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현면으로 향하는 내내 마음이 설렜다. 요즘처럼 개인주의가 난무하고 핵가족화가 빠르게진행되는 상황에서 형제자매들이 똘똘 뭉쳐 한곳에 둥지를 튼다는 것은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기에 그 사연이 무척 궁금해지면서도 아주 귀하게 다가왔다. ‘얼마나 행복한 전원생활을 보내고 있을까’를 그리며 도착을 하니 풀숲에 앉아 있던 꿩 한 마리가 ‘푸드득’ 날아오른다. 약속이 번복된 것에 대한 미안함을 안고 마을 제일 위쪽에 자리 잡은 집 들 중에 첫 번째 집을 들어섰다. 그곳은 우영찬 씨의 첫째 형이 살고 있는 집이었다. 개 한 마리가 빙글거리며 소리를 잠깐 냈지만 주인을 보자 금방 조용해졌다. 형은 우영찬 씨가 살고 있는 끝집으로 안내를 했다.  
서쪽 해가 소나무를 맴돌다 넓은 거실로 들어오니, 실내가 자연이고 자연이 실내인 듯하여 ‘우와 너무나 평화로워요’ 감탄의 외침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실내에 마음을 뺏긴 나머지 오늘의 주인공을 왜 만났는지에 대한 목적은 잃고 잠깐 다른 데로 관심이 쏠리고 있었다. 우영찬 씨는 2년 전에 여기로 귀촌했다. 발품을 팔아가며 동네 사람들을 통해 이곳을 소개 받고 터를 잡았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다른 형제들도 모두 이곳을 오게 되었는데 현재는 4명이 먼저 와 살고 있다. 머잖아 부산에 사는 여동생(우영희)이 내려올 예정이고 진주에 사는 둘째 형(우영식)은 진주에서 사업을 하고 있기에 마음은 있어도 현재로선 여기에 올 수 없는 실정이다. 육남매를 나열해보면 우영일(76세) 우영신(73세) 우영찬(70) 우영숙(67) 우영희(64) 우영례(59)씨이다. 이들은 진주에서 태어나 각자 흩어져 살다가 이곳에 오는 결정을 동시에 내린 ‘우수한 집안’이 되었다.

형제들은 4년 전부터 어디에서 전원생활을 할지 고민을 하다가 광양, 여수, 여천, 함양, 산청 밀양 청도 언양 양산 등을 두루 섭렵했다. 그러다가 남해 그것도 고현면 갈화 왕새우가 자라고 있는 이곳의 조용한 바다와 주변이 마음에 들어 정착을 하게 되었다. 형제간에 언제나 정 있고 우애 있게 잘 살기를 바라던 어머니가 자식들에게 한곳에 모여 살았으면 어떻겠냐는 안을 처음으로 내게 되었고 형제들은 어머니 말씀에 흔쾌히 동조를 하게 되었다는 뒷배경이 숨어있었다. 자식들이 모여서 잘 사는 것을 흐뭇해하시던 105세 어머니는 아쉽게도 4개월 전에 노환으로 돌아가시고 없었다. 
살면 살수록 이곳을 잘 선택했다는 생각이 가득하다는 형제들은 얼굴에 화사한 미소가 가득이다. 텃세도 없는 동네에서 지금까지 쌀 한 톨 안 사먹고 동네 사람들이 주는 쌀을 받아먹었다며 마을 주민들 자랑이 대단했다. 문화원도 10분 거리에 있어 시간 보내기도 좋다며 만족스러워했다. 가까이 있는 고현초에서 그라운드 골프를 즐기며 그동안 바라던 삶을 사신다며 세상 부러울 게 없다고도 한다. 저번에 만날 약속을 했을 때는 형제들이 모두 모여서 기다렸는데 이번에는 부산에 볼일을 보러가고 없었기에 첫째 형과 셋째 우영찬 씨 그리고 그의 아내만 만날 수 있었다. 모두 만날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필자의 일정으로 약속이 번복되는 관계로 그 바람은 빗나가고 말았다. 
