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참전을 했던 이충방 지회장을 인터뷰한 내용이 지난 17일에 보도되었지만 8월이 가기 전 6·25참전, 역사의 현장에서 투혼을 불살랐던 분들을 한 번 더 모시고 싶었다. 그래서 기회를 보던 중 마침 6·25참전유공자회 월례회 행사를 취재 갔던 차에 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3인을 만날 수 있었다. 6·25참전을 했던 단체는 이외에도 무공수훈자회가 있지만 유공자회와 기회가 닿아 인터뷰를 요청했고 그때의 일들을 들을 수 있었다. 그 당시 사진을 구하기 어려웠으나 다행히 장희종(전)사무국장이 보관했던 사진이 있어 몇 장을 제공받을 수 있었다.   -편집자 주

△두 분 성씨가 똑같은데 혹시 친척이 아닌지, 출생지는 어디인지 
= 친척은 아닌데 우연히도 성씨가 같아 반가우면서도 좀 놀라웠다. 나(정용수)는 33년생이고 서면 노구리 출생이다. 나(정한규)는 32년생이고 이동면 초양리이다. 나(장희종)는 33년생이고 남해읍 아산리에서 출생했다. 

△언제 6‧25참전을 하셨는지, 군대생활에 대해 듣고 싶다.


= 우리는 1953년 휴전이 되던 해 7월 27일 이전에 입대를 했다. 그때 당시 만21세 만22세였는데 배를 타고 제주도로 가서 3개월 정도 훈련을 받은 후 배치가 되었다. 나(정용수)는 후방인 부산으로 가서 공병기지창에서 2년 8개월 근무했다. 건설물자 창고에 화재가 발생하면 불도 꺼야 하고 항상 출동대기를 해야 했는데 지금으로 치자면 소방서 역할인 셈이다. 나는 만기제대를 했는데 4~5년 이상 복무한 사람을 먼저 제대시켰고 제대희망자 신청도 받았다. 
나(정한규)도 제주도에서 3개월 정도 훈련을 받았고 전방인 강원도‧경기도에 배치 받아 10년 정도를 복무했다. 육군상사로 있을 때 폐가 안 좋아 의병제대를 했다. 제대할 때 위로금을 조금 받아서 나왔는데 지금도 약을 복용하고 있는 중이다. 나(장희종)도 제주도에서 훈련을 그렇게 받고 배치가 됐다. 내가 여덟 살일 때 아버지께서 한학을 1년 동안 가르쳤다. 한학을 배운 후 아홉 살일 때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월반을 하여 다른 친구들과 함께 졸업을 했다. 군에 가기 전 부산지방법원 법원등기소에 1년 정도 다녔다. 처음에는 강원도 양구에 갔는데 내 서체가 눈에 띄었는지 서무계본부에서 조사를 나왔다. 입대하기 전의 경력을 인정받아 국방대학에 차출되어 육군본부로 갔고 행정계에서 근무했다. 그곳에서 2년 6개월 정도 복무를 하고 제대를 했다. 
△군 생활에서 제일 어렵고 힘든 부분은 무엇이었는지


= 최고로 힘든 것은 배고픔이었다. 하루에 세끼는 먹을 수 있었는데 언제나 양이 부족했다. 건빵도 3일에 한번 나오고 미군 시레이션(통조림, 초콜릿 담배 등)을 공급받았지만 먹어도 또 먹고 싶었다. 그래서 제주도에서 훈련을 마치고 항구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은 훈련병들을 보고 ‘명태가 온다’는 말을 했었고 제대를 하고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도 해골이 온다고 했을 정도였다. 얼마나 먹는 게 부족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말들이었다. 그리고 겨울에는 강추위를 막을 수 없어 동상에 걸리기도 했다. 어떤 사람은 나(장희종)에게 난로가 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는 간절함을 전하기도 해서 도움을 준 적이 있다. 나(정한규)는 전방에 있을 때 물고기 요리와 쌀밥을 자주 먹었다. 그곳은 쌀밥이 후했다. 방한복 방한모가 부족했던 시절 추위에 떨었던 그때 전우들을 만나면 배고픔과 추위에 대한 이야기들을 한 번씩 한다.

그 당시 남해에서는 몇 명이 동원되어 갔는지, 지금 생존하신 분은 어느 정도 되는지


=내(장희종)가 갈 때는 남해에서 한 50명쯤 함께 갔다. 우리(정용수, 정한규)가 갈 때는 몇 명 갔는지 알 수 없지만 제법 많이 갔다. 지금 생존한 사람도 많은 편이다. 하지만 월례회를 하다 보면 사람이 자꾸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국가보훈처에는 350명이 남해에 생존해 있다는 걸로 등록돼 있지만 우리 회원으로 등록된 인원은 290명이다. 월례회에 잘 나오는 회원은 30~40명 정도 된다. 

△6‧25참전유공자회에서는 어떤 활동들을 하는지 
=매년 전적지순례를 하고 있다. 대전호국원‧임실호국원‧거제포로수용소‧남해군민동산에 있는 6‧25‧월남참전국가유공자기념탑에 매년 40여 명이 참석하여 추모제를 지낸다. 3.1절‧현충일‧6‧25행사도 매년하고 있다. 매월 17일에 월례회를 하고 봄‧가을에 2박3일로 여행을 다니다가 요즘은 몸들이 불편하여 당일로 행사를 하고 있다. 

△오랜 시간 앉아 계시면 불편하실 줄 안다. 하지만 끝으로 개선이 필요하거나 부탁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속 시원하게 들려주시길
=오늘도 여기 3층까지 올라오는데 몇 번을 쉬었다. 우리 회원들 평균나이가 거의 86세인데 계단 턱이 높아 겨우 하나씩 난간을 잡고 올라온다. 높은 층이 아니면 좋겠고 외곽에서 여기까지 오려면 힘드니 터미널에서 좀 더 가깝고 접근하기 쉬운 곳으로 사무실을 이전해줬으면 한다. 그리고 우리는 버스를 타고 움직이는데 교통비가 현재 1300원이다. 호주머니에 동전300원을 준비하는 것도 힘들고 2000원을 줄 경우에 700원을 돌려받아야 하기에 불편하다. 교통비를 1000원만 했으면 더 바랄 게 없다. 일례로 상이3급 이상은 무임승차가 가능하나 우리 유공자들은 차별을 받는다. 우리는 전방에서 나라를 지켰는데 차비 정도는 배려를 해 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6‧25참전유공자들이 돌아가고 나면 우리 후손들이 부모님들이 걸어왔던 길을 기억하고 보존하기 위해서라도 가칭)후손자녀회를 조직하면 좋겠는데 자식들이 객지에서 거의생활을 하기에 결성이 어렵다. 그걸 하려고 하면 유공자회 단체가 만들어야 하는데 기금도 없다. 법제화가 안 돼 애로점이 있지만 추진을 해 볼 생각이다. 부모가 6‧25참전했다는 것이 역사 속에 묻히게 되면 다시 되살릴 수 없다. 어떤 자식은 자신의 아버지가 6‧25참전유공자라고 6‧25전시관(개인전시관)을 만들어 자료들을 전시하고, 어떤 자식은 자신의 아버지가 유공자라는 말만하고 끝나는 경우도 있다. 우리는 어떤 자식을 원하겠는가, 어떤 후손을 원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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