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면 대량마을 이장님을 만나러 가는 날, 이상하게도 여행을 가는 것처럼 즐거웠다. 음악볼륨도 높이고 흥얼거리는 중에 소량마을을 지나 대량마을에 도착했다. 이장님은 장화를 신고 작업복을 입은 채 마을회관에서 나오셨다. 곧 어디를 갈 것만 같은 복장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갯바위 낚시객을 곧 태우러가야 한다고 했다. 30분 정도의 여유시간이 있어 마을에 대한 이야기와 해안의 주상절리에 대한 설명을 컴퓨터에 저장된 자료를 통해 잠깐 예습할 수 있었다. 참고로 이장님은 ‘오시다호 남해별난어부’의 선장이시다. 
그는 해안 경관이 풍화작용으로 인해 어느 주상절리보다 잘 다듬어져, 넉넉하고 아름답다면서 곳곳의 풍경을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순매가 알을 품은 듯한 마을 형상의 해안을 따라가다 보면 동굴이 있는데 그 동굴이 우리나라 지도 모양과 닮았다. 누룩처럼 생긴 누룩방섬이 있고, 매머리를 지나 쭉 가다보면 천하에 하나밖에 없는 비룡계곡이 70~80미터 높이로 서있다.

누룩방섬에는 거북바위가 있는데 거북이가 바다로 헤엄쳐가는 모습이다. 천천히 가면서 좋은 풍경을 맘껏 담아갈 수 있도록 하겠다” 승선을 하기 전 벌써 눈으로 직접 본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이장님의 설명은 질서정연했고 특징도 잘 전달하여 빨리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해가 저무는 5시쯤에 선장님과 함께 배를 탔다. 물살을 가르며 천천히 이동하는데도 파도가 배안으로 조금씩 들어왔고 갯바람은 등을 헤집고 들어왔다. 하지만 파도와 바람도 선물처럼 껴안으며 조금 전에 들었던 풍경들을 카메라 속에 찰칵찰칵 담았다. 이곳이 정말 바다라는 게 실감이 났고 조금 전에 사진으로 보았던 경관을 더 자세히 볼 수 있어 헤매지 않고 감상했다. 바닷가 풍경을 실물로 직접 보니 이해도 빨랐고 각인도 잘되었다. 눈에 들어오는 형상을 놓치지 않고 카메라 속으로 열심히 수집하며 배에서의 흔들림도 즐겼다. 키를 조절해가며 중요한 지점에서 사진도 찍게 하는 선장님의 배려로 인해 맘껏 수려한 풍경을 담고 구운몽길이라고 손짓하는 먼 곳도 놓치지 않고 담으며 어렴풋이 보이는 주변을 극찬하기 바빴다.
이장님은 이곳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후 서울로 상경하여 KT에서 40여 년을 몸담고 있다가 2010년 말에 정년퇴직하여 귀향하게 되었다. 서울에서 더 생활을 할 수도 있었지만 부모님의 건강이 여의치 않아 장남으로서의 책임감과 의무감을 느꼈고 그곳에서 재경상주면향우회 사무국장을 역임하면서 남다른 애향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귀향 결정을 내리기까지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고향으로 내려와 그냥 부모님의 전답에서 농사만 지을 생각은 아니었다. 어떤 직업을 새로 가져야 할지를 미리 구상하고 선박주문 제작을 의뢰해 놓은 상태였다. 2010년 12월에 배를 주문하고 2011년 6월에 귀촌하여 7월에 진수식을 했으니 얼마나 빈틈없이 자신의 인생을 계획하고 설계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어부 생활을 평생하신 아버지는 아들이 어부가 되는 것이 싫어 극구 반대를 했지만 이장님의 강한 뜻을 꺾을 수 없었다.
