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은 6월과 8월이 되면 다른 달과 달리 저절로 생각하는 부분들이 많아지고 역사의 뒤안길을 한 번쯤 걸어가게 된다. 전쟁과 광복은 애초부터 우리나라와 관계없는 단어였다면 좋았겠지만 불행히도 피해가지 못하고 온몸으로 느껴야 했다. 오랜 암흑을 이겨내고 광명의 기쁨을 맞이했을 때 이젠 국가의 재건에만 힘을 쏟으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역사의 수레바퀴는 돌고 돌아 월남참전이라는 큰 숙제를 던져주며 20대 초반이었던 우리 젊은 건아들을 전쟁의 포화 속으로 끌어들였다. 1966년 10월 이충방 지회장도 목발을 짚고 3부두에서 배를 타고 월남을 해야 하는 운명을 맞이했다. 살아오면서 겪어야했던 그 역사의 현장 속으로 잠깐 들어 가 보았다.  -편집자 주

△여기 남해에 정착하기까지 어떤 과정을 밟아 오셨는지 
-나는 부산에서 태어났고 다초초등, 부산해동중, 부산경남상고, 연세대 상대경영학3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시기에 군대를 가게 되었고 1966년에 월남을 지원했다. 그곳에서 2년 4개월 정도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와 복학을 하려고 했지만 가정 형편이 어려워 진학을 포기했다. 우연한 기회에 경기도 안성으로 갈 기회가 되어 그곳에서 6년 동안 과수원을 경작하다가 1977년 4월에 아버지 고향인 남해로 내려왔다.

△월남참전을 하지 않았다면 대학을 졸업하고 학문을 연구하거나 사회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을 텐데 그 점이 아쉬운 부분으로 남아있을 것 같다. 남해로 오셔서 했던 일들이 많을 줄 안다.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1977년 4월에 남해로 내려와서 그해 8월부터 새마을지도자1년, 농촌지도자 회장6년, 1985년부터 마을이장2년, 어촌계장5년을 하며 마을을 위해 봉사했다. 그 후로는 줄곧 농사를 지으며 마을 일을 수시로 도왔다. 
△월남참전을 하기 전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곳에서 수행했던 일은 무엇이었는지
-1966년 백마부대 본진으로 갔는데 군대에 보수공사를 하다 미끄러지면서 탄통을 밟아 발바닥이 10㎝정도 찢어졌다. 월남을 일주일 앞둔 시기에 일어난 사고여서 상처를 대충 몇 바늘 꿰매고 목발을 짚고 갔다. 
3부두에서 부모님의 배웅을 받게 됐는데 우리는 배 안 갑판위에 있었고 부모님은 부둣가에 있었다. 목발 짚은 걸 보이지 않으려고 숨겼는데 휴가를 나왔을 때 부모님은 이미 그것을 알고 있어 마음이 무척 아팠다고 했다. 
월남하기 전 9사단인 양평 본부포대에 근무를 했는데 인사과 장교계로 전출을 가게 됐다. 월남할 때는 709 인사, 행정계로 명을 받고 30연대 파견대장으로 발령받아 십자성부대 외곽근무를 2년 4개월 정도했는데, 52포병대에 6개월 근무한 것과 사단사령 명령으로 30연대 보안부대 요원으로 6개월 근무했던 것이 모두 포함된다. 주월한국군사령관 표창을 받고 1계급 특진, 1969년 2월 9일 귀국과 동시에 제대했으니 군대생활은 총 40개월이 된다. 
△월남에서 고엽제의 존재를 미리 알고 있었는지, 알고 난 후에는 어떤 조치가 있었는지


