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2월12일 ‘바르게살기운동 남해군 회원대회’에서 아름다운 가정상을 수상한 가이애다토끼꼬 씨를 빨리 만나고 싶었는데 5개월이 지나서야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분명 일본이름을 가진 일본여자였지만 우리말을 능숙하게 구사해서 자신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 말하지 않으면 전혀 모를 정도였다.
지금으로부터 26년 전 그녀는 종교생활을 같이 하던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고 지금까지 창선에서 살고 있다. 그동안 많은 세월이 흘렀듯이 그녀에게도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시집와서 2000평에 고사리 농사를 몇 년간 지었지만 생활이 빠듯하여 남편이 기관장으로 선상생활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것도 여러 이유로 지속할 수 없게 되어 그녀는 남편과 함께 집수리와 보일러 공사에 매달리며 생계를 이어갔다. 7년 만에 얻은 딸과 알콩달콩 잘 사는가 했는데 남편은 2004년 건강이 좋지 않아 오랫동안 고생을 하다가 딸이 10살 되던 해인 2009년에 세상을 떠났다.
예상치 못한 죽음에 직면하고 어떻게 살아야 될지 갈피를 못 잡고 헤매이던 때 그녀는 잠시 일본으로 돌아갈까도 생각했었다. 하지만 우애가 좋았던 형제들의 도움과 보살핌으로 약간의 안정이 된 것도 있었지만 역사속의 숨겨진 인물 고(故)박숙이 할머니를 만났던 이유가 컸다. 일본에서 역사 공부를 할 때 전혀 몰랐던 사실, 할머니가 위안부의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고 너무나 죄스러운 마음에 뜻을 같이하던 일본인 여성 20명과 함께 할머니를 찾아가 “나라를 대신해 우리가 용서를 구하러 왔다”고 했고 할머니는 “너희들이 남해 남자하고 행복하게 잘 살아주면 나는 용서해 준다”라고 하여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자리를 지키며 살 것이라는 다짐을 했었다. 그 약속은 사람이기에 깰 수도 있었겠지만 자신이 살 곳이 어디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할머니는 항상 우리를 기다려주고 만나면 좋아해 주셨다. 우리라도 계속 사죄하는 마음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결집하여 일요일마다 2명 씩 3년 동안,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말벗도 돼 드리고 맛있는 도시락을 싸가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름을 바꾸는 게 까다로워 일본식 이름으로 살고 있지만 2년 전에 귀화를 하여 정말 한국인다운 한국인으로 살고 있다. 애국가 부르기를 열심히 하여 1절을 외워 부르고 그녀보다 늦게 시집 온 일본인들이 이 나라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여러모로 돕기도 한다. 한국음식을 잘 먹고 잘 만들며 한국 사람들을 좋아한다는 그녀는 여기 시댁 형제들 울타리 속에서 사랑을 주고받으며 농담도 던질 정도가 되었다. 이곳의 바다가 좋고 공기가 좋고 환경이 좋아 고국을 그리워할 새도 없이 하루하루를 의미 있게 보낸다. 남을 돕는 근성이 강한 그녀는 결혼하고 아기가 생기지 않았을 때 1살과 3살 된 조카 두 명을 3년 동안 키워내기도 했다. 친척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컸기에 어려운 일을 잘 감당할 수 있었다. 일본에서도 남을 챙기는 일을 잘했는데 여기에서도 챙겨야 하는 일이 자주 생기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그녀에게 일복이 많다는 말들을 곧잘 한다.
그녀는 10년 전부터 농촌진흥청 국립원예특작과학원 남해출장소에서 무기계약직으로 일을 하고 있다. 일본사람들이 원예를 잘 돌보는 것을 높이 산 이유로 채용이 된 이유도 있었지만 주변 사람들로부터 모든 면에서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키위연구보조원으로 묘목을 관리하고 꽃가루 인공수정, 당도, 산도 측정을 하고 육종을 개발하는데 필요한 역할을 한다. 
