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초꾼이 더덕을 캐러 갔다가 산삼을 캤다면 어떤 기분일까. 필자는 그런 횡재를 했다는 느낌으로 긴 시간을 이희성 부회장과 함께 했다. 2년 전에 완전히 귀촌하여 2000평의 땅에 유자나무 500주를 심고 가꾸었던 이야기를 듣고 싶어 찾아갔는데 뜻밖에도 41년 동안 교직에 몸담았던 값진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오랜만에 최고의 자서전 한 권을 읽었다는 감흥과 어느 사람의 자화상을 제대로 만났다는 만족감이 가득히 차올랐다.
이 부회장은 30년 전쯤에 이미 미래를 설계하고 새로운 삶을 준비했다. 교직에서 물러나면 고향에 돌아와 유자나무를 가꾸고 텃밭을 일구며 여유를 맘껏 누릴 생각이었다. 그래서 주말만 되면 거의 부산에서 여기 설천 비란마을(동비)까지 내려와 유자 묘목을 심고 흙에서 에너지를 얻은 후 다시 교육에 진력하며 모든 열정을 쏟았다. 도로가 정체될 때는 평소보다 두 배의 시간이 소요되기도 했지만 좋아하는 일인데다 자신에게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유자밭을 오갔다. 그때부터 심고 가꾸었던 유자를 어느 날부터는 수확을 하여 약간의 수입도 올리고 있었다.
사주팔자대로 무난하게 살아가는 그는, 삶에서 흔히들 겪는 우여곡절이 전혀 없었다. 남해 설천에서 7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나 초등학교 6년 우등상과 6년 개근상을 받았고 전교어린이회 부회장이 되어 학교생활을 잘 실천했다. 중학교 시절에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습관을 길렀고 중2때는 교육자가 되어 교장까지도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가정형편으로 실업계고등학교로 진학했으나 학업에 매진하여 진주교육대학을 졸업하고 동아대학교 대학원 교육행정을 전공하여 석사학위를 받았다

1974년 남해 삼동초등학교에서 첫 교편생활을 하였는데 그곳에서 훌륭한 교장과 선배 선생의 특별한 만남으로 학교생활을 긍정적으로 하게 되었다. 그때 두 사람의 영향으로 그의 가치관과 교육철학이 더욱 단단해지고 새로워졌다. 남해와 김해에서 교직생활을 하다 1990년부터는 부산에서 계속 교편을 잡다가, 2001년에 남보다 이른 교감이 되었다. 그 후 2007년부터 교장직을 수행하다 2015년 2월 28일자로 정년퇴직을 했다. 그 후 1년 6개월을 ‘사하구청소년문화의집’에서 관장의 소임을 다하다가 퇴직 후 곧장 하려고 했던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 그곳의 강한 권유도 뿌리치고 그 직을 2016년 10월에 그만두었다. 지금은 귀농귀촌인들의 모임인 ‘보물섬남해사랑회’에서 부회장의 역할을 맡고 있다.
이 부회장은 “도시에서 상상했던 것보다 여기에 와보니 더 좋다. 내 일생에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렇다고 교직에 있으면서 행복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때는 정신적 여유가 없는 행복이었고 지금은 여유가 있는 행복을 느끼고 있다” 남들은 사는 곳을 옮겨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제2의 인생이라는 말로 표현하지만 그는 완전 백지 상태에서 시작하는 삶이라고 했다. 그동안 쌓아왔던 모든 것은 백지 밖으로 밀어내고 새 벽지에 새 그림을 그리고 색칠을 해나가고 있다. 그 백지를 채우는 기쁨이 너무나 커서 지금이야말로 그의 인생에서 가장 황홀한 ‘화양연화’가 시작되고 있는 것 같았다. “현직에서도 열심히 살았고 지금도 열심히 살고 있지만 그동안에는 이론적 여유를 즐겼다면 지금은 체험적 여유를 만끽하고 있다”는 그의 말이 무척 부럽고 듣기 좋았다. 텃밭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옥수수 대신 그의 밭 가장자리에는 여러 색의 튤립이 심어져 있는데 이것이 그가 강조한 여유가 아닐까를 생각해 보았다. 