-고엽제 뿌리는 것을 우리는 전혀 몰랐다. 헬리콥터와 비행기가 수시로 날아다닐 때 보급품을 운반하는 것으로만 알고 전혀 의심을 하지 못했다. 미군들이 이것이 제초제니 살갗에 닿으면 안 된다고 주의를 줬으면 조심을 했을 텐데 그런 유의사항이 없었다. 
사람들이 제초제를 맨손으로 저어놓으면 그것을 헬리콥터에 싣고 가곤 했다. 그것을 뿌린 곳에는 식물이 말라죽었는데 빠르면 일주일 안에 그렇게 되었다. 뿌리까지 죽는 그것은 근사미 원액이었다. 이것이 땅에 닿으면 땅이 푸석거리게 되고 결국 땅을 못 쓰게 된다. 
△현재 고엽제 후유증은 없는지 
-6년 전부터 ‘전립선 말기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치료를 하고 있는 중인데 상이3등급으로 판명이 났다. 인근 대학병원에서 진단을 받고 호르몬 약과 미역귀 빻은 가루, 암 치료에 좋다는 한약을 먹고 있다. 그걸 먹어서 그런지 현재는 더 악화되지는 않고 있다. 머리에도 부스럼이 생기고 비듬도 많아졌는데 차츰 나아지고 있다. 무릎에도 흰 반점이 생기고 몸이 간지럽고 등에도 반점이 생기고 있다. 그래서 현재 연고도 바르고 약도 복용하고 있다. 나보다 심한 사람은 피부괴사로 인해 신체 일부를 절단하는 일들이 종종 있었다. 고엽제로 인한 피해가 3대까지 대물림되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 나는 거기에 비하면 약과인 것 같다. 
△월남전 참전자회 남해군지회에는 현재 회원이 몇 명 정도 되며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지
-월남회전우회 인원은 126명인데 회원으로 등록된 사람은 현재 80여 명이다. 우리 임원들은 매월 모임을 하고 있고 회원들은 총회할 때와 전적지순례를 할 때 같이 하고 있다. 
4년 전부터는 매년 이동면 앵강고개에 있는 남해군민동산에서 6‧25, 월남참전국가유공자기념탑에 참배하고 있다. 지회장을 맡은 이후부터 그곳에서 제사도 지내고 꽃바구니도 바친다. 대전 현충원과, 국립산청호국원에도 3년 전부터 참배를 하고 있다.
△남해군지회에서는 그동안 어떤 행사들이 있었는지


-올해부터 월남전적지순례를 하기 위해 베트남으로 갔다. 군에서 80%지원을 했고 나머지는 본인이 부담했다. 지난 4월에 우리 회원 15명이 갔다 온 후, 고엽제회원 18명이 같은 장소에 또 갔었다. 
그동안 베트남을 3번 갔는데 그 당시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내가 근무했던 곳에는 월남부대와 집이 들어서 있었고 십자성부대는 출입문 기둥만 남아있고 안케패스 전투를 했던 곳에는 그때 있었던 탑(비석)은 그대로 있었지만 글자는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이번에 회원들을 한 명이라도 더 보내기 위해 나는 가지 않았다. 
옛날에 갔다 온 곳이기도 해서 다른 회원에게 기회를 준 것이다. 내년에는 우리 회에서 다낭을 갈 생각이다. 맹호부대가 주둔했던 곳으로 관광지가 많다. 호치민시(구 사이공)에는 구찌터널이 있는데 그것이 베트콩요새지였기에 꼭 가보고 싶다.  
△슬하에 자녀는 어떻게 되는지 자녀들에게는 별 이상이 없는지
-2남 2녀를 두었다. 큰아들은 서울에서 컴퓨터 회사에 근무하고 있고 작은 아들은 창원에서 두산중공업에 다니고 있다. 딸 둘은 부산에서 자식 놓고 잘 살고 있다. 자식들에게 고엽제와 관련된 증세는 없지만 한 번씩 그런 일이 생기면 어떡하나 걱정은 된다. 
△최근에 가장 기뻤던 일이나 기억에 남는 일이 있었다면 듣고 싶다. 
-아버님이 경찰공무원 신분으로 6‧25참전을 두 번이나 했는데 남해군민동산 기념탑에 아버님 이름이 빠져 있었다. 그래서 여러 절차를 밟아 5월에 신청을 했는데 지난 7월에 유공자로 판정을 받게 되었다. 
기념탑에는 ‘이동면 이민옥’이라는 이름이 등재되어 늦게나마 명예가 회복되었다. 아버지는 지금으로부터 13년 전 84세였을 때 갑자기 돌아가셨다. 지금도 아버지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자식으로서 도리를 다한 것 같아 기쁘기 그지없다.
△전쟁이라는 단어가 생소한 사람들이 많다.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던져주고 싶은 메시지나 도움 될 만한 내용들이 있다면
-얘기해봐야 소용없다. 전쟁을 겪어봐야 사회가 돌아가는 걸 안다. 대한민국이 너희들이 보기에는 좋은 것처럼 보이지만 전쟁을 겪은 우리들이 볼 때는 잘못되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현재 월남참전용사 생존자가 20여만 명, 6‧25참전용사 생존자가 20여만 명인 것으로 알고 있다. 
나라를 끝까지 지킨 생존자들을 잘 예우해 주고 혜택을 주고 있지만 더 많은 관심을 가져줬으면 한다. 우리는 나라의 소중함을 알고 어디에서나 누구든 애국정신을 발휘하는 참다운 국민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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