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탐방 이창희

필자가 찾는 집이 전방 20미터를 남겨 놓고 헷갈리기 시작했다. 오른쪽은 바다였기에 분명왼쪽으로 접어들어야 했지만 들어서는 산길 입구가 너무 좁아 바로 오르는 게 주저댔다. 그 지점에서 오늘 만날 주인공에게 전화를 했더니 “올라올수록 길이 넓어지니 그 길로 계속 들어오라”고 했다. 짙은 옷을 입은 그는 몇 미터 높은 위치에 서서 손을 흔들며 수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아, 저기구나 가속페달을 밟으며 기쁜 마음으로 고지를 향해 달렸다. 너그러운 웃음으로 반기는 표정이 좋아 필자도 덩달아 웃으며 집안으로 들어갔다.
귀촌인 이창희 씨는 경북 의성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55년을 살다가 70세 되던 해인 2011년에 특용작물 고사리가 있는 창선 대곡마을로 이사를 왔다. 도시에서 기업체도 경영하고 기반도 잘 잡았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자식에게 기업체를 물려주고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거실 창을 통해서도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고 주변에 있는 산과 고사리밭도 조용조용 집안으로 들어왔다. 땅에서 마술을 부려 어느 날 불쑥 올라온 것 같은 집 한 채가 그림 같은 풍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모든 풍경이 아름답게 살아 움직이며 필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복잡한 도시에서 어찌 살았는가, 이렇게 좋은 곳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이곳이 극락이고 낙원이고 천국이다”는 생각을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되뇌곤 한다. 
처음에는 시골에서 농사는 짓지 않고 전원생활만 하리라 생각했는데 몇 개월을 지내다 보니 무료함과 적적함이 몰려와 이렇게 살아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그는 내가 살고 있는 이것이 무엇인가 갑자기 회의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의 아내는 이곳에서 배추 한 포기도 사 먹으며 공주처럼 살 생각만 했기에 농사에 농자도 생각하지 않고 있던 시기였다. 하지만 가까운 산으로 등산을 다니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문득 ‘일거리 하나 만들어보자’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여 고사리밭 600평을 사게 되었다. 마침 고사리 철이 되어 밭을 사자마자 생각지도 않은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일이 보배로구나’하는 의식변화가 되면서 집에서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 고사리밭에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면서 핀셋으로 풀을 뽑으며 초보농사꾼의 하루하루를 즐겁게 시작하였다. 어느 날 마을 사람이 바로 옆 고사리밭도 사라고 권해서 좀 더 사게 되었다.
그런데 고사리는 3개월만 재배하고 9개월은 쉬어야했다. 일 맛을 들인 상태에서 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주변의 휴경지 밭을 임대하여 강낭콩 마늘 시금치 고추도 심었다. 가족들이 먹을 것을 준비하고도 양이 너무 남아 농협과 마을기업을 통해 팔기도 했다. 그리고 좀 더 편하게 농사를 지으면서 능률도 올리고 싶어 필요한 농기계도 사고 일손을 덜어 줄 농기구들도 직접 개발하여 실제 활용을 했다. 자꾸 생각을 하며 머리를 쓰다 보니 짧은 시간에 많은 능률을 올릴 수 있었고 수입도 증가되었다. 언제부터인가 남해에서 고추농사를 제일 잘 짓는 사람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농약을 쓰지 않고 농사를 지었는데도 품질이 우수하고 수확도 좋으니 사람들이 그 농사법을 무척 궁금해 했다. 
