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신문이 오는 5월 10일이면 창간 28주년이 된다. 그래서 본사와 비슷한 시기에 돌을 다루기 시작한 보승석재 김성남 대표를 만나 보았다. 그는 달라진 석재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많은 비전을 제시했다. 약간의 노동력, 약간의 창의성, 일 년간의 기술만 익힌다면 평생 일거리 걱정할 필요 없는 직업이 바로 석재업이라고 했다. 이것은 살아 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니 일거리가 없다거나 불경기가 따로 있는 게 아니었다. 옛날에는 석재가공이 80~90%수작업으로 이루어져 위험도 따르고 견디기 힘든 직종이었지만 지금은 석물과 석재가 완제품으로 공급되어 10~20%정도만의 수작업을 요하기에, 키 큰 나무에 달린 열매를 따는 것만큼의 수고로움만 있으면 된다. 그동안의 선입견과 고정관념을 과감히 떨쳐버리고 용기를 가지고 이 일에 도전해볼 필요가 있다. 귀촌‧귀농‧귀향인들, 취업준비생들, 청년층, 곧 졸업을 앞둔 학생들 누구나 관심을 기울이면 길은 고속도로처럼 활짝 열릴 것이고 김성남 대표처럼 이 직업을 참 잘 선택했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면서 하루하루를 누구보다 설레며 기다릴 것이다. 

우리는 흔히 하찮게 여기는 직업을 선택할 때 자신에게 용기를 주는 한 마디를 하게 된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하지만 막상 인기 직종이 아닌 어떤 직업 앞에 서면 그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남들이 선망하는 공무원 교사 의사 등 전문직종이나 펜대를 굴리는 화이트칼라 쪽으로 선회하여 정작 사람이 필요한 곳에서는 인력난을 겪게 된다. 결과적으로 한쪽은 너무 많은 경쟁을 하게 되고 다른 한쪽은 일손이 턱없이 부족해 가족의 힘으로 버티거나 외국인노동자를 유입하게 된다. 
지금 보승석재를 경영하는 김성남 대표도 26년 전인 그 당시는 기술직으로 살아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외국어전문대 관광통역과를 졸업했기에 관광가이드를 하며 한곳에 메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고 싶어 했다. 하지만 대학 졸업 후 제주도에서 전공을 살린 직업을 1년 정도 하다가 할머니를 돌보기 위해 남해로 내려와야 했다. 그는 친척이 경영하던 석재공장에서 18년 동안 실력을 갈고 닦아, 혼자서 모든 일을 자신 있게 해낼 수 있을 정도가 되었을 때인 8년 전 보승석재의 주인이 되었다. 
요즘 석재업에서 수공이 필요한 부분은 ‘시공하려는 곳과 들어온 석재 크기가 약간 다를 때 크기를 잘라 맞추고, 컷팅프로그램으로 비문을 작성하고, 비석에 비문 고무판을 부착 컷팅된 고무판에서 비문 여백을 뗀 후 각자실(글자 새기는 공간)에 비석을 고정시키고, 금강사를 뿌려 노즐을 통해 비석에 글을 파내면 작업이 끝난다. 석물은 주문한 대로 들어오기에 손댈 것 없이 시공만 하면 된다. 그래서 일일이 하던 수작업이 상당히 줄어들었다.
비수기와 성수기가 거의 없지만 봄과 가을에 대체로 더 많은 일이 들어온다. 김 대표는 돌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언제나 달려가 거의 3~5일 만에 웬만한 공사는 다 끝낸다. 이 일에 대한 위험성은 거의 없지만 간혹 돌을 자르는 작업이다 보니 청력이 약간 떨어질 수는 있다. 하지만 벌이에 비하면 그만큼의 희생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힘주어 말한다. 업무가 광범위하지만 주로 계단석, 판석, 석축, 대석을 시공하며 건물 외벽을 돌 작업으로 마무리하기도 한다. 요즘은 묘지를 만든다는 개념보다 공원과 정원을 꾸민다는 생각으로 접근을 하기에 완공 모습이 거의 예술작품에 가깝다. 김 대표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석재를 이용하는 일밖에 없을 것이라며 아주 대단하고 소중한 일로 여겼다.  
