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군예음협회 창립, 초대회장에 가수 고재억 선출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군민들에게 하루라도 편히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이 되고 즐거움을 봉사하는 순수 음악단체인 남해군예음협회를 창립코자 한다. 제1대 회장님으로 남해에 거주하는 고재억 씨를 회장으로 추천한다. 회원 40명 중 참석 인원 34명 전원이 거수로 찬성의사를 밝혀 올해 새롭게 고재억 회장이 선출되었다” 
다른 곳보다 약간 좁은 듯한 지하계단을 통해 일층에 있는 남해군예음협회를 방문했을 때 마침 사업자등록증을 내기 위해 이수봉 사무국장이 준비했다는 자료를 보던 중 눈에 띈 부분을 적어보았다. 그동안 사용해왔던 남해군음악협회 명칭을 남해군예음협회로 바꾸고 회장과 회원이 새롭게 구성되어 순수 음악단체로 거듭난다고 한 그날은 모든 게 의미심장함으로 다가와 필자도 그와 비슷한 감정이 섞였다. 

남인수가요제 때 창작곡 장대비로 가수 데뷔 5년 동안 왕성한 음악활동 

사람들의 직업은 본인의 뜻에 따라 선택도 되지만 어쩔 수 없이 우연히 갖게 되는 경우도 있다. 고재욱 회장이 지금 하고 있는 장례식장 일은 가수라는 직업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을 것도 같지만 너무나 판이하여 극과 극에 서 있는 기분도 든다. 그가 음악을 가까이 하게 된 것은 초등학교 때 농악부에 가입하여 징을 치게 되었고 친구는 기타를 치게 되었는데 그때 감미로운 기타 소리를 듣고 완전히 빠져들게 되었다. 또 한 번은 친구가 자기의 집 옆에 있는 대나무밭에 앉아 기타를 치는 것을 듣게 되었을 때, 마음이 울적해서인지 최 헌의 ‘오동잎’이 그렇게 가슴에 와 닿아 가슴이 뭉클했던 것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고 한다. 
기타만 배워 볼 생각이었는데 가수까지 된 것은 어느 날 문화원 정의연 사무국장이 전국노래자랑에 나가 보라는 권유를 했기 때문이었다. 마침 1992년 6월 29일 제3회 남인수가요제 때 장대비란 창작곡으로 대상을 수상하여 가수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 수상을 계기로 1994년에

첫 음반을 내게 되었는데 이렇게 서둘러 음반을 낸 결정적인 이유는 “꽃상여를 하는 아버지가 항상 불쌍하게 보였고 형제들도 불우하게 보여 나라도 노래를 불러 모두 기분이 좋아지도록 분위기를 바꿔보자”는 마음이 크게 작용했던 것이다. 가수로서 나름대로 활동을 많이 했지만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지는 가수는 되지 못했다. 창원 대구 마산 광주 등 지역방송에 다수 출연하였고 KBS가요무대 전국노래자랑 등 초대가수로 두 차례 나갔고, 신곡 ‘나의 길, 한국여자’ 등으로 진주 MBC에서 3년 동안 노래하는 중개차 김봉곤 노래세상 심사위원으로도 활동을 했다. 생계를 위해 꽃집을 운영하면서도 후배들을 지도하는 일에도 소홀히 하지 않아 두 명의 제자가 남인수가요제에서 은상과 동상을 받기도 했다. 그는 음반을 내고 5년 동안 왕성한 방송활동을 하다 중단을 했지만 창작곡은 지금도 수없이 생산되고 있다.