이 부회장은 학교에 다닐 때도 결석하는 일이 없었듯이 교직생활에서도 한 번도 결근을 한 적이 없었다. 아무리 아파도 어떤 식으로든 학교를 나와 자리를 지키며 본분을 다했다. 1978년부터 교감이 되기 전인 2000년까지 22년 동안 한 해도 빠짐없이 ‘수업연구대회’에 참여하였다. 사람들이 병을 예방하기 위해 맞는 예방주사처럼 그는 교사로서의 나태함과 슬럼프 그리고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기 위해 스스로 예방주사를 맞았다. 대회에서 다양한 경험을 맛보며 본선에서 1,2,3등급으로 5회 입상을 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매년 1회 이상 수업공개를 하기 위해서는 몇 개월 전부터 준비를 해야 하는 수고로움이 따랐다. 교감이 된 후에도 자기 연찬을 계속해야 함을 느끼고 2003년 인성실천사례 2등급, 2004년 현장연구논문 2등급, 2005년 현장연구논문 1등급, 2005년 현장연구대회 전국대회 교육행정분과 3등급으로 부단한 연구의 길을 올곧게 걸었다. 매년 예방접종을 한다는 생각으로 교사시절 27년 동안 모든 일에 솔선수범하였고 계획보다 실천을 우선시하는 실천가로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이런 정신으로 교직을 잘 수행했기에 교육계에서 가장 높은 상인 항조근조훈장을 퇴임식 때 수여했다.
많은 표창과 수업연구, 현장연구와 실천사례가 정년퇴임식 때 준비했던 팸플릿에 빼곡히 적혀 있어 그가 걸어온 길이 어떠했음을 알 수 있었다. ‘초등학교 특별실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서 편집위원으로의 활동, 즐거운 우리 반 칼럼위원, 인성교육지원협의회 위원 등 여러 활동을 했지만 일일이 여기에 다 적지 못한다. 연구학교 운영과 교감 근무 시 주요활동에서는 교장으로서 주요활동 등의 이력이 너무나 눈이 부셨다. 평소 긍정적 사고와 계획보다 실천이라는 정신으로 교직생활을 해왔기에 남들이 겪는 권태기 같은 거는 한 번도 없었다는 말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일등 교사 일등교장’이라는 말로 자화자찬하며 당당하게 살아온 그는 정말 최고의 교사였고 최고의 교장이었다. 
교장으로 있을 당시의 일화는 진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국내에서 박사코스를 받던 30대 남 선생이 실내화도 갈아 신지 않고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얼굴로 불손하게 교장실로 들어왔을 때 차분하게 “나의 젊은 시절의 혈기를 보는 것 같아 정말 새롭고 보기 좋다. 하지만 나는 지금 그런 패기가 없어 자네가 부럽네․․․” 교장선생의 인품과 충고에 감동을 받은 그 선생은 그를 멘토로 삼고 그 뒤에도 여러 일들에 대해 많은 조언을 청했다. 지금은 그를 아버지 겸 스승으로 모시고 계속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현재 모 학교에서 그의 교육철학을 잘 계승하여 동료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몸소 실천하며 모범적인 교사생활을 하고 있다. 
이 부회장은 로버스트 프로이트의 ‘가지 않은 길’이라는 시를 좋아한다. 그는 먼 훗날 나는 어디에선가 이야기할거네/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그리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했노라고/ 그래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교직생활에서 남이 하기 싫어하는 부분을 실천하며 열심히 했더니 생각지도 않게 결과가 좋았다는 그는 늘 긍정적인 사고와 창의적인 삶을 살아왔기에 거뜬히 50대 같은 젊음을 유지하고 있다. 그의 얼굴빛은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비춰주는 투명한 참 거울이었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잘 살아왔니”라고 물으면 잠시도 주저함 없이 “이희성 교장선생님”요 라고 금방이라도 답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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