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중문학상 시상식 때 유배문학관 야외광장에서 개량한복을 입고 120개의 줄연을 날리는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한없이 하늘을 쳐다보며 여러 개의 연을 묘기 부리듯 날렸던 사람은 야촌마을에서 ‘사부랑공작소’ 를 운영하는 윤종민 씨다. 바람이 그렇게 많지 않은 날이었는데도 연은 꼬리를 이리저리 흔들며 역동적이고도 자유롭게 하늘을 유영했다.

 

20여 년 동안 연 사랑에 빠져 더 나은 연을 만들기 위한 고민을 하다 

남면 우형마을이 고향인 그는 부산에서 직장을 다니면서 연 동호회에 가입하여 20여 년을 연과 함께 살아왔다. 동호회에 스승은 따로 없었지만 동호인들끼리 서로의 장점을 주고받으며 좋은 연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수없이 했다. 선친이 연 만드는 일을 즐겨 보고 자란 그는, 정월대보름날에 어른들이 액운을 없앤다고 연줄을 잘랐던 그 일을 아프게 기억하고 있었다. 더 날리고 싶었던 연을 강제로 떠나보내야만 했던 그때 일이 결핍의 후유증으로 각인되었는지 얼레를 돌리다 보면 뭔가가 해소되는 듯한 희열을 느낀다고 한다. 현재 서울을 비롯하여 부산 밀양 사천 등에서 동호회원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부산 민속연 보존회’와 같은 곳에서는 1년에 한 번씩 전국에서 모여 든 연사들과 함께 공식대회를 치르고 있었다. 부산에는 기능보유자가 있는 관계로 열심히 후배 양성에 힘쓰고 있다는 말을 부러운 듯이 전하기도 했다. 앞으로 남해에도 기능보유자가 생겨 연 만드는 일이 계속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다.
선생님께 연날리기 대회에서 우승을 해 본 적이 있는지를 여쭸더니 “저는 우승이 목적이 아니라 연을 어떻게 잘 만들지를 고민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연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연을 빨리 움직이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좀 더 가볍게 만들 수는 없을까, 어떻게 하면 탄력이 더욱 좋아질까”눈을 뜨면서부터 잠들 때까지 온종일 그것만이 화두였다. 귀중품을 보관할 것만 같은 고급스런 큰 사각함에는 방패연이 가득 들어있었다. 습기에 약한 연을 보호하기 위한 상자는 외관도 돋보였지만 내구성도 좋아보였고 무척 신경을 썼다는 느낌을 받았다. 얼마나 연을 자식처럼 애지중지하는지를 잘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작업실에는 대살도 1000여 개 이상이 준비되어 있었고, 방패연 모양으로 오려놓은 한지도 꽤 되었다.

방패연의 우수성과 임진왜란 때 사용한 32종류의 전술연

방패연은 가운데 부분이 동그랗게 뚫려있는 방구멍이 있는데 그것은 바람의 저항을 줄여주는 역할을 한다. 줄은 활머릿줄 가운뎃줄 윗목줄 아랫목줄 네 개의 줄로 되어 있어 정확하게 연을 잡아준다. 대살로는 머릿살, 허릿살, 가운뎃살, 대각선으로 된 두 개의 장살이 있어 다섯 개의 대살이 방패연을 의젓하게 만들어준다. 우리 한글이 과학적으로 만들어졌듯이 우리의 전통연도 얼마나 과학적으로 만들어졌는지를 알 수 있었다. 줄연은 볼거리만 제공하지만 방패연은 기능성연으로써 바람이 정면으로 불더라도 좌우 180도와 상하 90도로 자유자재로 조절이 가능하여 연날리기에 유리한 장점으로 작용했다.
임진왜란 당시 적을 물리치기 위해 사용된 비연은 통신 수단으로 적절히 사용됐었다. 연에는 빨강과 검정으로 색이 표현되는데 밤에는 검정으로 나타냈고 낮에는 빨강색으로 나타냈다. 일례로 ‘머리눈쟁이연’은 ‘산의 능선을 공격하라’, ‘기봉산연’은 ‘기봉산 앞바다로 집결하라’, ‘까만외당가리연’은 ‘새벽에 북쪽을 공격하라’, ‘위까치당가리연’은 ‘아침 일출시에 공격하라’ 등 여러 내용을 담은 연들이 무려 32종류였다. 그 옛날 전시통신수단으로 쓰인 연을, 우리는 단지 바람을 타고 훨훨 나는 연으로만 치부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기계문명의 발달이 전혀 없던 시기에 착안한 전술연은 지금도 자손대대로 이어져 그 당시 선조들의 지혜를 다시 한 번 음미하고 그렇게 지켜온 나라를 더욱 사랑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을 듬뿍 생기게 했다.

