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태 전 주택은행 부행장을 지난 22일 서초동에서 만났다. 박옥수 향명회 고문이 남해군과 향우들을 위해 음으로 양으로 많은 도움을 주신 분이 있다며 취재를 제안했다. 그렇지 않아도 재경향우회 원로들 중에서 이 분을 추억하는 분들이 종종 있어 꼭 한번 신문지면에 소개하고 싶었는데 잘됐다 싶어 약속장소인 교대역 부근 이남장으로 달려갔다.
최 전 부행장의 첫 인상은 매우 깔끔하고 멋져 보였다. 1934년생으로 올해 춘추가 85세인데도 70대 초반 정도로 보여 깜짝 놀랐다. 오랫동안 공직에 있으면서 비서관 생활과 감사직을 역임해서인지 잠깐의 인사에서도 곧은 인품과 깊은 경륜이 느껴졌다. 최 전 부행장은 삼동면 영지리 고잔마을에서 고(故) 최운증‧김탐순 부부의 4남2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난령초, 남수중, 부산공고, 부산대 법대를 졸업했다. 어릴 때 그림에 소질이 있어 미술시간에 단군할아버지 초상화를 그렸는데 교무실에 걸어둘 정도로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한다. 사범학교에 진학해 선생님이 되는 게 꿈이었던 소년은 대학을 졸업하고 1960년대 초 서울로 상경하여 공직과 금융계에서 30여년의 사회생활을 했다. 

5.16 이후 금암 최지환 선생의 추천으로 1964년부터 정일권 국무총리실 정무담당 비서관으로 6년, 김종필 국무총리실에서 6년을 이어서 근무했으며, 최규하 국무총리실에 근무하기도 했다. 연이어 국무총리실에서 근무했던 것은 그의 성실함과 곧은 인격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1976년에 신용보증기금 창설임원과 감사로 4년을 근무하며 금융계와 인연을 맺었다. 신용보증기금은 자금력이 취약한 기업에 신용보증을 해주는 기관으로, 1974년 제정된 신용보증기금법에 따라 1976년 특별법인으로 설립되었다. 그는 신용보증기금 창설과 초기 정착에 큰 역할을 했다. 10년 이상 금융계에 근무하면서 신뢰를 인정받았으며 후배들에게 격려와 용기를 북돋아 주었기 때문에 후배들이 무척 따랐다고 한다.
1980년에는 주택은행 감사로 자리를 옮겨 1983년 전무이사로 승진했고, 1984년 부행장으로 승진해 1989년 8월 15일까지 근무했다. 주택은행에서 9년 3개월 동안 감사와 전무이사, 부행장으로 근무하며 은행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많은 감사패와 기념패를 받았다. 주택은행을 퇴임한 이후에는 세경산업(주) 회장으로 6년을 근무했다.
그는 금암 최치환 선생과의 각별한 인연으로 금암회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1987년 9월 금암 최치환 선생 기념비 제막식에서 가슴에 여며오는 여러 감회를 떠올리면서 그 위대한 업적을 기리며 금암선생의 유지를 받들겠다는 추도사를 낭독하였다. 금암선생 25주기, 26주기 추도식에서 특별했던 추억담을 담아 고인을 회고하는 추모사를 전하기도 했다.
공직과 은행, 기업체에 있었던 30여년 동안 그는 고향 남해와 남해인들에게 많은 도움을 줬다. 남해인들이 찾아와 부탁하면 애로사항을 듣고 판단해 즉시에 결론을 내려주는 것으로 유명했다. 대표적으로 금산의 부산여관이 국립공원으로 묶여 철거명령이 내려졌을 때도 해제시키는 데 역할을 했다. 지금도 부산여관은 유지되고 있다. 

