그 자리다. 박근규 대표는 그 이듬해인 2003년 종합문구점 해피투데이를 개업했다. 해피투데이를 지키는 사람이 아내 김서분 씨다.

화전표구사는 문이 잠겨있는 시간이 많지만 그 안에는 항상 작고 낡은 TV가 켜져 있다. 표구사를 찾아온 손님에게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그만의 방식이다. 화전표구사와 해피투데이의 거리는 몇 십 미터밖에 안 된다. 아내가 가사 때문에 해피투데이를 잠시라도 비워야 하는 시간에는 그가 해피투데이를 봐주고 있다.

표구사는 더 이상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업이 아니다. 한 달 매출액이 고작 100만 원도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화전표구사의 문을 닫을 수 없다. 하나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뭄에 콩 나듯 한 사업이라도 필요한 사람에게는 꼭 필요하다. 그는 언제까지 화전표구사를 지킬 것인가? “하나밖에 남지 않았으므로 하는 데까지 해보겠다”는 것이 그의 대답이다.

그는 묵해 김용옥 선생의 작품과 그의 아들인 묵산 김준기 선생의 작품을 한 보따리 가지고 있다. 남해 서예대가들의 작품도 다수 소장하고 있다. 언젠가는 이들 작품에 생명을 불어넣어 군민들에게 향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으면 하고 바란다. 언제 그런 기회가 올 것인가?

만약 새로 지을 남해군청사에 전시회를 열 수 있는 상설전시공간이 만들어진다면 가능해질지도 모를 일이다.

남해에 발을 디디고 30년을 살아낸 그는 이제 자신의 삶을 반추하고 있다. 개인적인 삶에는 아쉬움이 없다. 하지만 서예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서예문화가 독립적인 하나의 영역으로 서지 못한 것에는 아쉬움이 많다. 언제쯤 그 아쉬움을 해소할 수 있는 날이 그에게 다가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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