동호회를 결성하고 ‘연날리기 전국대회’ 를 남해에 유치하고 싶은 마음

그가 지금껏 연을 놓지 못하는 이유는 고향인 남해에는, 연 날리는 사람도 없고 연날리기 대회도 없고 전통을 이어가는 사람도 없어 안타까운 마음이 언제나 있었다. 그래서 큰 열망을 가지고 지난 9월에 고향인 남해로 오게 되었다. 남해에서 동호회를 결성하여 연날리기를 활성화시키고 전국대회도 남해에 유치하고 싶어 했다. 다른 곳은 몰라도 우리 남해만큼은 역사가 제대로 숨 쉬고 있는 곳이기에 다른 지역보다 우선적으로 ‘민속연 보존회’가 면면히 이어져야 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동안 부산에서 생활하면서 학교에서 학생들과 연 만들기 체험학습도 하고 특별활동 시간을 이용해 수업도 많이 했었다. 구청에서 연 만들기 특강도 하여 반응이 아주 좋았다. 유치원에서는 어머니랑 함께 하는 수업도 진행했다. 주민 센터, 기업체 등에서도 수업을 종종했으며 행사가 있을 때는 부수적으로 연을 만들고 날리기를 했다. 그가 지금도 부산에서 초청을 많이 받고 있는 것을 보면 그곳에는 확실히 전통연이 자리를 잡은 것 같았다. 남해에 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유배문학관에서 근 한 달 정도, 연 전시회를 열었고 화전문화제 때는 부스를 제공 받아 연 만들기 체험도 했다.

모든 것이 준비되었고 이순신순국공원의 부름에 화답하는 일만 남음

이순신 장군의 역사가 살아 있는 이곳 남해에 전시 때 통신수단으로 사용했던 연을 되살리지 않는다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후손으로서 많이 부끄럽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말처럼 이순신 순국공원 안에 임진왜란 때 사용했던 연을 전시하는 것은 모든 면에서 필요충분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확신이 들고도 남는다. 제2남해대교가 개통되어 관광객들이 이순신순국공원으로 몰려들 때 오방색의 연을 만나게 하고 조상의 지혜를 한 번 더 더듬어 보는 시간을 갖게 한다면 남해의 위상은 더 높아질 것이다.
주된 행사에 묻혀 곁다리로 열리는 연날리기가 앞으로는 그것이 주가 되고 다른 행사가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일들이 많아지기를 바라고 싶다. 남해에서 시급하게 추진해야 될 것은 동호회 구성이다. 일단 뜻있는 사람들이 모이면 그 다음은 순차적으로 진행될 것이다. 혹시 마음에는 두고 있지만 방법과 통로를 몰랐다면 ‘남해 연 사부랑 공작소’(연락처:010-8550-0507)로 전화하여 그를 찾았으면 한다. 조상의 얼이 가득 담긴 연이 일부 지역에서만 이어진다는 것은 남해 후손들로서의 자세가 아닌 것이다. 연사랑에 빠진 그는 모든 것을 준비하고 있는 문화 병사였다. 방패연 32개를 정성껏 준비한 액자를 본 순간, 가슴이 뭉클했다. 지역에서 손만 내밀면 곧장 달려갈 수 있는 무장된 사람의 자세를 들여다보았기 때문이다. 방패연의 이름과 풀이말을 진하게 적어놓은 액자가 빨리 빛을 발했으면 하는 마음이 나도 모르게 간절해진다. 그는 감탄하는 필자를 보고 갑자기 연보관함에서 ‘된방구쟁이연’, ‘보름(만월)날 공격하라’는 연을 꺼내 선물로 주었다. 그것을 받아든 순간 통신수단병의 임무를 부여받은 것처럼 마음이 급해졌다. 빨리 장군에게 전하여 승리를 이끌어내고 싶었다.

저작권자 © 남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