지금은 3000평을 임대하여 여러 농사를 짓고 있다. 알음알음 이곳 농작물을 먹어본 사람들은 매년 잊지 않고 주문을 하고 또 다른 집에 소개도 해 주고 있어 팔 농작물이 모자랄 정도까지 되었다. 택배로 농작물을 보낼 때도 주문한 것보다 더 많은 양을 주거나 다른 푸성귀를 끼워서 주기도 한다. 호박 고추 가지 등을 함께 넣어 보내면 받는 쪽에서는 정을 느끼고 이것저것 또 다른 것을 주문한다. 한 번은 고춧가루를 1근에 11,000원 주기로 미리 약속을 했는데 그해 1근 값이 17,000~19,000원으로 거래가 되었다. 손님에게 약속한 대로 11,000원을 받겠다고 했는데도 그쪽에서 시세를 알고는 15,000원씩으로 계산해 주었다고 한다. 정성껏 키운 농산물을 싼 값에 먹을 수 없었던 양심 있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일화를 그는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거실 창을 통해서 보면 시원한 바다가 보이고 옆으로 산이 보이지만 그것을 보기 전에 먼저 들어오는 것은 옆으로 살짝 비켜 세워 둔 트랙터이다. 농사에 필요한 기계들을 구입하기도 하고 직접 만들기도 하여 농사를 짓는 그는, 고추 모종 빨리 심는 방법, 고춧대 쉽게 묶는 방법, 고추를 따서 담는 구루마 사용법 등 다양한 기계의 힘을 빌리고 있었기에 소소한 농기계가 많이 구비되어 있다. 다른 사람들은 이틀을 끙끙거리며 할 일을 2시간 만에 다할 정도로 능률적인 도구들을 갖추고 있으니 농사일이 그렇게 힘들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에게 사용하던 농기구를 빌려줘도 몇 십 년 동안 손에 익은 방법으로 다시 되돌아가 버려 안타깝다고 한다. 그리고 농업인 교육장에 많은 사람들이 와서 신농법을 듣고 배운 대로 적용도 해봐야 하는데 옛날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기에 교육은 하나마나한 결과가 되기도 한다. 교수들이나 강사들은 자신들이 강의한 내용을 잘 받아들이고 그대로 농사를 짓는 사람은 귀농인들이라고 말할 정도라고 하니 농사 습관을 바꾸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알게 한다.  
요즘 그는 귀농인들에게 사례 발표도 하고 귀농귀촌인들의 교육이 있을 때는 꼭 초대가 되어 귀농 체험을 들려주며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귀농인들에게 결과보다 과정을 먼저 말하면 솔깃하게 듣고 질문도 해서 보람을 느낀다. 귀농을 하려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까 고민을 하다가 그를 찾아와 조언을 듣고는 확신을 얻고 돌아가 바로 정착을 하게 된단다. 60대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사람에게 “나는 70대부터 농사를 지었고 지금 아주 건강해졌다. 농사는 부지런하고 열정만 있으면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용기를 준다. 찌푸린 얼굴로 왔다가 돌아갈 때는 웃음을 띠고 돌아간다. 그는 76세라는 고령의 나이이지만 자신의 도움이 필요해서 찾아오는 사람도 있고 자신의 말을 듣고 싶어 오는 사람들도 있고 해서 요즘 사는 보람을 느끼고 행복하다고 한다.
기업체를 경영하면서 많은 직원을 관리하면서도 느끼지 못했던 참맛을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숨을 쉬면서 “아! 참 좋다”가 절로 나온다. 하지만 처음부터 만족을 한 것은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의 텃세가 몇 년 동안 있었다. 마을회의에서 어떤 발언을 하면 그것을 수용하기보다 배척을 먼저 해버리곤 했다. 어느 마을에서나 귀농귀촌인들이 겪는 그런 비슷한 것들이었다. 그는 마을 주민들과 친근해지려고 많은 노력을 하다 보니 지금은 운영위원으로 활동하며 마을 일에 함께 동참하고 있다.“사는 게 별 거 아니다, 서로 신뢰가 쌓이면 자연히 편하게 되고 사는 것도 좋아진다”
처음에 정착할 때는 일을 멀리할 생각이었는데 지금은 일을 통해 고소한 맛을 느낀다. 주변에서 부산에 있을 때보다 더 젊어졌다는 말들을 한다. 2015년 남해군 귀농귀촌사례집에 그의 글이 실렸고 2017년 농림수산식품교육문화정보원에서 발행한 전국 귀농귀촌우수사례집 20인 속에도 그의 6년 동안의 귀농 글이 실렸다. 2017년 3월 21일 경남도민일보에도 글이 나갔고, 얼마 전에 남해어느신문에도 그의 귀농 글이 나갔다. 이번에 남해신문으로 나가는 이 글은 신문지면상으로는 세 번째가 된다. 그의 성공적인 시골 정착기와 6년째의 농심을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싶은 마음 필자 또한 컸기에 우리 신문사에서도 욕심을 내어 이번에 싣게 되었다. 이창희 씨 부부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하회탈보다 더 진한 웃음이 계속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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