주택은행에 근무할 때는 무엇보다 남해출신들을 은행에 취업시키는 데 많은 도움을 줬다. 그가 주택은행 부행장으로 근무할 때 지금은 고인이 된 남해상고 고정훈 교장이 찾아와 “남해상고 졸업생들의 유일한 꿈이 은행 취업인데, 길이 막혔으니 도와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고 한다. 당시는 상고 졸업생들의 은행 취직이 아주 어렵던 시기였다. 그는 남해상고 졸업생들에게 공채시험 기회를 줘 10년 동안 100명 이상의 취업 길을 열어줬다고 회고했다. 
주택은행 퇴직 후 세경산업(주) 회장으로 근무할 때 그는 남해상고 박삼봉 교장으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 주택은행에 재직하면서 고향 후배들의 취업을 위해 애쓴 것에 대한 답례였다. 그는 아직도 어느 감사패보다 이 감사패를 아끼고 있다고 한다. 
정천수 전 금암회 회장은 “최영태 전 주택은행 부행장은 금암 최치환 선생이 무척 사랑한 후배다. 그의 뛰어난 인품과 곧은 성격, 두터운 신의와 애향심을 금암 최치환 선생이 잘 알았기에 오래도록 사랑하셨다. 최영태 전 부행장은 자랑스러운 남해인이며, 저와 모든 후배들이 무척 존경한다”고 말했다. 
최 전 부행장에게 후배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물었다. 
“花香百里(화향백리), 酒香千里(주향천리), 人香萬里(인향만리)라고 했다. 꽃의 향기는 백리를 가고, 술의 향기는 천리를 가지만 사람의 향기는 만리를 간다는 말처럼 훌륭한 선배들의 전통을 바탕으로 후배들에게 징검다리가 되는 남해인이 되길 바란다.”
그는 항상 후배들에게 꿈과 열정, 노력을 강조한다. “꿈을 꾸는 사람은 많다. 꿈을 가졌으면 그것을 이루기 위해 지속적으로 열정을 가지고 노력해야 한다. 큰일을 하려는 사람에게 일시적인 실패는 있어도 영원한 좌절은 없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열정을 지속적으로 이어가질 못하고, 그래서 꿈도 일시적으로 끝나버리는 것 같아 안타까울 때가 많다.” 꿈을 꾸되 그 꿈을 이루기 위한 노력을 구체적으로 해야 함을 주문하는 것이다.
그는 꿈과 그것을 이루기 위한 실력 못지않게 넉넉한 인품도 강조한다. “꿈을 이룰 기회를 잡는 것은 실력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넉넉한 인품이다. 좋은 인품을 기르기 위해서는 종교가 있다면 아침저녁으로 진심으로 기도를 드리고 인내의 힘을 키워야 한다. 세 번을 생각하고 행동하되 항상 겸손하면 일에 그르침이 없다.”
그는 고향 남해군의 미래에 대해서도 항상 걱정하고 있다. 인구가 줄어들고 있다는 보도를 접할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그가 생각하는 것은 광양부터 여수, 남해, 사천, 통영, 거제를 잇는 남해안벨트다. 가까운 곳은 다리로, 먼 곳은 육로를 통해 벨트를 만들어 이 벨트에서 남해는 청정지역의 역할을 맡아 관광‧레저‧휴양의 중심지가 되어야 하며, 그럴 때 외톨이가 되지 않고 남해안시대를 주도적으로 열 수 있다고 본다. 
최 전 부행장은 “나도 남해인의 도움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후배들을 끌어줄 수 있었다. 이런 좋은 전통이 유지될수록 남해인은 화합할 것이며 남해는 발전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동면 출신의 부인 김순미씨와 2남2녀의 자녀를 뒀다. 김순미씨는 남해군 이동면 출신으로 대검찰청 차장을 지낸 고(故) 김일두 변호사의 여동생이다. 두 분의 장남 세윤씨는 사업을 하고 있으며, 차남 동훈씨는 삼우건축 부장을 맡고 있다. 장녀 정윤씨와 차녀 재윤씨는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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