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인품과 수행력으로 ‘참스승 추앙 받아
  
 
  

 근대사에서 남해가 낳은 최고의 고승으로
 알려진 벽암스님의 생전 모습.

 
  

남해에서 출생한 벽암당(碧岩堂) 동일(東日) 대종사(大宗師)는 조계종단의 몇 안 되는 ‘스승중의 스승’으로 추앙 받고 있으며, 근현대사에서 남해가 배출한 최고의 고승으로 알려져 있다.

속명이 채우섭인 스님은 1924년 고현 도마에서 출생, 유년기를 고향에서 보낸 후 1940년 일본으로 건너가 1945년 일본국 관서공업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9월 서울 호국사 역경원로 출가해 불가에 입문하게 된다. 스님은 학교를 졸업한 후 인생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에 몰두해 온 스님은 중국 남종선(南宗禪)의 근본이 되는 선서(禪書)인 ‘육조단경(六組壇經)’을 공부하고 출가를 결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벽암 스님의 고현 보통학교 동기인 정경선 옹(83·서도마)은 “벽암은 어렸을 적 부모를 일찍 잃고 가정 형편도 어려웠지만 공부를 잘한 수재였다”는 기억을 떠올렸다.

1946년 호국사에서 적음스님을 은사로 득도한 스님은 60년 조계종 총무원 교무부장을 맡아 조계종이 기틀을 마련하는데 많은 역할을 했다고 한다.

65년 불국사 주지와 68년 정화 불사에 앞장선 스님들의 모임터인 중앙선학원 원장을 맡아 교육과 포교활동에 몰두했다.

또한 69년 동국대학교 이사장, 72년 조계종 종회의장, 78년 조계종 종정 직무대행을 맡아 종단을 이끌었으며 86년 종단의 원로의원으로 추대됐다.

85년부터 계룡산 신원사 조실을 지냈는데 2004년 종단의 법계위원회에서 대종사(비구 법계 1급) 품계를 품서했을때 “명예도 허물도 없는 일 없이 한가로이 누운 사람이라”며 펼쳐보지도 않았다는 일화 또한 유명하다.

‘언제나 청렴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납자들에게 강조해 온 스님은 신도들에겐 부드러우나 제자들에겐 매우 엄격한 분이며 특히 청빈한 삶을 살아오신 분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30년간 스님을 모셔온 신원사 회주 법원스님은 “스님은 대쪽같은 분으로 평소에는 한없이 자애로우셨는데 게으름을 피우는 제자들에게는 매우 엄하게 경책을 하셨다”고 말했다.

조카인 채승규(54·도마)씨는 “학창시절 수학여행 때 스님이 주지로 계시는 불국사를 찾아 뵌 적이 있었는데, 용돈 한 푼 안 줘 어린 마음에 서운한 적이 있었다”는 기억을 털어놓기도 했다. 이사장과 불국사 주지를 놓고 나올 때에는 호주머니에 차비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1년에 한번씩 신원사를 찾아 벽암 스님을 뵈었다는 읍 학림사 명본 스님은 “남해에서 태어난 큰 스님중 부산 해운정사 조실로 계신 진제 스님은 대중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편이지만 벽암 스님은 종단 내부에서 높으신 인품과 수행력으로 수행자들의 귀감이 되신 분”이라며 “근대사에서 남해가 낳은 최고의 고승이자 참 스승”이라 했다.

종단의 원로회의 의장인 종산 스님은 10일 있었던 다비식 영결사를 통해 “우리 종단이 어려움을 처했을 때마다 앞장서서 구종(求宗)의 정신으로 책임을 한 몸에 지니시고 외풍에 당당히 맞서, 굳은 일을 도맡아 하심으로써 오늘의 조계종이 반듯하게 갈 수 있도록 법력을 보이셨다”며 “어제밤 계룡사 산상(山上)에 뿔달린 성스러운 금계(金鷄)가 울더니, 오늘 새벽 60년간 불교를 밝히던 혜광(慧光)이 쓰러졌다”고 안타까워했다.

스님은“시간을 던져 지옥에 들지 말고 부지런히 공부하라”는 임종게(臨終偈)를 남기고 지난 6일 계룡산 신원사에서 입적하셨다.

/한중봉 기자 bagus1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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