ꡒ고통이 우리를 성장시켰습니다ꡓ


MK택시 성공신화 이룬ꡐ친절 전도사ꡑ 류태식 부회장

만난 사람=김우태 편집국장


지미 카터, 고르바쵸프, 엘리자베스 여왕, 달라이 라마, 더스틴 호프만, 브룩쉴즈….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세계적인 인물들이 일본을 방문해 꼭 타보고 싶었다고 말한 것이 MK택시라면 다소 믿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MK택시가 얼마나 유명한가를 알 수 있다.

남해인의 자긍심을 전세계에 드높인ꡐ친절 전도사ꡑ  일본 MK택시 류태식 부회장. 친절강의 차 고국을 방분한 그를 8일 오후 하동 우리들 병원에서 만났다. 병원 강당을 가득 메운 100여명의 의사와 간호사들을 대상으로 당일 아침 비행기로 입국해 2시간 넘게 서서 강의를 했지만 피곤한 기색은 전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건강했다. 그의 강연 모습은 일흔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신념과 열정으로 가득찼다.  눈빛은 부드러우면서 말투는 카랑카랑 힘이 묻어났다. 그리고 반세기를 일본에 살았으면서도 남해 사투리를 그대로 간직한 그는 여전히  영락없는 남해사람이었다. 형 류봉식 회장과 함께 이국 땅에서 가난과 차별의 고통을 극복하고 오늘날  MK라는 세계적인 그룹을 일군 성공신화의 주인공 류태식씨. 그는 남해군민들이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와 친절강의를 해주겠다며 약속하면서 바쁜 일정 가운데서도 흔쾌히 본지의 인터뷰에 응해 주었다.


[인터뷰내용]

 

요즘 국내에서도 MK택시의 서비스 정신을 본받자는 열기가 높습니다. 국내 강연일정과 요즘 근황을 말씀해주신다면.

한달에 한번은 한국에 와서 강연을 하는데 문제점이 많습니다. 일본에서 일이 바빠서 자주 강연을 못 오는 실정입니다.

이번 일정은 일주일 정도 잡고 왔습니다. 한국에서 엠케이에 견학을 많이 오는데, 올 때마다 엠케이에 대해 설명과 강연을 합니다.

시간만 허용되면 얼마든지 강연을 할 것입니다.


MK그룹은 어떤 기업인가?

주로 유명한 것이 엠케이 택시입니다. 엠케이 택시가 교토에서 시작해서 지금은 오사카, 도쿄, 나고야, 고베 등으로 진출해 있습니다. 그리고 본 회사는 주유소 업인데 교토에 32개가 있습니다. 또 산업회사라 해서 레져 관계 볼링장이 2개가 있고, 식당, 카라오케, 게임센터가 시내에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합쳐서 엠케이 그룹이라고 합니다.


MK택시가 성공신화를 거둘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물론 어려움은 많았습니다. 하지만 한국사람이라서 성공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 사람 같으면 자기 나라니까 따뜻한 물에 발 담그고 편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차별이 심했고, 억울함이 많았고, 눈물이 많았고, 너무나 고통이 많았기 때문에 지금의 엠케이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통이 우리를 성장시켰다고 생각합니다.


MK택시의 경영전략 핵심은 무엇인가?

고객들에 대한 친절을 베푸는 것입니다. 모든 회사가 안하는 것이 상식이었는데 우리 엠케이는 그 보편적인 상식을 깨고, 친절히 인사를 하고, 깨끗이 모시고, 불편이 없도록 신경을 쓰는, 다시 말해서 손님의 입장에서 사업을 펼친 것이 성공의 요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맑고 뜨거운 마음>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합니까?

친절해서 손님이 좋아서 많이 타지 않습니까. 그러면 수입이 많아집니다. 자연히 회사 경영자뿐만이 아니라 직원들까지도 마음이 뜨거워 집니다. 그럴 때 손님한테 친절해야 우리가 잘되는 것이라는 인식이 생기는 것입니다. ꡐ맑다ꡑ는 말은 결국은 손님을 위주로 해서 정정당당하게 사업을 하는 것입니다. 다른 회사가 잘 못되기를 바라지도 않고, 다른 회사가 뭐라고 하던 간에 시민들이 좋아하는 친절을 베풀기 위해서 아무리 피해를 당하고 억울함을 당해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손님을 위해서 경영을 하는 것이 ꡐ맑은 경영ꡑ이라 생각합니다.


