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나무를 쪼개는 기세' '세력이 강하여 적을 거침없이 물리치고 쳐 들어가는 기세' 일이 거침없이 잘 풀리는 모양을 비유하는 말이다.
 중국 '진서(晉書) 두예전(杜預傳)'의 두예의 말에서 '파죽지세'가 유래하였으며, 거침없이 일이 잘 풀리는 것을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세여파죽(勢如破竹)'이라고도 하고, 칼날이 닿으면 쪼개진다는 뜻의 '영인이해(迎刃而解)'라고도 한다. 많은 사람들 가운데, 심지어 중국인까지도 '영인이해'를 '영도이해(迎刀而解)'로 알고 있는데, 아마 '칼날 인(刃)'자와 '칼 도(刀)'자가 글자가 비슷하고, 뜻도 큰 차이가 없어 발음하기에 '영도이해'가 더 쉽기 때문으로 추측이 된다. 
 중국의 삼국시대를 풍미했던 위(魏), 촉(蜀), 오(吳)나라는 불세출의 영웅들 유비(劉備), 조조(曺操), 손권(孫權)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가장 강성했던 위나라는 조씨 일가를 무너뜨리고 사마(司馬)집안이 이끄는 위나라가 유비아들이 있는 유선(劉禪:2대황제)의 촉나라를 무너뜨렸고, 이와 동시에 사마소(司馬昭)의 아들 사마염(司馬炎)이 위나라 원제(元帝)를 폐위시킨 뒤, 자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니, 그가 바로 무제(武帝)이며 국호를 진(晉)이라 했다. 이제 삼국가운데 남은 것은 오나라뿐이다. 진나라 무제는 삼국통일이라는 대업을 위한 마지막 과제로 오나라 정벌을 남겨두고 있는데, 무제는 신임하던 진남대장군(鎭南大將軍) 두예(杜預:정치가․책략가․학자)에게 군사를 주어 오나라를 치게 했다. 두예는 20만 대군을 거느리고 호북성의 강릉으로 진격했고, 다음해 무창(武昌)을 공략한 두예는, 전열을 정비하고 향후의 공격에 대한 회의를 가졌는데, 부하 한 장수가 아뢰기를 "잦은 봄비로 양쯔강 강물이 이제 곧 범람할 시기가 다가오고, 또 언제 전염병이 발생할지 모르니 일단 후퇴했다가 겨울에 다시 공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자 두예가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 우리 군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 대나무를 쪼개는 기세"라고 하며, "대나무는 두 세 마디만 쪼개지기만 하면 그 밑으로는 칼날을 대기만 해도 저절로 쪼개져, 다시 손댈 곳조차도 없게 되는데,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다"라고 했다. 이어 전군을 오나라의 도읍인 건업(建業:남경)으로 진격하여 단숨에 함락시켰다. 오나라왕 손호(孫皓)의 항복을 받아내니 진나라의 삼국통일 위업과 함께 '파죽지세'라는 말을 나오게 했다. 그 후 두예는 오나라를 평정한 공으로 당양후(當陽候)에 봉해졌다. 두예는 파죽지세의 유래에서 보듯 오나라를 멸하는 혁혁한 공을 세우며, 진나라시대 높은 벼슬을 하였고, 당시 두예를 향한 황제의 신임과 백성들의 촉망은 대단했다. 삼국통일 후 정치를 통한 민생안전에 힘썼으며, 만년에는 학자로서 학문과 저술에 힘을 기울여, 학문적으로 가치가 있는 '춘추석례(春秋釋例)' 좌전집해(左傳集解)'등의 많은 저서를 후세에 남기기도 했다.
 중국 역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최고의 시인, 시성(詩聖)이라 불리는 두보(杜甫)의 선조로 알려져 있으며, 그만큼 중국역사에 있어서 나름의 큰 역할을 한 인물로 정평이 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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