천 평이 조금 안 되는 대지에 30평 정도의 건물을 짓고 솔바람과 갯바람을 적절히 맡고 사는 형제들을 그래도 한꺼번에 다 못 만난 아쉬움이 조금 남아 있었는데 대화를 나누는 중에 그런 부분들은 희석되고 있었다. 결혼 후 형제들의 생일을 죽 챙겨온 가족들 그리고 집안에 행사가 있을 때마다 단합이 잘 되어 소풍가는 것처럼 언제나 즐거웠다는 말 속에 이미 형제들의 행복한 마음들이 다 여기에 모여 있다는 생각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항상 “형제간에 싸우지 말고 모나지 말고 화목하게 살아라”고 당부한 것도 있었지만 서로가 무난하여 지금껏 얼굴 한 번 붉히지 않고 살아왔었다. 대화가 끝없이 이루어지는 중에 팝콘이 터지는 듯한 웃음이 나오기도 하고 간간이 목화가 터지는 것 같은 깔끔한 웃음들도 나왔다. 
거실에는 평범한 가정집에서는 볼 수 없는 소품들이 눈에 반짝반짝 들어왔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더욱 반짝이는 이것들은 생전 처음 보는 광물들이었다. 갑자기 궁금함이 몰려와 수집 생활을 하는지 물려받은 것인지 여기에 있는 이유를 묻게 되었다.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은 우영찬 씨가 이곳에 오기 전에 가졌던 직업의 결과물들이었다. 그는 부산 조방 앞에 최초로 귀금속 상가를 형성한 공로자였다. 사무실과 조합을 만들고 산업자원부에서 환경개선사업일환으로 전선지중화 사업도 할 수 있도록 일조를 한 그는 큰 단지를 만든 것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결혼을 하기 전 20년 동안은 보석세공사로 일했고 85년부터 30년 동안은 주얼리 도매업을 하면서 50세가 되던 해인 2000년에 부산 신라대학교 객원교수로 초빙되어 주얼리디자인학과를 신설시켰다. 그 당시 그 학과와 관련된 참고서적을 구하는 게 어려웠지만 그동안 현장에서 수없이 쌓아왔던 경험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교재를 직접 만들어 창의적인 수업을 13년 동안이나 했다. 
이것 외에도 그에게 따라붙는 이력은 대단했다. 주얼리기능대회 보석가공 심사위원장. 시험출제위원, 심사위원 부산전통공예 이사로 활동하는 것 등이다. 지금도 학사 석사 자격증 없이 13년 동안을 3~4학년의 대학생과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수업했던 그 당시가 정말 좋았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뒤는 산이요 앞은 전답과 바다가 있는 이곳에 사는 지금의 삶에 더 만족하는 듯했다. 바다와 산이 소박하게 어우러져 있는 이곳에는 큰 소나무들도 많아 까치들도 찾아오기 일쑤다. 그는 이런 곳이야말로 노후를 보낼 낙원이라고 다시 한 번 자신의 선택에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남해 사람들을 맘껏 만나고 남해 문화를 온종일 접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 형제들은 남해의 무한한 품속에서 그동안 바랐던 삶을 행복하게 펼치고 있었다.
“첫째는 어질고 순하고 포용력이 있어 잘 웃는다. 둘째는 순하고 인자하다. 셋째는 형제들한테 잘한다. 무엇이든 도와주려고 하고 이해심도 많다. 넷째는 성격이 무난하다. 다섯째도 성격이 무난하다. 막내는 술은 좀 먹지만 형제들과 싸운 적 없이 무난하다”는 성격조사가 끝난 뒤 더욱 분명해진 것은 모두 한곳에 살 수 있는 인격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머잖아 넷째도 오고 마지막으로 둘째도 온다면 집 뒷마당에 걸려 있는 두 개의 솥단지에서는 맛있는 냄새가 더욱 짙어질 것이다.  
그는 보석에 대한 이야기를 또 이어갔다. 지구상에는 3000여 종류의 광물이 있는데,  명칭을 붙이는 광물은 100여 가지이고, 애용하는 광물은 20~30여 가지이다. 준보석을 제외한 보석은 10가지 정도인데 다이아몬드, 사파이어, 에메랄드, 루비․․․. 필자는 그런 장구한 광물 설명, 희소성이 있는 보석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마음속에는 딴 보석을 떠올리고 있었다. 옆에서 연신 웃는 아내와 형 그리고 이곳에 지금 없는 남매들이 모두 보석일 것이라는 생각들로 가득했다. 보석은 반짝임만 있지만 여기 남매에게서는 반짝이는 웃음도 있으니 어떤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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