사람들을 좋아하고 붙임성이 있는 그녀는 원예연구소에 오는 알바생들이나 계약직으로 오는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일본음식을 맛보여주는 일을 4년 동안 즐겨했다. 자신이 이렇게 베풂으로써 자신의 아이도 어느 곳에서 또 다른 베풂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초대한 손님들에게 정성을 쏟곤 했다. 하지만 아침 8시에 출근하여 저녁 6시 30분에 퇴근을 하고 일요일에는 읍내에 있는 교회를 다니기에 마을 사람들과는 사귈 시간이 부족한 관계로 현재 그렇게 친한 사람은 없지만 이웃을 만나면 기쁘게 인사하는 정도로는 지낸다.
그녀는 지금껏 살아간다고 외로울 새가 없었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딸과 함께 있으면  꼭 남편과 함께 있다는 착각이 든 데다 뒷바라지하기 바빴던 탓이다. 그런 엄마의 사랑과 희생을 잘 읽은 딸은 웃기도 잘하고 엄마도 잘 챙기며 사춘기를 잘 보낼 수 있었다. 지금은 가까운 대학 치위생학과에 1학년으로 재학 중이다. 웃음이 많은 딸은 엄마의 든든한 기둥이고 모든 것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남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된다는 교육을 받고 자란 그녀는 딸에게도 그런 것을 가르치고 빵 한조각도 옆 사람과 나눠먹으라는 말을 곧잘 해 준다. 자신이 살아온 것처럼 딸에게도 남에게 싫은 소리 한마디 하지 마라고도 가르친다.
받침이 없는 일본말에 비해 받침이 많아 어려웠던 한글을 익히면서 10년 동안 그림일기를 꼬박꼬박 썼다는 그녀, 한글을 쉽게 터득할 수 있는 길이 없어 스스로 독학을 해야 했기에 더욱 일기에 매달렸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은 일기장이 10여권이 되었으며 일기의 소중함과 필요성을 지금도 여전히 느끼고 있다. 거기에는 타국에서 견디기 어려웠던 일들이 깨알처럼 쓰여 있으며 힘들 때마다 자신의 감정을 정화시키고 자기성찰의 기록물로 되었기 때문이다. 일기를 통해 막혀 있는 부분을 확 뚫으며 자신과의 대화통로를 만들었다는 그녀는 충분히 지혜로웠고 아름다웠다. 친정어머니가 항상 신문을 펼쳐 읽고 일기를 썼듯이 그녀 또한 그렇게 하고 있었다.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녀지만 일본에서 살 생각은 전혀 없고 한 번씩 들리러 갈 생각은 있었다. 모국이여서 한 번씩 가는 것은 원하지만 영원히 살기 위해서는 가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남편과 살았던 이곳, 딸을 키우면서 추억이 머물고 있는 이 집을 떠나기 싫어 앞으로도 계속 이곳에서 살 생각이었다. 교인으로 종교 활동을 하면서 만난 남편과는 이별을 했지만 한국이 여전히 좋은 그녀, 이름은 까다로운 절차 때문에 바꾸지 않았지만 이제는 뼛속깊이 이 나라의 정서로 채워진 한국인이 되었다. “여기가 안 좋았으면 벌써 일본으로 갔을지도 모른다”고 솔직한 마음을 전하는 그녀의 심정이 필자에게로 오롯이 전달된다. 그리고 90이 넘은 시어머니께서 “일본에 가지 않고 자식을 키우며 여기에서 살아줘 고맙다고 악수도 하고 등도 토닥여주었다”는 말에서도 많은 것이 나에게로 전해졌다. 
주위에서 재혼하라는 유혹도 뿌리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며 살고 있는 그녀는 창선공원묘지에 있는 남편을 만나러 한 번씩 간다. 대화를 나누는 중에 자신을 숨기지 않고 활짝 펴 보이는 그녀를 필자는 제 몸을 다 드러낸 홑꽃인 코스모스 한 송이를 만났다는 기분이 든다. 어쩌면 길가에 한들거리는 코스모스가 가정을 구김 없이 잘 이끌어 가는 그녀를 닮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약한 듯 강한 코스모스가 자꾸 연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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