처음에 배를 가지고 왔을 때 아버지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부모 마음이 다 그렇듯이 자신이 어렵게 했던 일을 자식도 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래서 약간의 실랑이가 있었고 아들이 바다로 나갈 때마다 아버지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하지만 생선을 좋아하는 부모님을 위해 생선요리를 자주 드시게 한 것은 지금 생각해봐도 잘한 일이였다고 했다. 고향에서 부모님과 오래 살려고 했는데 작년에 아버지가 91세로 돌아가셨고 88세인 어머니는 건강이 좋지 않아 요양병원에 계신다. 눈을 감으면서도 아들이 걱정돼 뱃일을 하지 마라고 당부하신 아버지의 유언은 지금도 나무에 연이 걸려있듯 마음에 걸려있는 듯했다. 그래서 배를 타고 출항할 때마다 아버지가 안장된 곳을 바라보며 절을 올리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물살이 센 곳에서 소용돌이치는 파도처럼 그의 두 마음이 아버지 앞에서 몇 번이나 소용돌이쳤을 것이라는 짐작이 되고도 남았다. 바다를 못 가게 말리는 아버지, 직접 잡은 생선을 맛나게 드시는 부모님 사이에서 약간의 심리적인 물결이 일어났을 테니까.
그는 어업과 낚시 유선업을 병행하다가 어업은 손도 많이 가고 힘들어서 요즘은 낚시 유선업만 하고 있는데 현재 고객이 꽤 많은 편이다. 웹사이트를 통해서 접수를 하고 전화로도 접수를 하지만 알음알음 소개를 받아서 오다보니 손님이 더욱 많아졌다. 사람들과 자주 만남을 가지다보니 친구 같고 형제 같은 기분이 들어 더욱 가깝게 지내고 있었다. 전국에서 낚시를 오기에 간간이 고장의 특산품을 챙겨주기도 한다. 그 성의가 고마운 선장님은 이심전심이 되어 저녁을 대접하기도 하고 농산물을 챙겨주기도 한다. 올해부터는 마을회관2층을 리모델링하여 단체손님 숙박도 제공하기에 많은 낚시객의 불편도 해소되었고 마을 수입도 올리게 되었다. 
대량마을에는 55세대가 살고 있고 남자가 33명 여자가 45명이다. 반농반어를 하는 마을 사람들은 이장님의 성품을 익히 알고 신뢰를 하고 있었다. 1996년에 12명이 맬 수 있는 상여를 마을에 기증하여 초상을 치를 때마다 유용하게 사용하게 했었다. 24명이 매던 나무상여를 가벼운 샷시 소재로 교체해 주었기에 이장님의 그 옛날 선행을 마을 사람들은 잊지 않고 오랫동안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화장 문화로 바뀌었기에 마을회의를 거친 후 그 상여를 고물상에 무료로 넘겨주었다. 그는 평소 마을 사람들의 신임이 두터웠기에 올해 만장일치로 이장님으로 추대가 되어 마을을 이끌어가고 있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부모 같고 형제자매 같다는 그는 마을의 안녕을 언제나 바라고 신경을 쓰고 있었다.
집집마다 전기수도가 고장이 나면 웬만한 건 이장님이 거의 해결해 준다. 그리고 보일러도 단순한 것은 손을 봐주며 주민의 손발이 돼 주고 있다. 그동안 쓰레기 처리가 잘 되지 않았지만

이번에 쓰레기장과 음식물쓰레기통, 농업용폐비닐장 등이 생겨 마을 주변이 아주 깨끗해졌다. 낚시객들을 태우러갔을 때 비닐봉투에 쓰레기를 담아왔는데 그것도 다 이유가 있었음을 알게 했다. 이장님은 손님들에게 “대량마을의 갯바위는 청결해야 한다. 매일 오는 곳이라 생각하고 쓰레기를 잘 챙겨라. 배에만 실어주면 내가 다 처리하겠다”는 말을 잊지 않고 꼭 전하기에 갯바위 주변은 언제나 비에 씻긴 듯 깨끗하고 날리는 쓰레기 하나도 없다. 그날 만난 낚시객은 동료에게 “여기 정말 좋다 다음에 또 오자”라며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깨끗한 환경에서 낚싯대를 던지며 새로운 충전이 되었기에 가능한 말일 것이다.
이장님의 친절한 안내와 사물에 대한 맛깔스런 설명은 사람들을 이곳으로 부르는 묘약이었다. 물론 바다주변의 절경도 좋고 감성돔 낚시도 잘 되어 오고 싶기도 하겠지만 이 바다로 수많은 낚시객을 부르는 사람은 바로 그의 인간미였다. 필자도 손님이 되어 선장의 안내를 친절히 받으며 갯바위의 넉넉하고 절묘한 맛에 취하여 한나절을 보내고 싶었다. 오시다호 남해별난어부(http://cafe.naver.com/osidaho88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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