장의업과 관련된 곡‧애향곡 작사‧작곡, 후배 양성에 힘쓰다

고 회장이 장의업에 뛰어든 것은 순전히 아버지 영향 때문이었다. 그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꽃상여를 만드는 일을 했다. 부산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던 그에게 어느 날 아버지는 큰아들도 아닌 그를 남해로 내려오게 하여 꽃상여 만드는 일을 도와주면 좋겠다는 제안을 하여 어쩔 수 없이 이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그 당시 아버지와 꽃상여를 수없이 만들며 그는 많은 사람들의 마지막을 배웅했다. 한 15년 정도는 꽃상여를 만들었고 또 15년은 남해묘지관리 추모누리 장례식장의 장의업에 종사하면서 지금도 본분을 다하고 있다. 사람의 마지막 모습을 자주 접하면서 자연스럽게 그와 관련된 악상과 노랫말이 떠올라 창작곡이 대체로 어둡다고 한다. '백년인생, 멀어져 가는 사람아. 세월을 짊어지고, 싸우지들 맙시다, 그곳에 가면 만날 수 있다‘ 등 너무나 많아 모두 나열하지 못한다. 누구나 결국 가야하는 곳이 ’연죽추모누리‘이기에 그것을 떠올리고 곡들을 많이 써내었다. 그는 “장의업을 하다 보니 죽는 일을 다루다보니 대체로 칙칙한 노래가 많은 걸 잘 알고 있지만 의도적으로라도 밝은 노래를 창작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렇게 하면 오히려 더욱 청승스러울 것 같고 적성에도 맞지 않을 것 같아 거부하게 된다”는 솔직함을 전했다. 
도시무대에서는 젊은 층을 많이 만나게 되지만 고향인 남해에서는 초대가수로 한 번씩 나가다 보면 나이 많은 분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어른들이 박수를 쳐주면서 같이 호응하고 공감을 할 때면 부모님을 만난 듯 좋아진다. 그래서 부모님에 대한 노래가 많은데 그리운 어머니, 사랑의 회초리, 울음의 18번곡 등이다. 장례식장에 어른을 모시러 가면 보통 남자 3명 여자는 18명 정도를 만나게 된다. 거의 앉았다 내릴 때는 '아이구 다리야 아이구 허리야'라는 소리를 자주 한다. 그래서 '울음의 18번곡' 가사에 우리 어머니 아버지들이 평소에 자연스럽게 했던 말인 '아이구 다리야 아이구 허리야'가 노래로 탄생되었다. 고 회장이 창작해내는 곡들이 지금 하고 있는 직업에서 거의 탄생되고 있으니 가수와 지금 하는 일이 너무나 밀접할 것 같으면서도, 감성적인 그가 주검을 제일 가까이에서 만나는 일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생각도 혼재된다. 그는 현재 타이틀곡으로 ‘백년인생, 세월을 짊어지고’ 등으로 음반을 8장 냈으며 잃어버린 여동생 송이를 찾기 위해 ‘사람을 찾습니다’란 곡을 창작하여 부르기도 했다. 요즘 향토가수로 열심히 활약하는 가수에게 ‘보물섬남해로 오시다’라는 곡을 주어 남해를 많이 알리게 했고, 언제나 후배들에게 좋은 곡을 나눠 주고 싶어 남해를 소재로 한 노래를 많이 만들어내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자신이 가수로 나서는 것은 접어두고 후배들이 제대로 설 수 있도록 뒤에서 밀어주는 일에 많은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남해대규모축제 출연, 건강체조 배경음악 ‘보물섬 남해아리랑’의 주인공
 
고재욱 회장이 가수활동을 하면서 그 당시 남해음악협회에 가입은 안한 채 ‘예도봉사회’ 단체를 만들어 ‘벚꽃축제, 제2바다축제, 남인수가요제, 해변가요제, 바다축제, 벚꽃축제’ 때 몇 회 동안 도맡아 음악봉사를 했다. 문화체육센터에서 실버가요제2‧3회를 가졌을 때 무대음향, 초대가수 축하공연을 준비하여 주도했다. 선의의 마음으로 실버들을 위한 행사를 거창하게 준비한 것에 대해 지금도 뿌듯해했다. 지역가수 시절 테이프를 팔아 한 푼 두 푼 모은 돈을 장학금으로 기탁하기도 했다. 그는 어떤 행사를 해도 봉사 또는 희사하는 쪽으로 했기에 개인 주머니가 채워지는 일은 거의 없었다. 이런 노력들이 높이 평가되어 남해문화원에서 주관하는 제2회 남해문화대상을 오래전에 받기도 했다. 원래 뒤에서 돕는 걸 좋아하고 어디에 잘 나서는 성격이 아닌데 주변 추천으로 인해 그런 큰 상을 받게 된 것이다.  
고 회장은 남해군민을 위해 남해 예도장학생을 선발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매년 연말에 남자 1명 여자 1명에게 정해진 금액을 전달할 것과 희망하는 읍‧면민을 위해 찾아가는 행복한 남해한마당잔치도 예정하고 있다. 면단위를 직접 찾아가서 각 면에서 1~2등을 모아서 전체적으로 결선을 하는 것인데 연말 결선을 통해 대상자에게는 가수인증서와 상금 해외여행상품권을 줄 예정이다. 음악을 통해 돈을 버려는 사람을 싫어하는 순수 봉사단체인 남해예음협회는 생색내는 것 또한 싫어한다. 있는 그대로 보여주며 잘한다는 박수만 받고 그 박수를 에너지 삼아 음악봉사를 하겠다는 확고함이 고재욱 회장에게서 강하게 읽혀졌다. 남해군민의 가슴에 사뿐히 내려앉을 음표들이 벌써 행복한 하모니를 이루며 희망을 전하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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