그는 “남해에서 이 업을 하는 사람 중에 내가 가장 나이가 어리다. 앞으로 20대 30대 40대 젊은 층의 후학양성이 무엇보다 절실하다. 그렇다고 50대 60대 70대는 못한다는 말이 아니다. 지금 현직에는 70대도 돌을 다루고 있으니 절대 늦은 게 아니다. 이 좋은 직업을 계승 발전시키고 싶은데 후계자가 없어 너무나 안타깝다” 요즘은 일도 아주 단순해졌는데 여전히 꺼려하는 직업으로 남아있어 자신에게 아들만 있다면 이쪽으로 키우고 싶은데 딸만 셋인 관계로 걱정이 된다고도 했다. 다음에 사위 중 누군가 관심을 가진다면 기꺼이 가르쳐주고 이 길을 걷게 하고 싶다고 했다. 이 좋은 직업과 고소득을 올리는 일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그의 마음이 돌보다 묵직하게 전해졌다. 
우리 남해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전문직을 길러내는 남해정보산업고에서 ‘석재기능수업’을 하거나 경남도립남해대학에 ‘석재시공과’를 신설하여 정말 제대로 이 직을 이어가는 일꾼들을 키웠으면 하는 바람 가득했다. 그에게 아들은 없지만 남해의 아들들은 많다. 졸업만하면 도시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접고 1년만 열심히 배워서 평생을 보장 받을 수 있는 이 분야의 일을 놓치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해진다. “예전에는 모든 조각, 가공 작업들이 수작업이었고 작업여건도 열악했지만 현재는 가공품 석재품들이 중국 현지에서 완제품으로 전량 수입되고 현지에선 장비위주로 시공을 하기 때문에 힘든 작업은 절대 아니다. 일을 배우고 나면 나처럼 일에 대한 설렘으로 새벽 5시에 일어나 현장에서 펼쳐질 밑그림을 그리고 만족스런 작품을 창작해내게 될 것이다”
김 대표는 지금도 여전히 어떤 공사가 수주되면 설렌다. 공사 내용이 같은 게 하나도 없기 때문에 어떤 완성작으로 만들어질지를 머리로 구상하는 일이 즐겁기 때문이다. 지역과 건물 주변여건이 모두 다르기에 건물 견적을 빼오면 이것은 어떻게 만들고 마무리할까, 선을 그리고 그림을 그리며 시공을 하기 전까지 연구를 거듭한다. 이런 준비과정에 빈틈이 없었기게 시공한 후의 결과물은 주인도 만족하고 자신도 만족하게 되는 것이다. ‘공사를 할 때마다 자신이 먹고 살기 위해 이 일을 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리고 언제까지 이 일을 해야 될까도 고민하지 않는다. 언제나 현재 일에 만족하고 최선을 다할 뿐이다.
친구들이 “돌쟁이 잘 있나”라는 말로 안부를 물을 때가 제일 행복하다는 그는 남해의 자랑스런 석수쟁이가 틀림없다. 어떤 이는 돌쟁이 석수쟁이라는 말을 비하발언으로 여기며 밀어내는데 그는 오히려 그 말 듣기를 좋아한다. 그동안 열심히 살아온 김 대표는 지난 1월에 가나석재를 인수하여 현재 제2사업장을 가지게 되었다. 그곳은 강원도에서 15년 동안 석재업을 하고 있는 동생이 7월에 내려와 맡기로 했다. 남에게 지고 싶지 않고 일등으로 살고 싶은 그는 자존심과 자부심 밖에 없는 사람이며 건축과 더불어 묘지공원조성을 두루두루 잘할 수 있는 남해의 3인자 속에 속하는 인물 중의 인물이다. 김 대표는 이 직업을 가진 것이 천운임을 다시 강조했다. 전공을 살려 관광통역 일을 했다면 고정된 급여에 넉넉한 생활은 어려웠을 것이고 정년을 보장받지도 못하고 명퇴를 하는 비운도 맞이했을 것이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던 중, 김 대표가 가슴 저 밑바닥에서 끌어올린 말이 너무나도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와이셔츠 입고 겉만 번지르르한 일보다 실속을 챙기는 돌쟁이가 천번만번 낫다. 나는 다시 태어나도 이 직업을 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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