최근 유봉식 회장님이 10년만에 다시 핸들을 잡았다는데, 무슨 사연이 있는지요?

도쿄 엠케이 책임자가 둘째 아들입니다. 둘째아들이 일 마치고 집에 갈 때 한 잔하고 집에 간 것 같습니다. 집을 가다가 지하철 직원과 싸움을 했는데 그것이 문제가 돼서 공공사업을 하는 경영자가 그런 일을 했다는 것은 그의 아버지인 제 책임으로 느꼈습니다. 그래서 동경 시민들에게 사과를 해야겠다는 마음에서 초심으로 돌아가 기사가 되어 일을 하면서 사과를 하게된 것입니다.


독도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또 어떻게 대처해야 옳을까요?

저는 법과 역사를 잘 모릅니다. 하지만 잘 아는 것은 일본에 사는 재일 교포들이 요즘 아주 활기를 띄고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류 열풍으로 일본 사람들이 한국을 엄청 좋아하기 때문이지요.  이 고마운 일이 독도로 말미암아 어그러질까 걱정입니다. 한국사람들도 냉정하게 처리했으면 좋겠습니다. 일본 사회에서는 이 문제로 별로 시끄럽지 않습니다. 시민들은 냉정합니다. 제 생각에는 일부분의 사람들이 독도 영유권 주장을 통해 자기들의 주장을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한국사람들이 그 일부 사람들에게 좌우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고향 남해에 대한 추억중 가장 인상 깊은 이야기 한 토막을 든다면?

초등학교 졸업하고 중학교를 갈 때가 됐는데 입학금이 없어서 학교 서무과 과장에게 가서 아버지가 입학금이 없는데 입학을 시켜달라고 계속 찾아가 부탁을 했답니다. 안 된다고 해도 계속 와서 부탁을 하니까 서무 과장이 어떻게 할 수 없어서 입학을 면제해줬는지, 입학금을 대신 내줬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입학이 돼 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오랜 시간이 지나 일본에서 한국에 들어왔을 때 하시는 말씀이 예전에 아버지가 그렇게 얘기를 했답니다. ꡒ내 아들이 중학교에 입학이 됐는데 돈이 없어서 학교를 못 간다면 아버지로서 책임이 막중하다. 죽어도 눈을 감고 죽지를 못할 것이다. 이 아이가 미래에 어떤 일을 할지 모르는데 돈이 없어서 학교를 못가서는 안된ꡓ다 면서 부탁을 했다고 말씀하셨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저의 아버지가 위대한 분이시구나 느꼈습니다. 나는 내 자식에게 그렇게까지 못할 텐데 그렇게 생각하니까 아버지의 위대함이 크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묘소의 작은 돌을 하나 주워 일본으로 가져가 힘들 때마다 그 돌을 보면서 견뎠습니다.


남해발전을 위해 제안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면?

저는 한국사정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어떻게 말을 해야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장사꾼으로서 할 말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그 곳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사업이든지, 고향이든지, 직업에 관계없이 내가 지금 살고 있는 현실 속에서 열심히 사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남해에 투자할 계획은 없는가?

현재로서 계획은 없고, 앞으로도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일본에서 장사를 하고 있지만은 일본에서 장사를 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돈만 가지고 와서 되는 게 아니라 경영자가 늘 선두에 서서 함께 뛰어야 하는데 우리는 그럴 자신이 없습니다.


남해 군민들을 대상으로 친절강의를 하실 생각은 없는지?

불러만 주신다면 언제든지 가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군민들에게 인사 한 말씀.

남해군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늘 일본에서 살면서도 힘들 때는 남해를 생각합니다. 남해에는 부모님의 묘소도 있고, 여기서 자랐고, 어려울 때도 있었고, 고생을 했기 때문에 고향이 머릿속에서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남해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집니다. 내가 태어난 곳일 뿐 아니라 남해인의 모든 힘이 저에게 힘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열심히 사시는 것이 저희들에게도 힘이 됩니다. 친절하시고, 열심히 노력해서 좋은 남해를 만들어 주시면 외국에 살고 있지만 우리들에게 힘이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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